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제 3 강
요단을 건너라
말씀: 여호수아 3:1-17
요절: 여호수아 3:13
“온 땅의 주 여호와의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물을 밟고 멈추면 요단 물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쌓여 서리라.”
오늘 말씀은 여호수아가 수백만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너는 사건입니다. 요단강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건너지 않으면 안되는 장애물이었습니다. 가나안은 그리스도인들이 나아가야 할 삶의 목표라고 한다면, 요단강은 그리스도인들이 삶의 목표를 성취하는데 가로막고 있는 난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살펴보면 요단강을 건너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요단강 도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쳐 주시고자 하는 바가 중요함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고 하나님께 대한 바른 자세를 갖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대한 바른 자세를 가졌을 때 그들은 요단을 물 한방울 묻히지 않고 쉽게 건널 수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난관을 극복하는데 있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자세가 무엇인가를 배우고자 합니다.
첫째로,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합니다(1). 1절을 보십시오.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이스라엘 사람들로 더불어 싯딤에서 떠나 요단에 이르러서는 건너지 아니하고 거기서 유숙하니라.”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이기 때문에 느긋하게 생각하고 안일해 지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땅을 내것으로 삼기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났습니다. 그가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는 것은 영적으로 깨어 있어서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하고자 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는 새벽에 일어나 하나님 앞에 나아가 음성을 듣고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여호수아는 어쩌다가 한번 아침 일찍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6:12, 7:16, 8:10절 곳곳에 여호수아가 아침 일찍 일어났다는 기사가 나옵니다.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니라.”(6:12a) “이에 여호수아가 아침 일찌기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그 지파대로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7:16)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서 백성을 점고하고”(8:10) 이를 볼 때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최선을 다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쓰신 위대한 주님의 종들은 한결같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 아침 시간을 잘 활용하였습니다. 시편 기자는 46:5절에서 “하나님이 그 성중에 거하시매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시119:147,148절에서는 “내가 새벽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주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내 눈이 야경이 깊기 전에 깨었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오셔서 복음역사를 감당하실 때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새벽 오히려 미명에 일어나 기도하심으로 하루를 시작하셨습니다(막1:35). 칼 라일은 “장차 위대한 일을 하고 싶으면 아침에 일찍 일어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속담에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 (The early bird can catch worms)고 하였고, “아침은 그 입안에 황금알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만큼 이른 아침시간은 인생을 값지고 성공적으로 이끄는 중요한 시간입니다. 아침 늦게 일어나서 허둥대면 하루를 망치게 되지만, 새벽 일찍 일어나서 주의 음성을 듣고 기도로 하루를 출발하게 되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승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인생의 전쟁터에서 새벽부터 일어나 기도하고 최선을 다하는 자들을 주목하시고 축복하십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성공과 실패는 아침 시간을 잘 활용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가 선교 역사상 유래가 드물 정도로 영적으로 크게 부흥할 수 있었던 비결도 말씀을 사랑하는 것은 물론 새벽기도를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한국 백성들은 옛날부터 새벽 일찍 일어나서 정화수를 떠놓고 자신의 간절한 소원을 정성을 다하여 산신령에게 비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게 해 주시옵소서!” “남편 사업 잘 되게 해 주시옵소서!” 등등 각종 소원을 손이 닳도록 빌었습니다. 이런 습관이 하나님을 믿고 나서 새벽기도로 바뀐 것입니다. 어쨋든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새벽을 깨우는 새벽기도의 용사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갈수록 혼탁해지고 죄악의 탁류는 거세어 지고 있습니다. 죄악의 밤은 깊어 가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을 이기고 승리의 인생을 살 수 있는 비결은 이른 새벽을 깨워 주님과 영적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이른 아침에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나눌 때 승리의 인생을 살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 가운데 여호수아 장군과 같은 새벽기도의 용사들을 많이 세워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2-4). 여호수아가 일찍 일어나서 백성들로 더불어 싯딤에서 떠나 요단강 앞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곳에서 사흘을 유숙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였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그들을 어떻게 도와 주셨습니까? 2-4절을 보십시오. “삼일 후에 유사들이 진중으로 두루다니며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 곳을 떠나 그 뒤를 좇으라.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상거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하면 너희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 이 말씀은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갈 때 그 뒤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따라가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그들이 행할 길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기 때문에 언약궤가 앞장 서서 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도하시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언약궤를 따르는데 왜 2천 규빗, 약 900m의 거리를 두도록 하셨을까요? 이는 백성들이 하나님을 따르는데 경거망동한 자세를 가져서는 안되고 옷깃을 여미며 두렵고 떨림으로 따라야 함을 말해 줍니다. 한마디로 경외심을 가지고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죄많은 인간이 함부로 가까이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함부로 가까이 나아가다가는 죽습니다.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을 건설한 후 하나님을 그 나라의 중심에 모시기 위해 하나님의 궤를 모셔 오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어떻게 모셔와야 될지 잘 몰랐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심은 충만하였지만, 하나님을 어떻게 섬길 것인가 하는 하나님의 법도를 잘 몰랐습니다. 이는 구체적으로 성경공부를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민수기 4:15절에 보면 “언약궤는 고핫 자손이 메어야 하며 성물은 절대로 만져서는 안되었습니다. 성물을 만지게 되면 죽게 됩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러한 하나님의 법도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궤를 수레에 싣고 갔습니다. 또 궤를 수레에 싣고 가다가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진노하사 웃사는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이를 웃사의 충돌이라고 합니다. 이로 인해 다윗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삼하 6:6-9).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으로서 인생들로부터 만홀히 여김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불 같은 분이시기 때문에 너무 가까이 가면 뜨겁고, 멀리 떨어지면 춥게 됩니다. 그러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 불은 우리에게 따스함을 주고 활기를 줍니다.
그들이 경외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게 될 때 그들이 행할 길을 알게 된다고 하십니다. “그리하면 너희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전에 한번도 가보지 못한 길을 가야 하기 때문에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한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들의 마음을 잘 아시고 그들의 선한 목자가 되셔서 섬세하게 인도하고자 하십니다. 어린 아이가 아직 한번도 다녀보지 못한 길을 가고자 하면 불안하고 두렵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의 손을 꼭 붙잡고 가면 마음 든든하게 느껴져서 안심하고 나아가게 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그들의 부모가 되셔서 그들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시고 동행하고자 하십니다.
우리의 인생여정에서 가장 불안하고 두려운 것은 우리가 장래 나아가야 할 길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4). 또 잠언 27:1절은 말합니다.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우리는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기 때문에 미래를 생각할 때 불안하고 두려워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할 때 마음 든든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으로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셔서 우리를 가장 좋고 안전한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려운 때일수록 인생의 참된 인도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장래를 하나님께 다 맡기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한걸음 한걸음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내 갈길 멀고 밤은 깊은데 빛되신 주 저 본향 집을 향해 가는 길 비추소서. 내 가는 길 다 알지 못하나 한걸음씩 늘 인도하소서.”(찬429)
미국 뉴저지의 어느 산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산에 오르고 있었는데 갑자기 산 아래에서 산불이 났습니다. 산위에 있는 사람들은 산불에 포위되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목숨을 건지기 위해 산불을 피하여 필사적으로 산 아래로 내려 가다가 불에 타서 죽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어떤 사람이 소리쳤습니다. “허둥대지 마십시오. 우리 모두 산꼭대기로 올라갑시다.” 사람들은 그의 침착한 인도를 받아서 산 정상에 올라 갔습니다. 그때 그들은 온 수풀이 불타고 있는 가운데서도 산중턱에서부터 개울을 따라 흐르고 있는 물가에 그들이 걸어갈 수 있는 작은 길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길을 따라 옴으로써 산불을 피하여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인생의 난관에 부딪힐 때 허둥대기 쉽습니다. 그리고 현실 문제에 집착하여 산 밑으로만 내려가려고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결코 허둥되어서는 안됩니다. 피할 길은 반드시 있습니다. 한 길이 막히면 하나님께서 다른 길을 내심을 믿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0:13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인생의 어려움에 봉착할 때마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높은 곳으로 오르십시오. 그리하면 내가 마련한 길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길은 가장 안전한 길이요, 생명의 길입니다.
셋째로, 스스로 성결케 해야 합니다(5). 5절을 보십시오.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 기사를 행하시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가장 시급한 문제는 요단을 건너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물이 언덕에 흘러넘치는 요단강을 바라보며 이 강을 어떻게 건널 수 있을 것인가 조바심 하며 그 일에 대해 온통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스스로 성결케 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힘든 가정 문제, 학교문제, 직장문제 등 당면한 현실문제에 대해 조속한 대답을 듣기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나 전략보다 우리 자신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성결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나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가?”, “내가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고 있는가?”,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합당한 삶을 살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수 있는 그릇으로 준비되어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함으로써 자신을 살펴 봐야 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은 하나님 앞에서 내 자신을 살피고 스스로 성결케 하는 것입니다. 성결케 한다는 것은 세상의 더러운 죄를 벗어버리고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전쟁을 앞두고 백성들로 하여금 병기를 손질하게 한다거나 정신 무장을 시키지 않고 먼저 마음을 성결케 하도록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통해 능력을 나타내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서 쓰실만한 그릇이 준비되어 있지 아니하면 쓰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해 주시도록 기도하기보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실 수 있도록 마음의 그릇을 준비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미국에서 노예문제로 전쟁이 한창이었을 때 링컨의 한 참모가 어느날 링컨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각하! 이 전쟁에서 하나님이 정말 우리 편에 계실까요?” 이때 링컨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에 계신가 그것을 고민하지 말게. 우리가 하나님 편에 있는가 그것이 문제일세.” 하나님이 내 편에 계신가가 문제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 편에 서 있는가? 내가 하나님의 쓰실만한 그릇이 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못생긴 그릇도 쓰실 수 있고, 작은 그릇도 쓰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절대로 쓰실 수 없는 그릇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로 인해 더러워진 그릇입니다. 그러나 죄로 인해 그릇이 더러워졌다고 해서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죄로 인해 더러워진 그릇이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피로 씻음받게 되면 귀히 쓰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피는 어떤 몹쓸 죄라도 깨끗케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피로 죄 씻음받고 자신을 성결케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쓰실만한 그릇을 만들기에 힘써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영적인 아들 디모데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
넷째로, 하나님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6-17). 여호수아는 제사장들로 하여금 언약궤를 메고 백성들 앞서 요단을 건너도록 방향을 준 후에(6-8)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했습니다. “이리 와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사시는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 계시사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히위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너희 앞에서 정녕히 쫓아내실 줄을 이 일로 너희가 알리라”(9,10). 여호수아는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계시사 친히 능력으로 역사하실 것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셔서 우리 가운데 계신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역사하심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사소한 일에 얽매여 신음할 때가 많습니다. 또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목자에게 얽매이고 자립신앙을 갖지 못하고 수동적이 될 때가 많습니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께서 살아계셔서 소원을 두고 능력으로 역사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때 우리는 사소한 일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될 때 나를 괴롭히는 무익한 인간갈등에서 벗어나 마음에 참 평화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나에게 두신 크신 소원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소한 일로 서로 갈등하고 있는 빌립보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빌 2:13,14). 하나님은 온 땅의 주가 되십니다(11a,13a). 세계가 다 하나님께 속하였습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신뢰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능력의 역사를 행하시고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11,12절에서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요단물을 멈추어 서게 하실 것을 믿고 백성들을 구체적으로 준비시킵니다. 요단강은 수심이 3-4m가 되고 넓이는 30m가 되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곳에 도착하였을 때는 모맥 거두는 시기로서 다른 때보다 물의 양이 가장 많은 때였습니다. 그들이 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배를 만들든지 다리를 놓든지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방법으로는 장정만 해도 육십만이 넘었고 어린아이와 여인들과 노인들과 수 많은 가축들까지 건너기에 불가능하였습니다. 그들이 요단강을 건너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단강을 건너지 않고서는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고자 할 때 반드시 건너야 할 요단강이 있습니다. 세계선교를 하고자 할 때는 어학이 반드시 건너야 할 요단강이 됩니다. 요사이 우리 나라는 IMF로 인하여 경제가 전부인양 생각하는 물질주의가 도도히 흐르는 요단강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 이런 외적인 요단강보다 내 안에 있는 요단강이 더 문제입니다. 죄의 소욕을 좇아 쾌락을 추구하는 마음, 사명인의 삶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십자가를 지고 싶지 않고 안일하게 살고 싶은 죄악된 본성의 요단강이 문제입니다. 또한 우리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가려면 반드시 죽음의 요단강을 건너야 합니다. 이러한 요단강은 믿음이 없으면 빠져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요단강은 오직 믿음으로만이 건널 수 있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온 땅의 주 여호와의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물을 밟고 멈추면 요단 물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쌓여 서리라.” 이 말씀은 “너희들이 요단강 앞에 서면 강이 갈라질 것이니 그 다음에 건너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물이 창일하여 언덕에 넘치고 있는데 믿음으로 물 속에 들어가서 그 물을 밟으라. 그리하면 물이 끊어져서 길이 생길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주시면 믿겠다는 것이 아니라,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믿겠나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네가 믿으면 보여 주겠다”고 하십니다. 아무 해결의 전망이 보이지 않고 어두운 구름이 덮여 있지만 주님을 믿고 신뢰하고 믿음으로 도전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길을 여시고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가 살아날 것을 믿지 못하고 무덤의 돌을 옮겨 놓기를 주저하고 있는 마르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요 11:40).
백성들은 약속의 말씀을 믿고 요단을 건너기 위해 자기들의 장막을 떠났습니다. 이때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백성들 앞에서 행하였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한걸음, 한걸음 요단물가로 나아갔습니다. 넘실거리는 요단물이 그들을 삼킬 것 같았지만 그들은 다만 믿음으로 전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발이 물가에 잠기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위에서부터 흘러 내리던 물이 순식간에 멈추어 서더니 역류하여 상류지방으로 올라가 심히 멀리 사르단에 가까운 아담 읍 변방에 일어나 쌓였습니다. 그리고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졌습니다(16). 아담읍에서 염해까지의 거리는 무려 33km가 됩니다. 33km가 되는 길이의 요단강이 끊어져 마른 땅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전무후무한 기적의 역사였습니다.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200만이 넘는 온 이스라엘 백성은 찬송을 부르며 마른 땅으로 행하여 요단을 건넜습니다.
요단강이 끊어지는 기적의 역사는 어떻게 이루어 졌습니까?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였을 때 일어났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믿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도 믿음을 심고 그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도록 도왔습니다. 백성들은 지도자의 명령이 하나님의 뜻임을 믿고 절대적으로 순종하여 하나님의 언약궤 뒤를 따랐습니다. 이때 그들은 하나님의 큰 능력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무리 큰 권능이 있어도 이에 순종하지 않으면 권능을 덧입을 수 없습니다. 나를 통해 하나님의 권능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원하면서도 말씀 그대로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것을 어리석게 생각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결코 요단을 건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자만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고 요단을 건널 수 있습니다.
둘째로,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믿음과 백성들을 위한 목자의 심정 때문이었습니다. 여호수아의 명령이 떨어지자 제사장들은 일제히 언약궤를 메고 백성들 앞서 나아갔습니다. 여호수아가 제사장들에게 '앞으로 나아가 요단강에 들어가라'고 명령하였을 때 그들은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물에 빠져 죽으면 죽으리라는 믿음과 백성들을 인도하고자 하는 목자의 심정으로 사명에 충성하여 믿음으로 한걸음, 한걸음 요단강에 들어갔습니다. 이때 놀라운 기적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나아가고자 할 때 요단강과 같은 장애물이 우리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절망하고 낙심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으로 장애물에 도전할 때 장애물은 더 이상 우리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 수 없고 오히려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우리가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난관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여호수아와 같이 새벽에 일찍 일어나 하나님께 나아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기도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기에 힘써야 합니다. 무엇보다 스스로 정결케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수 있는 내면의 그릇을 준비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더 나아가 살아계셔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믿음으로 도전하고 모험을 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능히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난관을 극복하고 승리의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