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서 제 5 강
하나님의 손가락
말씀: 다니엘서 5:1-31
요절: 다니엘서 5:25
“기록한 글자는 이것이니 곧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
다니엘서 5장은 바벨론 왕국이 멸망하게 된 원인이 무엇인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느부갓네살 왕에게 바벨론 왕국이 멸망하게 될 것을 꿈을 통해 계시하셨습니다. 바벨론 왕국은 그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지속될 것같이 보였으나 100년도 못 되어 망하고 말았습니다. 바벨론의 멸망은 군사나 경제력의 부족에 있지 않고 영적, 도덕적 부패에 있었습니다.
바벨론의 마지막 왕인 벨사살은 큰잔치를 베풀고 성전 기명으로 술을 마시며 손으로 만든 우상들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손가락으로 벽에 한 글을 쓰심으로 그에게 경고하시고 마침내는 죽임을 당케 하셨습니다. 이처럼 한 인간이나 모임이나 나라는 하나님의 손에 있고 하나님께서 그 모든 길을 작정하십니다. 아무도 하나님의 뜻을 거스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벨사살 왕을 통해 신성모독의 죄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배웁니다. 또한 역사의 교훈을 겸허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때 패망에 이를 수밖에 없음을 배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겸비한 마음을 주사 벨사살과 같은 전철을 밟지 않도록 도와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Ⅰ. 벨사살 왕의 잔치와 하나님의 글씨(1-16)
(ⅰ) 벨사살 왕의 잔치(1-4)
다니엘 1-4장은 느부갓네살 통치기에 일어난 사건을 기록한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바벨론 제국을 확장시키고 결속시켰습니다. 그러나 그는 B.C 562년에 죽었습니다. 그후 바벨론 역사는 B.C 539년 메대와 바사에 의해 멸망하기까지 파쟁과 음모와 살인의 연속이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죽은 이후 그의 아들인 “에윌므로닥”이 왕위를 이어받았습니다. 대개의 경우 강력한 지도자가 죽으면 정치적 혼란기가 뒤따르게 됩니다. “에윌므로닥”은 2년간 통치한 후 느부갓네살의 사위인 “네르갈사레셀”에 의해 살해 당했습니다. “네르갈사레셀”은 4년간 재위한 후 죽었습니다. 그 후 정신 박약아인 그의 아들 “라바시말둑”이 왕위를 계승했으나 그는 두 달만에 “나보니더스”에게 몰매를 맞아 죽었습니다. “나보니더스”는 느부갓네살 치하에서 누렸던 바벨론의 영광을 회복시키고자 애를 썼습니다. 그는 재위 17년간 중 10년은 바벨론에 살지 않고 정복 전쟁을 위해 원정을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그의 아들 벨사살을 섭정왕으로 임명하여 다스리게 했습니다. 7b절에서 나라의 셋째 치리자로 삼겠다고 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또 본문에서 느부갓네살을 그의 부친이라고 한 것은 느부갓네살이 바벨론 제국을 세운 왕으로서 바벨론의 영광과 권세를 대표하며 또한 벨사살의 선조이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볼 때 바벨론 제국은 강력하게 보였습니다. 벨사살 왕은 전쟁시를 대비하여 요새마다 많은 곡물을 저장해 두어 20년은 견딜 수 있었습니다. 바벨론 수도는 유프라테스강에 의해 둘러싸인 천연적인 요새였습니다. 도시 주위에는 높이 10.6m 폭 2.6m의 성벽이 세워져 있었고, 이 벽 안쪽으로 800m 떨어져 똑같은 높이의 성벽이 또 하나 있었습니다. 두 벽 사이에는 78km 의 기름진 땅이 있어서 적이 도시를 포위할 때 식량을 공급하기 위한 장소로 이용되었습니다. 외벽 바깥으로는 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9m 깊이의 수로가 벽 주위를 따라 파여져 있었습니다. 수로의 물은 유프라테스강에서 끌어 오기 때문에 항상 풍부했습니다. 또 바벨론 제국은 막강한 군사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방어체제로 인해 바벨론은 난공불락의 성같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바벨론 제국은 영적, 도덕적 부패로 인해 뿌리로부터 썩어 붕괴되고 있었습니다.
당시에 메대와 바사가 연합하여 신흥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나보니더스 왕이 주력부대를 이끌고 먼 나라로 원정간 사이에 바벨론을 점령하고자 했습니다. 메대와 바사의 연합군은 바사의 장군인 고레스의 지휘 아래 바벨론에 진격하여 바벨론 군대를 격파하고 성을 포위하였습니다. 벨사살 왕과 바벨론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이 되었습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는 목숨을 내놓고 싸울 임전태세를 갖추고 깨어 경계를 해도 부족하였습니다. 그런데 벨사살 왕은 정반대로 큰잔치를 배설하고 허세를 부렸습니다. 그는 적군이 철통같은 방어망을 뚫고 넘어 올 방법은 전혀 없다고 생각하고 방심하였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자신의 역량을 과시하기 위해 바벨론 역사상 가장 거창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는 바벨론 시에서 중요한 인물 일천 명을 초대하였습니다. 그는 잔치를 통해 장군들과 귀인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자 하였습니다. 잔치에 왕후들과 빈궁들이 참석한 것을 보면 잔치 분위기가 얼마나 음란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방심과 방탕은 멸망의 전조입니다. 벨사살 왕이 거나하게 취하여 술기운이 오르자 처음에는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곧 자제력을 잃고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성경을 보면 술취한 후에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한 예가 헤롯 왕입니다. 헤롯이 자기 생일을 당하여 연회를 배설하였을 때 헤로디아의 딸이 요사스럽게 삼바춤을 추었습니다. 헤롯은 그 춤에 매료되어 취중에 맹세까지 하며 무엇이든지 달라는 대로 주겠다고 헛소리를 했습니다. 그러자 그 딸은 세례 요한에게 원한이 사무쳐 있던 헤로디아의 사주를 받고 요한의 머리를 달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헤롯 왕은 의인의 무죄한 피를 흘리는 무서운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막6:21-28). 술은 사람을 기만하게 합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마시지만 나중에는 술이 사람을 마시게 되어 온갖 추태를 다 부리게 됩니다. 술은 사람을 유혹하여 여러 가지 무서운 죄에 빠뜨립니다.
잠언 23:29-35절은 술의 폐단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재앙이 뉘게 있느뇨 근심이 뉘게 있느뇨 분쟁이 뉘게 있느뇨 원망이 뉘게 있느뇨 까닭 없는 창상이 뉘게 있느뇨 붉은 눈이 뉘게 있느뇨 술에 잠긴 자에게 있고 혼합한 술을 구하러 다니는 자에게 있느니라.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 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이것이 마침내 뱀같이 물 것이요 독사같이 쏠 것이며 또 네 눈에는 괴이한 것이 보일 것이요 네 마음은 망령된 것을 발할 것이며 너는 바다 가운데 누운 자 같을 것이요 돛대 위에 누운 자 같을 것이며 네가 스스로 말하기를 사람이 나를 때려도 나는 아프지 아니하고 나를 상하게 하여도 내게 감각이 없도다. 내가 언제나 깰까 다시 술을 찾겠다 하리라." 술의 폐단 때문에 성경은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엡5:18)
술취한 벨사살 왕은 명하여 그 부친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전에서 취하여 온 금,은 기명을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느부갓네살 같은 위대한 왕도 감히 거룩한 성전 기명을 사용할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것들이 지극히 거룩하신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 속한 것이므로 가까이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벨사살은 그 거룩한 기명들을 가져오라고 명하여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로 더불어 그것으로 술을 마셨습니다. 십계명에 비추어 볼 때 그는 신성모독 죄를 범했습니다. 신성모독은 하나님의 존재를 공공연히 모욕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도저히 용서 받을 수 없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벨사살은 금, 은,동, 철, 목, 석으로 만든 신들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는 속두려움을 달래기 위해 우상들을 섬겼습니다. 그는 술취한 가운데 우상 숭배의 죄를 범했습니다. 우상 숭배는 또 다른 신성모독의 죄입니다. 이 죄는 하나님의 영광을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는 것이기 때문에 용서 받을 수 없습니다(롬1:22,23).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짓밟고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만홀히 여김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갈6:7)
(ⅱ) 하나님의 글씨(5-16)
벨사살 왕과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이 성전 기명으로 술을 마시고 술에 만취하여 하나님을 경멸하며 우상들을 찬양하고 있을 때 갑자기 두려운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손가락을 보내어 왕궁 촛대 맞은 편 분벽에 글자를 쓰는데 벨사살 왕이 그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씌여진 글자는 없어지지 않았고 누구나 그 글자를 선명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흰 벽에 나타난 것은 사람도, 팔도, 손도 없는 손가락 뿐이었습니다. 이 광경을 본 왕은 얼마나 놀랐는지 즐기던 낯빛이 잿빛으로 변하고 그 생각이 번민하여 넓적다리 마디가 녹는 듯하고 그 무릎이 서로 딱딱 소리를 내며 부딪혔습니다. 갑자기 새파랗게 질린 공포의 침묵이 연회장을 뒤덮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상황을 급변시키십니다. 오만한 벨사살의 패역행각은 일순간에 끝나고 말았습니다. 벨사살 왕이 쾌락을 즐기며 하나님을 조롱할 때 하나님은 참으셨습니다. 그러나 그가 도를 넘어 하나님의 인내가 다 하였을 때 하나님의 손이 벨사살과 바벨론의 운명을 벽에다 쓰셨습니다. 분벽은 왕의 묘석이요 그 곳에 씌여진 글자는 왕의 묘비명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소환이요 하나님의 체포였습니다.
벨사살 왕은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크게 소리하여 술객과 갈대아 술사와 점장이를 불러오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무론 누구든지 이 글자를 읽고 그 해석을 내게 보이면 자주 옷을 입히고 금사슬로 그 목에 드리우고 그로 나라의 셋째 치리자를 삼으리라”(7)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왕의 박사가 다 들어왔으나 해석은 커녕 그 글을 읽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벨사살 왕이 크게 번민하여 그 낯빛이 변하였고 귀인들도 다 사색이 되었습니다. 결국 그 잔치는 사단의 카니발이었던 것이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벽에 씌여진 네 글자로 인해 연회장이 공포와 혼란의 도가니가 되었을 때 태후가 등장했습니다. 태후는 에윌므로닥의 미망인으로 추측되는데 사람을 볼 줄 아는 현명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죄악된 잔치에 참석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왕과 귀인들을 경악시킨 소식이 전해지자 나타나서 왕에게 다니엘을 추천하였습니다. 그녀는 왕에게 다니엘이 있으니 전혀 번민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태후는 먼저 다니엘이 거룩한 신들의 영을 가진 영적인 사람임을 천거했습니다. 그리고 느부갓네살 왕 때 박수장을 하던 자로서 신들과 같이 초인적인 지혜가 있어 능히 그 글을 읽고 해석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를 볼 때 다니엘은 불신 사회에서도 없어서는 안 될 매우 중요한 인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다니엘은 나이가 팔십이 넘었고 또 아무런 공직도 없이 초야에 묻혀 살았기 때문에 기력이 쇠하여 영력을 상실하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그는 세상 풍조에 조금도 요동치 않고 변함없이 하나님 앞에서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며 살았습니다. 이 때문에 소년 시절이나 청년 시절이나 장년 시절이나 노년 시절에도 조금도 변함없이 영력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아니 영력을 유지하는 정도가 아니라 해가 갈수록 그의 신앙은 더욱 깊어지고 영력은 더욱 충만해져 갔습니다. 다니엘이 부름을 입어 왕의 앞에 나오자 왕은 다니엘에게 글을 읽고 해석해 주면 나라의 셋째 치리자를 삼겠다고 했습니다.
Ⅱ. 벨사살 왕에게 진실을 말하는 다니엘(17-31)
(ⅰ) 왕의 교만을 책망하는 다니엘(17-24)
다니엘은 글을 읽고 해석해 주기를 바라는 왕에게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17절을 보십시오. “다니엘이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왕의 예물은 왕이 스스로 취하시며 왕의 상급은 다른 사람에게 주옵소서. 그럴지라도 내가 왕을 위하여 이 글을 읽으며 그 해석을 아시게 하리이다.” 다니엘은 벨사살 왕으로부터 어떤 예물이나 상급도 받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럴지라도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개인의 유익이나 보상을 바라고 일하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세상의 영예나 상급에서 초연하였습니다. 그는 세상의 영광이 풀의 꽃같이 얼마나 허무한가를 잘 알았습니다(벧전1:24). 또 다니엘은 벨사살 왕과 바벨론의 운명이 그 죄로 말미암아 풍전등화와 같이 깜박이고 있음을 잘 알았습니다. 또한 다니엘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모독한 비열한 인간으로부터 어떤 호의를 받는다는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무엇보다 다니엘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나라에 소망을 두고 하나님의 상급만을 바랐기 때문에 세상의 영예나 상급에서 초연하여 순수하게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다니엘은 영적 가치관이 분명했습니다. 이 때문에 다니엘은 영적 눈이 흐려지지 아니하고 혼탁한 시대에 선지자의 사명을 능히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18-24절까지는 손가락이 나와서 벽에다 글자를 기록한 이유가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은 글자를 읽고 해석하기 전에 먼저 벨사살 왕에게 역사 교육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이를 기초로 그의 교만을 책망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벨사살 왕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큰 권세와 영광과 위엄을 가진 왕이었습니다. 그는 임의로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며 또한 임의로 높이기도 하고 낮추기도 할 수 있는 큰 권세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권세는 그 보다 더 높으신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겸손하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왕은 마음이 높아져서 자신이 한 것인 양 교만을 떨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었습니다.
그가 마음이 높아지며 뜻이 강팍하여 교만하게 행할 때 하나님은 그에게서 모든 영광을 빼앗으시고 짐승과 같이 낮추셨습니다. 그는 겸손 훈련을 통해서 영적 눈을 뜨고 비로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그의 지위를 다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이러한 역사가 말해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권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서 겸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교만한 자는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 베푸시는 분이심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벨사살 왕은 느부갓네살 왕에게 일어난 사건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역사가 말해 주는 교훈을 마음 깊이 새기고 마음을 낮추는 투쟁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역사의 교훈을 무시하고 더 큰 악을 행했습니다. 그는 하늘의 주재를 거역하고, 성전 기명으로 술을 마시고 또 헛된 신상들을 찬양하고, 그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그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했습니다. 그가 느부갓네살 왕에게 일어난 사건을 다 알고도 이렇게 한 것은 고의적이었습니다. 고의적인 것은 모르고 지은 죄보다 더 심각한 죄입니다. 그가 고의적으로 역사의 교훈을 무시한 것은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전혀 배우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없을 때 그는 무지한 사람이 되고 결국 이상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역사의 교훈을 겸손하게 배우고 마음에 새기는 자는 현명한 사람입니다. 역사의 교훈은 검증을 거쳤기 때문에 진실되고 정확합니다. 우리는 겸손하게 역사의 교훈을 배워야 합니다. 역사의 교훈을 무시하면 반드시 파멸에 이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 10:7-11절에서 역사의 교훈을 배워야 할 것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다니엘은 왕에게 왕의 호흡을 주장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요 또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심을 증거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호흡을 주장하시는 분이시요 우리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분이십니다. 나의 생명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이라도 나의 생명을 거두어 가시면 나의 인생은 끝나고 맙니다. 또한 나의 모든 길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대로 작정하십니다. 내 길은 내가 스스로 결정하고 내가 원하는 대로 나아가는 것 같지만 지내 놓고 보면 결국 하나님께서 그의 뜻대로 작정하시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생명과 우리의 장래를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야 합니다.
(ⅱ)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25-31)
다니엘은 이 때까지 왜 손가락이 나와서 글자를 기록하였는가 하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왕의 교만을 책망했습니다. 그 후 글을 읽고 그 뜻을 해석하기 시작했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기록한 글자는 이것이니 곧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 메네는 “세어 보았다”라는 뜻이고, 데겔은 “무게를 달아보았다”라는 뜻입니다. 바르신은 베레스라는 단어의 복수형인데 “두개로 나누었다”라는 뜻입니다. ‘우’는 ‘그리고’에 해당되는 접속사입니다. 벽에 쓴 글자를 직역하면 “세어 보았다. 세어 보았다. 달아 보았다. 그리고 나누었다”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겸비치 못한 벨사살 왕에게 주신 말씀은 이것이 전부였습니다.
그 글자의 뜻은 메네는 하나님께서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여러 해 동안 그의 날을 세어 보시다가 “이제 너의 시대는 끝났다” 하고 정지 신호를 내리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끝나셨다고 선언하시면 우리는 하던 모든 것을 중지해야 합니다. 벨사살 왕이 하나님의 축복을 감당치 못했을 때 하나님은 그의 날들을 끝나게 하셨습니다. 데겔은 왕이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뵈었다 함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왜 그의 시대를 끝내셨는가 하는 이유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영적 무게를 하나님의 저울에 달아보니 아무리 달아보아도 전혀 무게가 나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벨사살이 이때까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 것들, 그의 삶 전부, 그의 인생 전부를 하나님의 저울에 달아보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그는 바벨론의 왕으로서 마땅히 헤비급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우상 숭배와 도덕적으로 타락한 생활 때문에 초경량급인 모기(mosquito)급도 안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보실 때 아무 가치가 없는 쓸모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베레스는 무게를 잰 결과로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바 되었다”하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메대와 바사의 침공으로 그의 왕국은 망하고 벨사살도 죽임을 당케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가 맺은 죄의 열매를 따 먹는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롬6:23a)
이상에서 볼 때 하나님은 우리의 행동을 달아 보시는 분이심을 보게 됩니다(삼상2:3). 하나님은 저울을 가지고 우리의 영적 무게가 얼마나 나가는가 재어 보십니다. 아무리 그 사람이 인간적으로 훌륭하고 업적을 많이 남기고 큰 일을 많이 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저울에서 무게가 나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평가 기준이 무엇인가를 알고 하나님의 수준에 이르도록 투쟁해야 됨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 것인가? 사람들의 평가에 신경을 쓸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평가에서 A학점을 받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평가에서 F학점을 받는다면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의 저울보다 하나님의 저울에서 무게 나가는 사람이 되고자 투쟁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평가하시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첫째로, 믿음입니다. 사람들의 평가 기준은 그 사람의 신분이 어떠하며, 학력이 어떠하며, 또 얼마나 많은 부와 권세를 소유하고 있으며, 어떤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등 외모와 소유를 기준으로 평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평가 기준은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그런 것들은 무가치합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이 믿음이 있는가 없는가 믿음을 기준으로 평가하십니다. 로마서 3:23절에 보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더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수준 미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수준 미달로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애를 써도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한 사람도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고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흘려 돌아가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의 의가 아니라 예수님의 의를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 여기시고 인정해 주십니다. 아브라함은 행위로 하면 아무 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자였습니다. 그는 양을 많이 치거나 선한 일을 많이 하지도 않았습니다. 위대한 업적을 남긴 것도 아닙니다. 그가 한 일이라고는 오히려 허물과 실수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했습니다. 그는 불합리하게 보이는 말씀이라 할지라도 순종했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의 믿음을 크게 인정하시고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셨습니다.
둘째로, 인생 목적을 기초로 평가하십니다. 로마서 2:6-8절은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여기서 당을 짓는다는 것은 자기 유익을 구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그 인생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데 있는가? 자기 유익과 자기 영광을 구하는데 있는가? 하는 것을 기초로 평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선한 일을 많이 한다 할지라도 그 동기와 목적이 자기 유익을 구하고 자기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큰 악을 범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부족하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애쓰는 자를 기뻐하시고 귀하게 쓰십니다.
셋째로, 인생의 열매로 평가하십니다. 예수님은 마태 7:20절에서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열매는 진실을 말하기 때문에 과정은 속일 수 있지만 열매는 결코 속일 수 없습니다. 사람은 무슨 말을 하든지, 무슨 행동을 하든지, 어떤 삶을 살든지 반드시 열매를 맺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의의 열매를 맺지 않으면 죄의 열매를 맺게 되고, 성령의 열매를 맺지 않으면 육체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갈5:19-23)
교만은 육체의 열매 중의 하나요, 겸손은 성령의 열매 중의 하나입니다. 겸손한 자는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투쟁을 힘써 하기 때문에 자연히 무게가 많이 나가지만, 교만한 자는 스스로 자신을 높이기 때문에 무게가 나가지 않게 됩니다. 벨사살 왕은 스스로 자신을 높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저울에서 체중미달이 되어 그의 인생은 끝장 나고 말았습니다. 그날 밤에 벨사살은 죽임을 당하였고 바벨론 왕국도 역사의 무대에서 막을 내렸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사자로서 영적 분노를 가지고 왕에게 심판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을 두려워 하였고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을 모독하는 벨사살을 볼 때 영적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께서 보실 때 헤비급의 무게가 나가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를 기뻐하시고 그를 높이셨습니다(29).
본문에서 우리는 벨사살 왕과 같이 스스로 자신을 높임으로 하나님의 저울에서 미달되어 비참한 최후를 마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함을 배웁니다. 다니엘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투쟁을 함으로써 영적 무게가 나가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함을 배웁니다. 우리의 호흡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우리의 길도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함으로 하나님께서 쓰실 만한 중량급 영적인 종으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