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후서 제 2 강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라
말씀/ 베드로후서 2:1-3:18
요절/ 베드로후서 3: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예수님은 말세의 징조로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메시야들이 출현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13;22). 그들은 거짓 희망을 심고 거짓 교리를 진리처럼 확신있게 가르침으로 사람들을 미혹하여 진리의 도에서 떠나게 만듭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거짓 교리를 가르치는 거짓 선생들에 대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들의 부도덕한 생활을 경책하며 그릇된 말세론에 대해서 논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말세를 사는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마음 자세와 생활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말세 중의 말세로서 미혹의 영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도처에서 거짓 희망을 심고 거짓 교리를 가르치는 거짓 선생들이 미혹의 손길을 뻗치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거짓 선생들의 정체를 살펴보고 이를 경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 생각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말세지말에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자세가 무엇인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Ⅰ. 거짓 선생들의 멸망(2:1-22)
(ⅰ)거짓 선생들의 특징(1-3)
사도 베드로는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거짓 예언자들이 있었던 것같이 너희 중에서도 거짓 선생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약시대의 거짓 선지자들은 백성들의 인기에 편승하여 사람들이 듣기에 좋은 말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멸망이 임박하였는데도 평화를 선포하여 백성들이 죄악 중에서 돌이키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을 진정으로 사랑하여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는 예레미야와 같은 선지자들을 핍박하였습니다(렘28장). 이와 같이 역사적으로 거짓 선지자들이 있었던 것과 같이 거짓 선생들이 출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거짓 선생들의 특징을 몇 가지로 말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그들은 그리스도를 부인한다는 것입니다. 거짓 선생들의 관심은 신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보배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를 값주고 사신 절대적인 생명의 구주가 되십니다. 그러나 거짓 선생들은 예수님을 상대화시켜서 결국에는 부인하게 만듭니다. 이를 위해 그들은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입니다. '이단'이란 본래 '의견, 견해'라는 뜻입니다. 고전 헬라어에서는 다른 견해를 말하는 철학 학파들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잘못된 의견' 즉 바른 신앙으로부터 벗어난 잘못된 견해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단들은 그럴 듯한 합리적인 이론을 내세워 여호와의 증인과 같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거나, 영지주의와 같이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인합니다. 그들은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입니다.
둘째로, 그들은 음란합니다. 사람에게는 본능적으로 색을 좋아하는 감정이 있습니다. 그래서 음란한 글이나 음란한 만화나 영화를 보면 자신도 모르게 은밀하게 즐기고 싶습니다. 참된 가르침은 이러한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고 성결한 삶을 살도록 권면합니다. 그러나 거짓 선생들은 죄악된 본능을 억제하는 대신 오히려 그것을 인간의 자연적인 감정의 발로라고 하여 이를 즐기도록 조장시킵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에 쉽게 미혹됩니다. 이로 인해 진리의 도가 훼방을 받습니다.
셋째로, 그들은 탐심이 가득합니다. 탐심이란 개인적인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야심으로서 주로 물질에 대한 욕심을 말합니다. '이를 삼는다'는 것은 '장사한다'는 뜻입니다. 거짓 선생들의 가르침의 목적은 순수하게 인간의 영혼을 돕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업을 하여서 물질적인 부를 축적하는데 있습니다. 그들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럴싸하게 말을 지어내어 돈을 긁어모읍니다. 이런 자는 목회자를 사칭한 협잡꾼이요 사기꾼들입니다. 그들의 결국은 심판이요 멸망입니다.
이상에서 볼 때 이단의 특징은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또 겉으로는 그럴싸하게 말하지만 실상은 호색과 물질에 대한 탐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단은 인간성을 파괴시키고 가정과 사회를 파괴시키는 무서운 결과를 낳습니다. 이런 이단들은 사회가 불안하고 가치관이 혼돈될 때 일어나게 됩니다. 또 교회가 낡은 가죽부대와 같이 교리에 얽매여 율법적이 되고 형식적이 될 때, 사랑이 식고 말씀이 없을 때 일어나게 됩니다.
(ⅱ) 심판의 전례들(4-9)
사도 베드로는 거짓 선생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필연적임을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예는 타락한 천사들입니다. 천사들은 인간들과 달리 영의 존재로서 하나님을 가까이서 섬기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일단의 천사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자 교만해져서 자신들의 지위를 떠나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였습니다(겔28:1415,17). 하나님은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최후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천사라 할지라도 범죄했을 때 용서치 않으시고 심판하셨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예는 노아의 홍수 심판입니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은 한마디로 경건치 않았습니다. 창세기 6장은 그들이 육체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들에게 영적인 것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자연히 그들은 음란하였으며 강포와 부패가 충만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홍수로 심판하시겠다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당장에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120년 동안이나 참으시고 노아의 방주 짓는 생활을 통해서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끝내 하나님의 심판을 멸시하며 회개치 아니할 때 물로 모두 싹 쓸어 버리셨습니다(창7:22:23). 그러나 하나님은 무서운 심판 가운데서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만을 보존하셨습니다. 노아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육체를 따라 살 때 세상 풍조에 말려들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소극적으로 중심만 지킨 것이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의를 전파했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세상의 거대한 죄의 세력에 도전하여 싸웠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노아 한 사람을 당시 육을 좇아 사는 수백 만 수천만의 사람들보다 더 귀히 여기고 구원하셨습니다.
세 번째 예는 소돔, 고모라 성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소돔, 고모라 성은 음란하고 무법한 것이 특징입니다. 그 곳은 호모 섹스가 난무하였습니다(창19:5). 창18:20절은 "소돔,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심히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죄악이 목에까지 차서 심판이 불가피함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은 심판을 농담으로 여기는 그들을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을 비같이 쏟아 부어 순식간에 재가 되게 하셨습니다(창19:24,25).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습니다. 창세기에는 롯이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신자로 나타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가 그를 의롭다고 한 것은 문맥상으로 볼 때 주위 사람과 비교하여 의로운 자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소돔, 고모라 성을 불로 심판하신 것은 후세에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말로가 어떠함을 하나의 예로 보여 주고자 하심이었습니다. 이는 역사의 거울이 되어 육체대로 사는 자들은 반드시 심판 받는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역사적으로 이런 예는 무수히 많습니다. 하나님은 폼페이시가 우상숭배와 음란이 극에 달하였을 때 순식간에 베스비어스 화산으로 덮어 버리셨습니다. 로마는 하루에 건설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로마가 도덕적으로 타락했을 때 하루 아침에 멸망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고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딤전2:4).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죄를 위한 희생제물로 내어 주셨습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요3:16).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해서 무골호인과 같은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공의로운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은 죄를 용납하실 수 없기 때문에 심판은 불가피합니다. 히9:27절은 말합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 하나님의 심판은 무섭습니다. 요한계시록 21:8절에 보면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서 영원히 고통하는 것입니다.
4,5,6절은 원문에서 문장이 "만일 ∼라면"(if)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범죄한 천사라도 용서치 아니하시고, 또 노아 시대의 불경건한 자를 홍수로 멸하시고, 죄악된 소돔, 고모라 성을 불로 멸하셨는데 거짓 선생들을 그냥 두시겠는가?"라는 뜻입니다. 오늘날은 부도덕(immoral)시대를 넘어서 초도덕(amoral)의 시대입니다. 사람들은 죄에 대해 무감각해져서 죄를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스웨덴이나 덴마크에서는 호모섹스주의자들이 법적으로 부부가 될 수 있도록 법을 통과시켰습니다.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도덕 기준이 사라져갑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시대를 반드시 심판하실 것입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하나님께서 이 시대를 심판하지 않으신다면 소돔, 고모라 시대 사람들에게 정중히 사과를 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ⅲ) 거짓 선생들의 죄악상(10-22)
사도 베드로는 이제 거짓 선생들의 죄악상을 열거함으로써 그들의 정체를 여지없이 폭로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그들은 오만불손합니다(10-12). 그들은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권자를 멸시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특별히 형벌하실 것입니다. 그들은 오만하고 자기 주장을 고집하며 영광있는 자를 훼방했습니다. 더 큰 힘과 능력을 가진 천사라 할지라도 악의적인 동기를 가지고 악한 천사들을 훼방하는 송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유대교의 전통에 의하면 사단이 모세의 시체에 대한 처분권을 주장하였을 때 미가엘은 사단보다 더 큰 권능과 권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단을 송사하지 않고 단지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고만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거짓 선생들은 자신들이 알지도 못하는 일을 비난했습니다. 그들은 마치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과 같습니다. 그들은 결국 스스로 멸망하게 됩니다.
둘째로, 그들은 쾌락을 추구하는 자들입니다(13-14a). 보통 연락은 밤에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대낮에도 마시고 떠들고 방탕하는 것을 그들의 낙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들의 방종한 행동은 점과 흠입니다. 그들은 사랑의 만찬을 나눌 때 음심이 가득찬 눈으로 쉬지 않고 범죄했습니다. 자신이 범죄할 뿐만 아니라 믿음이 어린 영혼들을 유혹하여 죄를 짓게 하였습니다.
셋째로, 그들은 탐욕에 연단된 자들입니다(14b-16). 그들은 물질적인 욕심에 연단되어 아주 자연스럽게 물질을 추구했습니다. 그들은 저주의 자식이었습니다. 그들은 바른 길을 떠나 미혹하여 발람의 길을 좇는 자들입니다. 민수기 22장에 보면 발람은 이스라엘을 저주하라는 발락의 초청을 받고 처음에는 가지 않겠노라고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왔을 때 발람은 물질에 마음이 미혹되어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또 물었습니다. 그는 억지로 하나님의 대답을 받아 내어 나귀를 타고 그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진노하사 여호와의 사자가 그를 막으려고 칼을 빼어 들고 길에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물질에 미혹된 발람의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나귀가 막다른 골목에서 여호와의 사자의 칼을 피하려고 하다가 발람의 발을 담에 비비어 상하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발람이 화가 나서 나귀를 때렸습니다. 이에 나귀가 입을 열어 "왜 나를 때리느뇨?"하며 발람을 책망했습니다. 발람은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미혹되어 그릇된 길로 가다가 말 못하는 나귀에게 책망을 받은 것입니다.
17a절을 보십시오. "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니" 사도 베드로는 과거 용감하고 무식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유식해져서 문자를 쓰게 되었습니다. '물 없는 샘'은 무엇을 가리킵니까? 물은 진정한 만족과 기쁨과 생명력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물 없는 샘이란 우리에게 아무런 만족이나 기쁨이나 생명력을 줄 수 없는 내용이 전혀 없는 샘이라는 것입니다. 이단들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줄 것처럼 유혹하지만 물 없는 샘과 같이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갈증만 더해 줄 뿐입니다. 인생의 목마름은 영생의 샘이 되신 예수님께로 올 때만이 해소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십니다(요4:14).
또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란 무슨 뜻입니까? 안개는 그 실체가 분명치 않고 또 안정이 없이 이리저리 잘 떠다닙니다. 그런데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는 얼마나 요동이 심하겠습니까? 이는 혼돈과 방황과 불안정한 모습을 말해 줍니다. 거짓 선생들은 마치 물 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와 같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에게는 캄캄한 어두움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여 초신자들을 육체적 정욕으로 유혹하여 멸망에 빠뜨립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에게는 자유를 준다고 약속하지만 자신들이 죄를 범함으로 죄의 종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에 자유를 줄 수 없습니다. 그들은 멸망의 종입니다.
20-22절은 2장의 결론이 되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알고 난 후 세상의 썩어질 것에서 벗어나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가 유혹에 말려 들어 세상으로 돌아가게 되면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게 됩니다. 이는 마치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가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안정을 얻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와 보니 집이 비고 소제되자 이제는 전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와서 거하는 것과 같습니다(마12:43-45). 이런 자들은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고 돼지가 깨끗이 씻은 후에 다시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눕는 것과 같습니다. 돼지는 깨끗한 것을 부담스러워하고 더러운 것을 좋아합니다. 이 말씀에서 볼 때 그리스도를 알고 깨끗케 된 자는 주님의 거룩한 명령의 말씀을 붙들고 성결한 생활을 하기에 힘써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옛 생활로 돌아가 예수님을 알기 전보다 더 비참하게 되어 버립니다.
Ⅱ. 주의 날(3:1-18)
3:1절은 사도 베드로가 둘째 편지를 쓰는 목적이 무엇인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는 그들이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거룩한 선지자의 예언한 말씀과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이는 그렇게 할 때 미혹에 빠지지 않고 중심을 지킬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은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나타나 정욕을 좇아 행하며 주의 재림을 기롱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대로 있지 않느냐?"하며 기롱합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언제 말세라고 하지 않은 때가 있었느냐' 하며 주님의 심판과 말세를 부인합니다. 이렇게 기롱하는 자들은 자신들의 죄악된 생활을 합리화하고자 함입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시고 또 말씀으로 그 만드신 세상을 심판하신 것을 고의로 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하늘과 땅을 불로써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은 심판을 지체하시는 것 뿐이지 반드시 세상을 심판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심판을 지체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죄인들을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고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안타까운 마음으로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이 때문에 참고 또 참습니다. 하나님은 천년을 하루 같이 ,하루를 천년 같이 여기시고 참으십니다. 하나님은 시공간을 초월하신 영원한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시공간의 제약 속에 있는 유한한 인간이 영원하신 하나님을 헤아려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한정 참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은혜의 때가 지나면 반드시 무서운 심판의 날이 옵니다.
주의 날은 도적 같이 예고도 없이 갑자기 옵니다. 주의 날은 무서운 심판의 날입니다.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집니다. 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핵이 폭발하여 체질이 풀어질 것입니다. 그 날에는 은밀한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수서 지구 주택 사업에 대환 모든 의혹도 시원스럽게 풀리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겠습니까?
첫째로,거룩한 행실과 경건한 삶을 살아야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의식하지 않을 때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아무렇게나 살게 됩니다. 그러나 심판을 의식할 때 영적으로 긴장하게 되고 우리의 옷깃을 여미며 경건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우리는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 나타나기를 힘써야 합니다(4).
둘째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해야 됩니다. 우리의 진정한 소망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땅에 있는 모든 것은 결국 불에 타서 사라지고 말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소망을 둘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볼 것은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이 새 하늘과 새 땅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심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재림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의 재림을 사모하는 자가 힘써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주의 날이 언제 임할 지 모르므로 불안에 떨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재림 신앙을 가지고 깨어서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사명에 충성해야 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전심전력해야 합니다. 이러한 내용은 사도 바울도 그 모든 편지에서 여러 번 언급했습니다.
셋째로,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야 합니다(18).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성장해 나갈 때 신앙생활에 기쁨이 있습니다. 또 거짓 가르침에 미혹되지 않고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17).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