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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Ⅱ부:요한복음 13:1-38(새 계명을 주신 예수님)

by Mark Yang   08/14/2019   John

Message


요한복음 Ⅱ 부 제 1 강


새 계명을 주신 예수님


말씀: 요한복음 13:1-38
요절: 요한복음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한복음 13-16장은 “다락방 강화”라고 불리웁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주신 유언과도 같은 말씀으로서 여기에는 제자들이 마음 깊이 간직해야 할 교훈과 경고와 무엇보다 보배로운 약속의 말씀이 있습니다. 13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이를 기초로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십니다. 이 시간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새 계명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가 생각해 봄으로써 은혜 받고자 합니다.

Ⅰ.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님(1-17)

첫째,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님(1-5). 1a절을 보십시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여기서 ‘때’는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을 통해 영화롭게 되실 때를 말합니다. 이것은 곧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때가 임박했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의 때가 바로 눈 앞에 다가왔음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로 인해 크게 고통하셨습니다. 이 고통의 때에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1b절을 보십시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예수님은 고통이 너무 커서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기 어려울 그 때에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자기 사람들’로 삼으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그의 피로 구속하사 자기의 소유로 삼으신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소유에는 애착을 갖고 귀히 여깁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 사랑을 표현할 때 “자기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피값으로 사시고 자신의 소유로 삼으셨기 때문에 아끼고 사랑하십니다.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것은 최후의 순간까지 변함없이 지극히 사랑하셨다는 뜻입니다. 현재 제자들은 사랑 받을 만한 자격도 없고 가치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신실하게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인간의 사랑은 상대적이지만 예수님의 사랑은 절대적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상황에 따라 변하지만 예수님의 사랑은 결코 변치 않습니다. 히브리서 13:8절은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예수님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찬송합니다.

예수님의 극진한 사랑과는 대조적으로 가룟 유다의 마음에는 사단이 강하게 역사하고 있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때는 저녁 식사 시간으로서 예수님께는 최후의 만찬이었습니다. 제자들에게 있어서 식사 시간은 언제나 즐거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유다의 악한 생각으로 인해 분위기가 무겁고 심각했습니다. 사단은 유다를 통해 예수님의 공동체를 파괴할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유다는 사단의 충동을 받아 그 마음에 예수님을 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3년 동안 예수님과 공동 생활을 하면서 그토록 많은 사랑을 받고 능력을 체험한 그가 왜 스승을 배반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이는 그가 세상 욕심에 사로잡혀 예수님보다 돈을 더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수단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마귀가 그 마음에 강하게 역사하여 그의 종으로 삼아 버렸습니다. 환경이 지저분한 곳에 병균이 발생하듯, 마음에 세상 욕심이 가득할 때 마귀가 역사하게 됩니다. 마귀는 언제나 우리의 마음의 생각을 통해 역사합니다. 우리는 마귀가 역사하지 못하도록 마음의 생각을 지키기에 힘써야 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이는 예수님의 자기 인식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위임 받은 절대 주권자가 되심을 인식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분으로서 그 본체가 하나님이심을 인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인생들로부터 존귀와 영광과 찬송과 섬김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얼마나 높고 고귀하고 크신 분이심을 아셨습니다. 이런 인식을 하게 되면 교만하게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인식을 하시고도 종이 되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만유의 주권자가 되시지만 종의 위치에까지 낮아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주인이 되시지만 사람들의 종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방법으로 그의 겸손과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셨습니다. 그리고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하나씩 하나씩 씻기기 시작하셨습니다. 그후 그 두르신 수건으로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닦아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너무 황송하여 어쩔줄을 몰라 발가락을 꼼지락 꼼지락 했을 것입니다. 당시 식사 전에는 반드시 발을 씻었는데 그것은 비천한 종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는 종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예수님의 발을 씻어 드리고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는 아무도 서로 섬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형제들이 두 세 사람만 모여도 발냄새 때문에 참기 힘든데 12명이 모였으니 얼마나 견디기 힘들었겠습니까? 발냄새가 방안에 진동을 했지만 그들은 믿음으로 꾹 참았습니다. 그들은 자존심 때문에 자신을 낮추고 섬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자신의 존재 의미가 상실되고 아무 것도 아닌 자처럼 생각되어 죽기보다 싫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의 마음을 잘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책망하시거나 훈련을 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 앞에 종처럼 낮아지셔서 거룩한 손으로 그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인류 역사상 어떤 성인 군자도 제자들의 발을 씻어 준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자신을 낮추시고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둘째,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성(6-9). 6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 시작하여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행동에 대해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그는 위대하신 구주께서 비천한 종이 되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준다는 것은 세상에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나의 하는 것을 이제는 알지 못하나 후에는 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하시는 대로 그의 발을 내맡겨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절대로! 절대로!” 하며 완강히 거부했습니다. 베드로가 왜 자기의 발을 예수님께 내놓기를 거부했을까요? 그의 발에 무좀이 있었기 때문이었을까요? 그의 말 속에는 강한 자기 의가 숨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자기 발은 자기가 씻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자신은 다른 제자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에게는 수제자로서 남모르는 고민이 있었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낮아지셔서 다른 사람의 발을 씻어 주시면 자신도 그렇게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의 때문에 예수님의 섬김의 사랑을 순수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반발한다고 물러나셨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더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8b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상관이 없다’는 말씀은 ‘아무 관계가 없다’, 또는 ‘분깃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무서운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예수님께 추하고 냄새 나는 발을 내놓고 씻기움을 받아야 할 절대적인 이유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과 제자의 관계는 스승과 제자와의 관계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구주와 죄인과의 관계입니다. 우리는 죄인이요, 예수님은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구주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올바른 관계성을 맺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의 더러운 발을 예수님께 내놓고 씻음 받는 것입니다. 우리의 발은 더럽고 추합니다. 교만과 정욕, 시기심과 이기심, 인간적인 야심과 욕심, 미움과 질투, 허물과 실수 등으로 인해 냄새가 납니다. 예수님은 이런 더러운 발을 씻기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의 더러운 발을 내놓기가 부끄럽습니다. 더러운 발을 내놓으면 정죄받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의 깨끗한 발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죄로 인해 냄새 나고 추하고 더러워진 발을 내놓고 씻음받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다만 주님의 크신 긍휼과 사랑을 의지하여 있는 모습 그대로 우리의 발을 주님께 내놓기만 하면 됩니다.

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로부터 씻김을 받지 않으면 아무 상관이 없다는 말씀에 베드로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는 “주여, 내 발 뿐만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그는 감정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동기는 어린 아이와 같이 순수하였습니다. 그에게는 가룟 유다와 같이 이중적인 요소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는 실수를 많이 했지만 변함없이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목욕한다’는 것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음으로 성령으로 거듭나 새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중생으로서 일생에 한번 있는 것입니다. ‘발을 씻는다’는 것은 일상생활 중에 더러워진 것을 주님 앞에 고백함으로써 죄 씻음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성화로서 일생동안 계속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육의 몸을 입고 있기 때문에 원치않게 죄를 범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죄를 지을 때마다 죄의식에 시달리며 죄로 인해 고통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 밑에 나아가 죄짐을 풀고 진실되게 고백하면 주님께서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 죄를 정결케 하시고 놀라운 사죄의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요한 1서 1:9)

셋째, 본을 보여 주신 예수님(12-17).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다 씻어 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12,13). 예수님은 제자들의 선생이요 주가 되시기 때문에 제자들이 마땅히 예수님을 섬겨야 했습니다. 그러나 정반대로 예수님께서 그들을 섬기셨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옳으니라’는 말씀은 빚졌다는 뜻으로 주님의 섬김을 받은 자들은 마땅히 서로 섬겨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위대한 교육 방법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스승이요 주로서 얼마든지 명령하고 지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낮아져서 섬김으로 그들에게 섬기는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본을 보여 주는 것은 행위로 전하는 가장 위대한 메시지입니다.

그러면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까? 이는 상대방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상대방을 품고 섬기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귀히 여기고 장점은 세워 주고 약점은 감당해 주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위대한 장점이 있는 반면 또 위대한 약점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분은 일은 잘 하는데 학자적인 자세가 부족하고, 어떤 분은 학자적인 자세는 있는데 일을 못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장점을 시기하고 약점은 무시하고 정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는 상대방의 장점은 세워주고 또 겸손히 배우고, 약점은 인내로 참고 섬겨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양들에게는 깊은 관심을 가지고 섬기지만 같은 수준에 있는 믿음의 동역자들끼리는 경쟁의 대상으로 생각하거나 무관심하기 쉽습니다. 또 서로 먼저 이해해주고 섬겨 주기를 요구하는 마음 때문에 발을 씻기기가 쉽지 않습니다. 특히 자존심 때문에 먼저 낮아져서 섬기기가 힘듭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양을 많이 섬겨도 가장 가까이에 있는 동역자를 섬기지 못한다면 성령의 그릇을 이룰 수 없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믿음의 동역자부터 깊은 관심을 가지고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섬겨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승리의 삶, 열매 맺는 복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16,1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행복의 비결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요 선생이시지만 자기를 비우시고 겸손히 낮아져서 섬기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낮아져서 섬기면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섬김을 받으면 행복할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섬김을 받고자 하게 되면 속이 시끄럽고 마음에 행복이 없습니다. 반면 예수님을 본받아 낮아져서 섬기는 생활을 하면 내면에 참기쁨이 있습니다. 진리란 아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실천해야 합니다.

Ⅱ.“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신 예수님(18-38).

첫째, 가룟 유다가 회개하도록 도우신 예수님(18-30). 18-30절에는 가룟 유다의 문제가 나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가룟 유다의 배반은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의 배반을 미리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예수님이 가룟 유다의 배반으로 돌아가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임을 깨닫도록 하기 위함입니다(19). 가룟 유다로 인해 제자들은 시험에 들어 예수님을 의심하고 불신하기 쉬웠습니다. 또 제자들 상호간에도 의심과 불신이 역사하여 공동체가 파괴되기 쉬웠습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통해 들어온 사단의 역사를 인식하시고 사단과 싸우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에게 나를 영접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20). 예수님은 가룟 유다로 인해 심령에 민망히 여기시고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직접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21). 제자들은 충격을 받고 서로를 의심했습니다(22). 베드로는 요한에게 머리짓을 하여 예수님께 누구인지 물어 보도록 했습니다(23-25). 예수님은 “내가 한 조각을 찍어 주는 자가 그니라”고 말씀하신 후 가룟 유다에게 주셨습니다(26). 그러나 제자들은 아무도 그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28,29). 그들은 그만큼 서로에 대해 무관심했습니다. 그들은 가룟 유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에게 직접 떡 조각을 주신 것은 어찌하든지 그의 마음을 돌이키고자 하시는 상한 목자의 심정 때문입니다. 이때 가룟 유다는 떡을 받지 않고 회개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회개치 않고 떡조각을 받음으로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처하고 말았습니다(27). 그가 떡 조각을 받자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갔습니다. 30절을 보십시오.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이는 배반자의 비참한 내면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말씀입니다. 그는 어두움을 사랑하다가 어두움의 자식이 되고 말았습니다.

둘째, 새계명을 주신 예수님(31-38). 31절을 보십시오. 저가 나간 후에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나갔을 때 슬퍼하거나 절망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영광을 얻으셨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의 문제를 실패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의 문제를 감정적으로 싸우시지 않고 신앙적으로 해결하심으로 승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장차 올 부활의 영광을 바라 보셨습니다(32,33).

가룟 유다의 문제는 서로 사랑하는데 큰 장애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장애물을 제거하신 후 남은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34절을 보십시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우리는 사랑하는 것을 감정 문제로 생각하여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가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는 감정 문제가 아니라 믿음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새 계명으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새롭게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할 때 미움의 감정, 역겨운 감정을 극복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역사를 창조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세상에서 예수님의 제자임이 드러나게 됩니다. 제자들은 서로 싸우고 시기하고 경쟁할 대상이 아니라, 서로 아끼고 사랑하고 동역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할 자들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서로 날카롭게 경쟁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의 크신 사랑을 덧입었을 때 서로 뜨겁게 사랑하고 동역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이들의 아름다운 동역을 통하여 사도행전의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행3:1, 4:13). 사도 베드로는 사랑의 비밀을 깨닫고 환난으로 인해 흩어진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리라.”(벧전4:8) 또한 저자 요한은 베드로 때문에 항상 second man이 되어야 하는 운명으로 뼈가 썩는 고통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나 후에는 사랑의 사도가 되어 다음과 같이 권면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니라.”(요한1서 4:7)

결론적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문제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인간의 문제는 단 한 가지 사랑 문제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할 때 승리의 삶, 열매 맺는 복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의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힘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