베드로후서 제 1 강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
말씀/ 베드로후서 1:1-21
요절/ 베드로후서 1: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베드로후서는 사도 베드로의 두 번째 서신으로 수신자는 동일합니다(벧후3:1). 이 서신은 A.D 66-67년경 사도 베드로가 순교 직전에 로마에서 쓴 것입니다. 베드로전서가 신자들이 교회 외부로부터의 박해에 어떻게 대처해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었다면, 베드로후서는 교회 내에 침입한 거짓 선생들을 경계하고 복음진리 위에 굳게 설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주시고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누릴 수 있게 된 영적 축복이 무엇인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또한 신자들이 믿음 위에 힘써 쌓아야 할 덕목에 대해서 말하고, 이미 서 있는 진리 안에 굳게 서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내면이 성숙한 신앙인으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1-4)
1, 2절은 인사입니다. 베드로는 먼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사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해서는 절대 복종하는 종이요, 세상에 대해서는 예수님의 전권대사로서 권위를 가지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수신자들은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함께 받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믿음의 기초는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임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세상의 그 어떤 보화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보배로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믿음은 우리의 노력과 선한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수신자들이 하나님과 예수님을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더욱 풍성하기를 기원합니다. 이 은혜와 평강은 단순한 인사 이상의 것으로써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님을 앎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앎은 철학에서 말하는 이성적 지식이나 영지주의에서 말하는 직관적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아는 완전한 지식을 의미합니다. 이 앎은 긴밀한 인격적 관계성으로서 연합을 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님과 깊은 인격적 관계성을 가질 때 우리의 심령에는 은혜와 평강이 풍성히 임하게 됩니다.
사도 베드로는 인사에 뒤이어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주신 영적 축복이 무엇인가 말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신기한 능력이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신적 능력을 의미합니다. 생명이란 영적 생명을, 경건은 경건한 삶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신적 능력으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고 또 거룩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모든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도저히 변화될 것같지 않은 사람이 변화되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보면 신기한 능력으로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 보면, 한 사람도 예외없이 하나님의 신기한 능력으로 변화 되었습니다. 과거 우리는 영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자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노력하고 결심해도 변화될 수 없었으며 또 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습니다. 이를 볼 때 내가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영적인 축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우리를 부르신 그리스도를 알고 그와 교제함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그 자신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영광은 하나님의 속성과 본질을 나타내고 덕은 그의 도덕적 속성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사도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앎으로 말미암아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선물로 받게 된 것을 강조하는데 뜻이 있습니다. 당시 풍미하던 가장 큰 이단 사상은 영지주의(Gnoticism)였습니다. 영지주의는 영적인 것, 형이상학적인 것은 선하고, 물질적인 것, 형이하학적인 것은 악하고 추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고 그의 육체는 정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가현설을 주장했습니다. 또 그들은 직관적으로 높은 영적 지식을 얻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영적인 것은 선하게 여기고 물질과 육신은 악하게 여긴 결과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하나는 육신을 괴롭히고 학대하는 금욕주의요 다른 하나는 육은 본래 추하고 더러운 것이므로 아무렇게나 해도 괜찮다는 도덕적 타락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런 이단 사상에 대항하여 참된 지식은 우리를 방종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성결한 생활을 하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신적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영생을 누리며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둘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주셨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이로써'란 말은 '그리스도의 영광과 덕으로써'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에게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 약속들은 무엇을 말합니까? 이는 그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요3:16). 또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주신다는 것입니다(벧전1:3,4). 또한 우리의 몸이 장차 썩지 않고, 신령하고, 영광스럽고, 강한 몸으로 부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고전15:42-44). 또 그리스도께서 심판장으로 오셔서 온 세상을 심판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게 되는 그리스도 재림에 관한 약속입니다(벧후3:12,13). 뿐만 아니라 실생활에서도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때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신다는 약속이 있습니다(마6:33). 또 우리가 이방 땅에 나아가서 선교 사명을 감당할 때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이 있습니다(마28:18-20). 성경에는 약속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사는 것입니다.
왜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이라고 했을까요? 이는 세상의 거짓 약속들과는 달리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주신 참된 약속으로서 너무나 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약속들로 말미암아 우리가 누리게 된 축복이 너무나 엄청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약속들로 말미암아 누리게 된 영적 축복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세상의 썩어질 것들을 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요일2:15,16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세상에 있는 것은 고상하고 멋있게 보이지만 결국 따지고 보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는 세 마디 단어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들은 영원한 것처럼 생각되지만 그 결국은 썩고 부패하여져서 없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즐기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이래서는 안 되는데 하며 그런 생활에서 벗어나기를 소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것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어도 자기 힘으로 도저히 벗어날 수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정욕된 삶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면 칠수록 알 수없는 세력이 나를 사로잡아 점점 헤어날 수없는 늪으로 빠지게 하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 때 우리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하며 탄식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살게 되면 이 약속의 말씀이 나로 하여금 세상의 썩어질 것에서 벗어날 힘을 줍니다.
둘째로, 신의 성품에 참예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신자는 약속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썩어질 것에서 벗어날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신의 성품에 참예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새로운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아 나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과거 우리는 아담의 본성을 타고 났기 때문에 본질상 진노의 자식으로서 심판을 면할 수 없었습니다. 그 때는 거룩한 삶을 살고 싶어도 그런 삶을 살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보배 피로 구속받아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아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실로 말로 다할 수 없는 축복입니다.
Ⅱ. 그리스도인이 쌓아야 할 덕목들(5-11)
5-7절까지는 그리스도인이 힘써 쌓아야 할 덕목이 무엇이며, 8-11절은 이런 덕을 쌓은 자와 쌓지 않는 자의 차이가 무엇인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5절에서 '이러므로'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들을 주시고 그 약속으로 인해 세상의 썩어질 것을 피해 신의 성품에 참예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라는 뜻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적 생명을 주시고 영적 생활을 할 수 있는 모든 환경을 마련해 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이 기초 위에 힘써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열심과 정열을 가지고 자발적인 노력을 경주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이미 약속해 주신 은혜에 자기의 역량을 더욱 부과시키라는 뜻입니다. Woods는 말하기를 "인간의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참여란 그리 중요한 역할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인간이 전폭적으로 따르고 헌신한다는 뜻이 이 낱말 속에 포함되어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역할만으로는 우리의 구원을 완성할 수 없고 우리의 역할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2:13절에서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예정론을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은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께서 이미 정하신 것은 변개할 수 없다는 숙명론에 빠져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무기력하게 지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1517년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후 개신교는 예정론의 영향으로 선교에 힘쓰지 못했습니다. 카톨릭 교회가 제수잇을 창설하여 선교에 전념할 때 개신교는 약 2세기 동안 깊은 영적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8C에 William Curey가 나타나 세계 선교는 신자의 의무이므로 힘써 감당해야 함을 역설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들은 그를 진정시키며 말했습니다. "젊은이, 앉게나. 하나님께서 이방 선교를 원하시면 우리가 가만히 있어도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하실 것일세." 그러나 William Curey는 힘써 세계 선교를 감당하여 근대 선교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또 잘못된 사상은 성령의 은사를 받으면 모든 것을 감당할 능력을 주시므로 애써 노력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노력하고 투쟁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하늘로부터 성령의 은사가 뚝 떨어지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크게 오해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마7:7)라고 하셨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지만 이를 거저 주신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쟁취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힘써 우리의 믿음에 7가지 덕성을 쌓기에 노력해야 됩니다. 믿음은 우리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지만 믿음의 성장은 전적으로 우리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습니다. 신앙성장은 근본적으로 성령의 도우심을 덧입어 우리의 지성과 감성과 의지와 힘과 정열과 재능 등 우리의 모든 것을 사용하여 노력을 경주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크리스천이 힘써 쌓아 나아가야 할 덕목들은 무엇입니까?
첫째, 믿음: 믿음은 신자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로서 집으로 말하면 기초에 해당됩니다. 이것은 우리의 노력과 행위가 전혀 개입되지 않고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를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였습니다(엡2:8). 그리스도인의 성결한 생활은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튼튼한 집을 지으려면 기초가 튼튼해야 되는 것처럼 믿음의 집을 지어 나가려면 먼저 믿음을 견고케 해야 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의 뿌리를 깊이 내려서 어떤 역경이 닥쳐 오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믿음 위에다 덕목을 하나 하나 쌓아 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기독교 윤리와 일반 윤리와의 차이가 있습니다.
둘째, 덕: 덕은 사상과 감정과 행동의 덕스러운 품행 곧 덕행, 도덕적 선행을 의미합니다. 또한 덕은 사람을 품고 섬기는 내면성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산다고 해서 도덕성을 무시하고 상대방에게 불쾌감과 피해를 주며 염치없이 행동하기 쉽습니다. 또 자기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독선에 빠지기 쉽습니다. 믿음은 좋은데 덕이 없는 사람을 보면 어딘지 모르게 염치가 없고 독선적이고 율법적인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진리는 있는데 은혜가 없기 때문에 부담스럽습니다. 그의 말은 다 옳은데 이상하게도 얄밉습니다. 그래서 덕이 없는 사람에게는 사람이 잘 붙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수룩하게 보이고 남의 말은 잘 들어주고 사람을 잘 품고 섬기는 사람, 한 마디로 덕이 있는 사람에게는 사람이 잘 붙습니다. 우리는 믿음에 덕을 쌓기에 힘써야 합니다. 덕스러운 크리스천이 될 때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셋째, 지식: 지식은 세상적인 지식이 아니라 영적 지식을 의미합니다. 덕은 있지만 지식이 없으면 분별력을 잃고 잘못된 길로 가기 쉽습니다. 지식이 없는 덕은 미혹에 빠지기 쉬운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덕에 지식을 쌓기에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 공부를 열심히 하여서 무엇이 옳고 그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하신 뜻이 무엇인가를 아는 영적 분별력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넷째, 절제: 절제는 자기 통제로서 자신의 정욕을 제어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혈기와 동물적 요소가 있습니다. 절제란 혈기를 죽이고 동물적 요소를 이성의 통제하에 두는 것입니다. 또 절제란 자기가 하고 싶은 일보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하고 싶은 일이 있고 또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없이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 사이에서 방황합니다.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은 머리도 좋고, 재능도 많고, 능력도 많은데 마땅히 해야 할 일보다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일만 하다가 실패하고 자학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지식에 절제를 쌓기에 힘써야 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보다도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고 그 후에 하고 싶은 일을 하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각을 절제하고, 감정을 절제하고, 말을 절제하고, 행동을 절제해야 합니다.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여 혈기를 부리다가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생각을 절제하지 못하여 되는 대로 막 생각하다가 시험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마땅히 생각해야 할 그 이상의 것을 생각하지 않도록 생각을 절제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절제할 때 생활의 질서가 생기고 능력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다섯째, 인내: 인내는 단순히 참는 것이 아니라 역경 중에서도 굴하거나 포기치 않고 지속적으로 변함없이 견디어 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내'의 문자적인 뜻은 "뒤에 속한다"는 뜻으로 "도망가지 않고 뒤에 남는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데는 인내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힘든 일이 많습니다. 그래서 중도에 모든 것을 그만두고 도망가고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좀 힘들다고 인내하지 못하고 도망가 버린다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마라톤 경주와 같습니다. 마라톤 경주는 인내를 요구합니다. 경주를 하다가 힘들다고 해서 중간에 포기해 버린다면 결코 상을 얻지 못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출발했습니다. 우리가 중도에 포기치 않고 끝까지 달려갈 때 우리 주님께서 예비하신 의의 면류관을 얻게 될 것입니다.
여섯째, 경건: 경건은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는 인간의 의무로서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기를 힘써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릴 때 참된 기쁨이 있게 됩니다.
일곱째, 형제 우애: 이는 다른 사람의 필요에 관심을 가지고 돌아보는 것입니다. 형제 우애는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귀히 여기고 아끼고 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형제 우애가 있을 때 성도 간에 사랑의 공동체가 이루어져 은혜가 넘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여덟째, 사랑: 형제 우애만으로는 충분치 못합니다. 궁극적으로 완전하고 특별한 사랑이 공급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사랑은 아가페적인 사랑으로서 여기에는 반드시 희생이 요구됩니다. 이는 우리를 영원한 파멸에서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서 잘 나타났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한1서4:7,8). 사도 바울은 신자들이 갖추어야 할 필수 요건은 믿음, 소망, 사랑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고전13:13). 우리가 실제 생활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배워나갈 때 우리의 삶은 풍성해지고 재미가 없고 은혜가 넘치게 됩니다.
이상 여덟 가지의 덕은 믿음에서 시작해서 사랑으로 끝납니다. 이는 신앙의 교향곡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이런 덕목들을 하나하나 쌓아나갈 때 영적으로 성장하게 되고, 영적으로 성장하게 되면 자연히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덕을 쌓지 않을 때 영적 소경이나 근시안이 되어 현세에만 얽매이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고, 구원의 은혜마저 상실하여 결국에는 실족하게 됩니다. 영적으로 성장하지 않으면 퇴보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신앙성장을 위해서 믿음 위에 덕을 쌓기에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부르심과 택하심은 구원의 근원이기 때문에 굳게 해야 됩니다. 이렇게 할 때 실족치 않고 하나님 나라에 넉넉히 들어감을 얻게 됩니다(11).
Ⅲ. 진리 안에 굳게 서라(12-21)
사도 베드로는 계속해서 그들이 이미 서 있는 진리 위에 굳게 서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현재 서 있는 진리를 새롭게 하기 보다 새로운 진리가 없는가 다른 것에 귀를 기울이다가 미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우리는 이미 서 있는 진리를 새롭게 함으로써 그 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그 때 실족치 않고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세상을 떠날 날이 임박했음을 알고 그들을 일깨워 생각나게 하고자 했습니다.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그의 재림에 관한 말씀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가 아니라 확실한 진리라는 것입니다. 그는 먼저 자신이 변화산상에서 체험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변화산상에서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되심을 직접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었습니다. 또 그보다도 더 확실한 증거는 구약의 예언의 말씀이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요5:39). 예언의 말씀은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습니다. 그러나 어두운 밤이 지나고 날이 새게 되면 등불은 더 이상 필요없게 됩니다. 이와 같이 새벽별 되신 예수님께서 오시게 되면 예언의 말씀은 더 이상 필요없게 됩니다. 신자들은 그날까지 성경을 주의 깊게 읽으며 어두운 마음을 비추이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19)
그러나 성경을 공부할 때 주의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을 사사로이 풀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주관적으로 해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데에는 몇 가지 중요한 원칙이 있습니다.
첫째로, 성경은 문맥 속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한 예언은 다른 예언의 도움 없이 단독으로 이해될 수 없습니다. 즉 한 말씀을 문장 속에서 떼어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이단의 오류의 빠지게 됩니다. 말씀은 반드시 문장 속에서 이해해야 하며, 성경 전체의 통일된 사상 속에서 이해되어져야 합니다. 이 때문에 구약은 신약의 눈으로 보고 신약은 구약의 눈으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성경은 신자 자신의 개인적인 기호에 따라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겸허하게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가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는 Calvin이 말한 대로 성경이 가면 우리도 가고, 성경이 멈추면 우리도 멈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 밖의 것을 이야기 할 때 오류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성경은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올바로 해석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사람의 뜻으로 된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기 때문에(21), 반드시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 해석되어야 올바르게 해석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가장 좋은 성경 선생이 되십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할 수 있는 큰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믿음 위에 덕과 지식과 인내와 경건과 형제 우애와 사랑을 쌓기에 온 노력을 경주해야 합니다. 그 때 우리는 내면이 성숙한 신앙인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