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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22-요한복음 12:20-50(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되신 예수님)

by Mark Yang   08/14/2019   John

Message


요한복음 제 22 강


한 알의 밀이 되신 예수님


말씀: 요한복음 12:20-50
요절: 요한복음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오늘 말씀은 유명한 밀알의 진리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 밀알의 진리는 불신자들 조차도 사랑하고 즐겨 인용하는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풍성한 열매를 맺고 영광스러운 인생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아무런 생명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욕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는 밀알의 교훈이 가르쳐 주는 바 생명의 법칙을 무시하고 정욕과 욕심을 기초로 자기 나름대로 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풍성한 열매를 맺는 비결을 배워 복되고 영광스러운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밀알의 진리(20-24)

20절을 보십시오.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 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 사람이 있었습니다. 유월절에는 천하 각국에 흩어진 경건한 유대인들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이 예루살렘을 찾아왔습니다. 헬라인들이 예배하러 온 것을 보면 유대교로 개종한 자들이었습니다. 헬라의 신은 다신이고 인간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인본적이고 미신적인 종교에 환멸을 느끼고 참된 하나님을 찾아 유대교로 개종했을 것입니다. 고전 1:22절에 보면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논하고 지혜를 찾는 지성인들이었습니다. 철학의 시조 탈레스, 철학의 거장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 수많은 철학자들이 헬라에서 나왔습니다. 그들은 세상이 미신과 무지 가운데 있을 때 인생과 우주의 근본 원리에 대해 깊이 사색했습니다. 헬라에서 민주주의가 발생했고 인본주의 문화가 꽃을 피웠습니다. 또한 그들은 종교성이 강했습니다. 대개 이성적인 사람은 종교적이기를 거부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성적이면서도 종교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영혼불멸을 믿었으며 사후의 세계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습니다.

헬라인 몇 사람들은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거룩하고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일 뿐 아니라 인생의 심오한 진리를 말씀하시며 수많은 표적을 행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들었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은 그들에게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죽은 자도 살리시는 이 예수님은 과연 어떤 분이신가를 알기 원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뵙기를 간절히 소원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호기심 이상의 것으로써 내면 깊이에서 나온 영적 소원이었습니다.

그들은 먼저 헬라식 이름을 가진 빌립에게 청했습니다. 아마 빌립이 스마트하게 잘 생겼기 때문에 제자들 가운데 리더라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러나 빌립은 오천 명을 먹이는데 계산만 하다가 훈련에 걸려 예수님께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보다도 그는 예수님이 이방인을 만나게 될 경우 이방인과 교제한다고 해서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게 되지 않을까 계산하는 마음 때문에 망설였습니다. 그에게는 헬라인들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갈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역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안드레는 확신있게 헬라인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고자 했습니다.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님께 가서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23절을 보십시오.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예수님께서는 이때까지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2:4, 7:6, 8:20)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내 때가 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때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때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왜 “내가 이제 십자가에 못박혀 죽을 때가 왔구나” 말씀하시지 않고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라고 말씀하셨을까요? 또 왜 헬라인들이 찾아왔을 때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 두 가지를 배웁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영광으로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무리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시며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보라,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 라고 말하며 예수님의 입성을 망연자실한 태도로 바라보았습니다(19). 대세는 예수님께로 기울었습니다. 외적으로 볼 때 지상 메시야 왕국을 이룰 절호의 기회인 것처럼 보입니다. 이렇게 되면 분위기에 말려들어 대권을 잡을 생각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로 이때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인류의 죄를 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다는 것은 고통스럽고 수치스럽고 저주스러운 일입니다. 이는 분명 패배요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영광을 얻을 때로 생각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인간의 죄가 속하여지고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로 가는 길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의 죽음은 죄 값으로 인한 것이지만 예수님의 죽으심은 인간의 죄를 대속하는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속죄의 십자가요 영광의 십자가입니다. 또 패배가 아니라 승리의 십자가입니다(골2:15). 또한 십자가는 무력하고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가장 지혜롭고 능력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 1:22-24절에서 이렇게 증거했습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예수님은 십자가의 비밀을 아셨기 때문에 이를 영광으로 생각하셨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수많은 열매를 맺게 될 비젼을 보셨습니다. 헬라인은 이방인의 대표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유대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방인을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으심을 통하여 이방인들 가운데 맺혀질 수많은 열매를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두고 비통해 하고 절망해야 하지만 오히려 자신의 죽으심을 통해 이방인들 가운데 이루어질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바라보시며 비젼에 불타셨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자신의 죽음이 왜 영광되는가를 밀알의 비유를 통해 알기 쉽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24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밀알의 교훈은 평범한 자연 법칙으로서 생명의 법칙이요 창조의 법칙입니다. 한 알의 밀은 많은 열매를 맺을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그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이란 참으로 신비스러운 것입니다. 생명이란 단순히 살아서 움직이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생명은 반드시 자신과 꼭 같은 생명을 복제시킬 수 있는 생산성이 있어야 합니다. 성장하고 열매를 맺는 것은 생명체의 특징입니다. 한 알의 밀은 참새의 한끼 식사도 안되는 아주 보잘 것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생명이 있기 때문에 수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농부는 한 알의 밀이 가지고 있는 생명력과 가능성을 알기 때문에 밀을 장농에 간직하지 않고 땅에 심습니다. 한 알의 밀이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먼저, 씨가 반드시 땅에 떨어져서 2-3Cm로 묻혀야 합니다. 그 후에는 뿌리를 내리게 됩니다. 뿌리를 통해 물을 흡수합니다. 그리고 씨에 있는 양분이 분해되어 싹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그 후에는 싹이 햇빛을 받아 탄소동화작용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싹이 자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뿌린 씨에서 어린 싹이 나와 스스로 탄소 동화 작용을 하여 자립적으로 성장하기까지는 씨로부터 영양분을 공급받는 것입니다. 싹이 나서 자립적으로 성장하게 되면 씨는 완전히 분해되어 빈 껍데기만 남게 됩니다. 이것을 일컬어 밀이 썩는다고 말합니다. 썩는 과정은 땅에 숨어 전혀 보이지 않지만 이 과정이 없이는 결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는다고 하는 것은 자기를 비어 온전히 희생하여 새 생명을 얻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를 볼 때 썩는 것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한 창조의 역사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한 알의 밀은 4개월 후에 100-125개의 알곡이 맺힙니다. 이렇게 해서 5년 후에는 100-125억 개라는 엄청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는 1만 7천 가마니로 200명이 하루 세 끼 밀밥만 먹어도 34년 간의 식량이 됩니다. 또 10년 후에는 1020개라는 천문학적인 숫자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렇게 한 알의 밀이 가지고 있는 위력은 대단합니다. 이렇게 많은 열매를 맺으려면 반드시 땅에 떨어져 보이지 않는 가운데 100% 완전히 자기가 분해되어 썩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99%만 썩어도 안되고 100% 썩어야 합니다. 자기를 보호하고 지키고자 하는 마음,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 자기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 등 자기가 완전히 깨어져야 합니다. 이 자기 분해는 자기 존재를 말살시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 더 풍성한 생명을 얻기 위한 과정인 것입니다. 이는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그 고통은 의미있고 가치있는 고통입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한가지 사명을 위해 온전히 자기를 희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한 곳에 얽매이기를 싫어하고 또 자기를 희생하기를 싫어합니다. 사람들은 희생없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없을까 연구합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런 길은 없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지만 죽지 않으면 5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도 한 알 그대로 있습니다. 오히려 그 한 알 마저 시간이 지나면 생명을 상실하게 됩니다. 이것은 누구도 변개시킬 수 없는 하나의 법칙입니다.

이 밀알의 진리는 바로 예수님 자신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밀알의 진리를 가르치실 뿐만 아니라 친히 이를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의 권세와 영광을 다 버리시고 이 땅에 떨어진 한 알의 밀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비천한 말구유에서 탄생하심으로 우리의 슬픈 운명을 담당하시고, 우리를 부요케 하시기 위해 머리 둘 곳이 없이 가난한 삶을 사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인생들로부터 존귀와 영광과 섬김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시지만 오히려 섬기는 종이 되어 냄새나는 각종 죄인들을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섬기시느라 마른 땅에서 나온 넝쿨 같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모든 시대에 걸쳐서 모든 사람에게 본이 되는 완전한 삶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더러운 문둥병자를 깨끗케 하시고 중풍병자를 일으키시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등 수많은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인생들에게 구원을 주고 삶의 의미와 목적과 희망을 주고 우리의 영혼을 소생케 하는 생명의 말씀, 지혜의 말씀, 구원의 말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지 훌륭한 모범을 보이시고 위대한 교훈을 가르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땅에 떨어져 죽기 위해 오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으심은 인류 구속 역사의 핵심이요 절정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알의 밀이 되어 십자가에서 온전히 자신을 희생하심으로 헤아릴 수 없는 수 많은 영혼들이 영원한 파멸에서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Ⅱ. 생명을 얻는 길(25,26)

밀알의 진리는 예수님의 생애에 적용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우리 인생은 한 알의 밀과 같습니다. 우리에게는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생명력과 무한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생애를 본받아 주와 복음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할 때 많은 생명의 열매를 맺는 복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열매 맺기를 원하면서도 자신을 희생하기는 싫어합니다. 요한 12:24절 말씀을 족자에 써서 붙여 놓고 즐기기는 하지만 막상 그런 인생을 살기는 원치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는 자기 생명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기 생명에 대한 강한 애착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에 거꾸로 매달려 살아도 살고자 합니다. 생명에 대한 강한 애착 때문에 자기를 희생하기를 싫어하고 자기를 잃지 않을까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이런 자는 결국 어떻게 됩니까? 25절을 보십시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우리의 생명은 자기를 위하여 쓰느냐? 아니면 주와 복음을 위하여 쓰느냐? 둘 중에 하나입니다. 생명을 자기를 위해 쓰는 자는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자기 만족과 행복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자기 명예와 자기 영광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이런 자는 자기가 강합니다. 특히 자존심이 강합니다. 이런 자는 자존심이 조금만 상하여도 견디지 못합니다. 사람이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 유익과 자기 만족과 행복을 위해서 살면 행복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자는 자기를 지키느라 두려움과 염려와 갈등이 끊일 날이 없고 인생을 결산해 보면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결국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최후 심판의 날에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어떻게 됩니까?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한다는 것은 자학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는 죄의 소욕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산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생명을 가장 가치 있는 곳 즉, 주와 복음을 위해서 투자하는 것입니다. 생명 구원 역사를 위해서 시간과 물질과 젊음과 꿈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는 세상에서 늘 손해보고 불이익을 당하고 자기를 잃는 것 같기 때문에 어리석은 자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자는 이 세상에서의 잠간 동안의 생명을 영원한 생명을 얻는데 투자하기 때문에 가장 지혜로운 자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이는 신실하신 우리 주님의 약속입니다. 이 영생에 대한 약속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있게 주와 복음을 위해서 우리의 생명을 희생할 수 있습니다.

26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배우고 본받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과 같이 한 알의 썩는 밀알의 인생을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를 때 하나님 아버지께서 귀히 여기시고 사랑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귀히 여기신다니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생명의 길이요 영광의 길입니다.

Ⅲ.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역사(27-50)

첫째, 예수님의 고뇌와 각오(27-29): 예수님은 육신의 몸을 입으셨기 때문에 십자가를 앞에 두고 고뇌하셨습니다.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은 극심한 육체적 고통과 만민의 비방의 표적이 되어 사람들로부터 받게 될 모욕과 비난으로 인해 고뇌하셨습니다. 그보다도 인간의 죄로 인해 일시적이나마 하나님의 버림을 받고 진노의 심판을 받아야 하셨기 때문에 더욱 고뇌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육신은 이 고통의 때를 면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곧 자기를 부인하시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극심한 고뇌 가운데서도 십자가를 지고자 단호하게 결단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기까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겨주신 사명에 충성하심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그의 죽으심을 통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이미 영광을 받으시고 다시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사 만민의 구주가 되게 하셨습니다.(빌2:9-11)

둘째,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역사(30-33): 예수님은 이제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이루어질 역사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로, 이 세상 임금, 곧, 사단이 쫓겨나게 되었습니다(31). 쫓겨난다는 것은 점진적으로 쫓겨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단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음으로 승리하는 것 같이 보였으나 예수님의 발꿈치만 상하게 하였을 뿐 여지없이 패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사단의 머리를 박살내심으로 사단을 패배시켰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로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내가 땅에서 들린다”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높이 달리신 사건 뿐만 아니라 부활과 승천을 모두 포함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우리를 죄와 사단의 권세로부터 해방시켜 주시고 영원한 생명의 세계로 인도하셨습니다.
셋째, 빛에로의 초청(34-50):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일어날 신비한 구원의 역사를 말씀하셨지만 무리들은 믿을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에서 그리스도는 영원히 계신다고 하였는데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하며 반발했습니다. 예수님은 불신에 가득차서 어두움에 있는 그들에게 빛을 믿도록 권면하셨습니다.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36).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는 근본적으로 어두움에 붙잡혀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 인생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합니다. 죄를 지으면서도 그 죄의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지 못합니다. 어두움의 세력에 지배당하는 자들은 스스로의 힘과 의지로는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빛이 필요합니다. 빛을 믿을 때 어둠의 세력이 물러가고 빛의 아들이 될 수 있습니다. 빛의 아들이 될 때 빛된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표적을 보여 주면 믿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아무리 많은 표적을 보여 주어도 믿지 않았습니다. 믿고 안믿는 것은 외적 증거의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마음의 문제입니다. 그들이 믿지 않는 것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대로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입니다(38-40). 관원 중에도 믿는 자가 많되 두려움 때문에 드러내 놓고 신앙고백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자들은 근본적으로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43). 예수님은 이 세상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믿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빛 가운데서 살게 됩니다. 예수님은 심판하러 오시지 않고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영생의 말씀입니다. 이 영생의 말씀을 영접하는 자는 영생을 얻게 됩니다.

한 알의 밀알이 되사 자신을 온전히 희생하심으로 수많은 생명의 열매를 맺으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