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제 6 강
영적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는 비결
■ 말씀: 여호수아 6:1-21
■ 요절: 여호수아 6:5
“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길게 울려 불어서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약한 자는 강한 자에게 먹힘을 당하는 정글의 법칙이 적용되는 전투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칼 마르크스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은 쉽게 잊어도, 잃어버린 유산(遺産)에 대한 미련은 오래 간직한다.” 이는 정신적인 것보다 물질적인 것에 집착하는 인간의 속성을 잘 표현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나라는 먹고 사는 생존 문제가 절박한 상황 때문에 물질적인 것만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가치관의 팽배로 인해 도덕성과 영성이 총체적으로 위기 상황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물의 영장이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물질적인 것보다 정신적이고 영적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육신의 양식만을 추구하는 무리들에게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요6:27)고 권면하셨습니다. 또한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요6:63)고 말씀하셨습니다. 생존을 위한 육적 전투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적 생명을 위한 영적 전투입니다. 육적 전투에서 패배하면 노예가 되거나 죽게 되는 것과 같이, 영적 전투에서 패배하게 되면 사단의 노예가 되거나 영적으로 파멸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는 생존을 위한 육전 전투에서 승리해야 할 뿐만 아니라 영혼을 위한 영적 전투에서는 더욱 승리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영적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서 어려운 시대에 승리의 인생을 살 수 있는 비결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승리에 대한 확신 (1-2)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을 건너 길갈에서 할례를 행하고 유월절을 지킨 후 여리고 앞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여리고는 주위 환경이 아름답고 향과 종려나무가 많아 향기의 도시, 또는 종려나무 성이라고 불리웠습니다. 또 이곳은 땅이 비옥하여 많은 농작물이 소출되었기 때문에 자급자족하기에 충분한 곳이었습니다. 여리고성은 비록 중소 도시였지만 요단 대평원 서부의 중요한 방어거점으로서 군사요충지요, 가나안 중부로 통하는 교통의 요로(要路)였습니다. 이 때문에 가나안 정복의 전략적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여리고성을 정복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리고성은 난공불락의 천연요새였습니다. 성벽은 두께가 약 2m, 높이가 7-9m정도의 외벽과 외벽에서 안쪽으로는 5m 떨어진 곳에 두께가 약 4m, 높이가 9m정도의 내벽으로 이루어진 이중 성벽이었습니다. 그것도 성벽이 밖으로 35도 기울어져서 벽을 타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이 여리고성은 현재 이스라엘 백성의 형편으로는 도저히 정복하기에 불가능한 곳이었습니다.
여리고는 반드시 정복해야 되지만 인간의 힘으로는 정복하기에 불가능한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여리고는 항상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여리고는 내 안에 있을 수도 있고, 내 밖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여리고는 자신의 인격 속에 있는 하나의 세력일 수도 있고, 또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외적인 한계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내 안에 있는 여리고는 내 힘으로는 고칠 수 없는 좋지 못한 습관이나 뿌리 깊이 박혀 있는 부정적인 사고방법일 수도 있고, 또 좀처럼 변화되지 않는 괴팍한 성격일 수도 있습니다. 또 내 밖에 있는 여리고는 영어나 독일어나 중국어나 러시아어나 스페인어와 같은 어학일 수도 있고, 또 제자양성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영어가 정복하기 쉬운 아이성 같이 느껴지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영어가 난공불락의 여리고성과 같이 느껴집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제자양성이 너무 너무 재미있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제자양성이라는 말만 나와도 밥맛을 잃고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킬만큼 두려움에 떱니다. 이렇게 사람마다 다르게 여리고성이 있습니다. 현재 우리 나라는 IMF가 여리고성이요, 또 우리에게는 세계 캠퍼스가 여리고성입니다. 이러한 여리고성은 반드시 정복해야 하고 또 정복할 수 있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들로 인하여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요단강을 건넌 사건으로 인해 그들의 마음이 녹고 정신을 잃었기 때문입니다(5:1). 그들이 성문을 굳게 닫은 것은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이 복음의 소식을 들을 때 마음 문을 굳게 닫는 것은 두려움 때문입니다. 어려운 시대에 하나님을 믿고 믿음으로 살면 나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 때문에 마음 문을 굳게 닫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사고가 경직되고 손발이 마비되어 아무 것도 못하게 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두려움으로 인해 마음 문을 굳게 닫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 문을 열 수 있을까요? 이는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일찍이 스가랴 선지자는 말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4:6). 굳게 닫친 사람의 마음 문을 열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의 능력으로만이 가능합니다.
손자병법을 보면 군사가 적의 10배가 되어야 포위를 할 것이요, 최소한 5배가 되어야 정면공격을 할 것이며, 군사가 적의 2배가 되면 병력을 2분하여 전후좌우에서 서로 견제하면서 공격하고, 병력이 서로 비등하면 죽을 힘을 다하여 싸울 것이요, 병력이 적만 못하면 물러날 것이며, 대적할 수 없으면 종적을 감추고 피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굳게 닫힌 여리고성을 공격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취할 수 있습니다. 일찍이 고대 그리스 연합군대가 트로이에 원정하여 사용한 트로이 목마작전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굳게 닫힌 성문을 열기 위해 거대한 목마안에 정예부대를 숨겨 두고 성문 앞에서 싸우다가 목마를 남겨 둔채 짐짓 패하여 도망갔습니다. 그러자 트로이 군대가 승리감에 도취되어 성문을 열고 목마를 전리품으로 취하여 성안으로 들였습니다. 이때 목마에 숨어 있던 특공대원들이 쏜살같이 나와 성문을 열므로 10년동안 끌던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습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성과 같은 높이의 토성을 쌓아 공격할 수도 있습니다. A.D. 70년 예루살렘이 정복당한 후에도 이스라엘의 열심당원들은 천연요새인 마사다에 거점을 두고 로마군에 맹렬하게 저항했습니다. 이때 로마군은 이스라엘 열심당원들의 성분을 파악하여 그들의 가족이나 친지들 중에서 사람들을 차출하여 마사다와 같은 높이의 성을 쌓아 공격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쳐들어 갔을 때는 이미 960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뒤였습니다. 그 외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김일성의 주 특기인 땅굴작전, 화공작전, 수공작전, 공성퇴작전 등 여러 가지 작전을 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작전들은 현재 이스라엘 형편으로서는 사용 불가능한 것들이었습니다. 장기전을 하게 되면 비축한 식량이 없는 이스라엘에게는 절대적으로 불리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내적, 외적 여리고를 정복하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해 보다가 잘 되지 않을 때 깊은 절망과 좌절감, 패배감에 사로잡혀 자포자기 하고 운명의 노예가 되기 쉽습니다. 우리는 캠퍼스 복음화가 세계복음화의 지름길임을 알고 캠퍼스 지성인들을 영적 지도자로 양성하는데 온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사실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지만 죄와 사단의 세력에 사로잡혀 사망으로 끌려가는 캠퍼스 지성인들을 구원하여 영향력있는 영적 지도자들로 키우는 일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값지고 영광스러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캠퍼스는 그야말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입니다. 그러나 이를 가로막고 있는 여리고성이 문제입니다. 한 때는 사회주의의 이념이 여리고성이었지만 요사이는 물질주의, 쾌락주의, 인본주의, 이기주의 등의 여리고성이 우리 앞을 가로 막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내적, 외적 여리고성을 정복할 수 있습니까?
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붙였으니” 하나님은 먼저 여호수아에게 승리에 대한 확신을 주셨습니다.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승리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작은 장애물 앞에서도 기가 꺽이고 스피릿을 상실하게 됩니다. 승리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조금만 힘들어도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자학하고 운명적이고 슬픈 생각에 빠져 신음하게 됩니다. 그러나 승리에 대한 확신이 있으면 어떤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도 낙심하거나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히지 아니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믿음으로 도전할 수 있습니다. 승리에 대한 확신은 역경을 이길 수 있는 원동력이 됩니다.
사사기 6장에 보면 기드온이 하나님께로부터 큰 용사로 부르심을 받고 자기 백성을 미디안의 압제로부터 구원하는 사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큰 용사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승리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이때 그는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신다는 증표(證票)를 구했습니다. 그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을 때 단지 300명의 용사로 메뚜끼떼와 같은 무수한 미디안 군대를 격파할 수 있었습니다. 313년에 콘스탄틴 황제가 반포한 밀라노 칙령은 기독교에 대한 오랜 박해를 끝내고 완전한 자유를 허락하는 역사적인 칙령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칙령을 반포한 배경을 살펴보면 재미있습니다. 콘스탄틴 황제가 티베르 강을 가로 지르는 물비안(Mulvian) 다리를 사이에 두고 적과 대치하게 되었습니다. 그날 밤, 그는 꿈속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에서 따온 첫 글자를 보았고, 이 상징을 사용하면 이기리라는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를 하나님이 보여 주신 계시로 영접하고 자신과 병사들의 방패에 그리스도의 이름에서 따온 첫 글자(P)를 그려 넣었습니다. 그가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싸웠을 때 큰 승리를 거두고 이를 기초로 밀라노 칙령을 반포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전쟁은 단순히 영토를 얻기 위한 전쟁이 아니라 가나안의 우상숭배의 죄를 심판하시는 영적 전쟁이었습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에 전쟁의 승패는 이스라엘의 군사력과 작전에 달려 있지 않고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시면 이길 수 있고,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시지 않으면 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무력함을 깊이 깨닫고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해야 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심으로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질 때 우리는 매사에 무엇을 하든지 승리할 수 있습니다.
II. 하나님의 작전 명령 (3-21)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승리에 대한 확신을 주신 후에 구체적으로 작전명령을 주셨습니다. 모든 군사가 여리고성을 매일 한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고,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행할 것이요, 제 칠일에는 성을 일곱번 돌며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제사장들이 양각나팔을 길게 울려 불어서 그 나팔 소리가 들릴 때 백성이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르게 되면 성벽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군사학적으로는 참으로 어린애 장난과 같은 어처구니 없는 작전명령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작전명령을 자세히 살펴보면 여기에는 이스라엘이 영적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초첨을 하나님께 맞추는 것입니다. 여리고작전의 특징은 모든 것이 언약궤를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무장한 군사들이 맨 앞에서 행하고, 다음에는 제사장 일곱이 일곱 양각나팔을 불면서 진행하고, 행군대형 중앙에는 여호와의 언약궤가 뒤따르고, 후군은 그 뒤를 따르게 됩니다. 이 대형의 중심은 언약궤입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궤를 바라볼 때마다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언약궤가 앞서가면 ‘앞서 가시는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또 언약궤가 머물면 언약궤를 중심으로 12지파가 진영을 쳤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우리 가운데 계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언약궤를 중심으로 진행하기도 하고 쉬기도 하였습니다. 모든 것이 언약궤를 중심으로 움직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그들의 사고와 행동과 삶의 초점이었습니다.
인간의 삶의 본능적인 초점은 자기 자신입니다. 구제사업을 하더라도 순수하게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의 행복을 위해서 하기보다 자신의 명예심을 위해서 하기 쉽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기보다 자신과 가정의 행복만을 위해서 하기 쉽습니다. 죄는 자기 중심성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삶의 중심점을 자기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옮긴다는 것입니다. 삶의 초점을 하나님께 맞추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반드시 승리의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1620년, 신앙의 자유를 찾아 메이플라워를 타고 미국에 건너온 청교도들은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인해 많은 고생을 하며 생존을 위해 투쟁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삶의 초점을 하나님께 맞추었습니다. 그들은 가장 먼저 교회를 짓고 그 다음에 영적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하바드와 같은 대학교를 짓고 그 후에 자기 집을 지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크게 축복하시고 그들을 통해 제사장 나라 미국을 건설하셨습니다.
둘째로, 영적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은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순종과 지속적인 합심기도입니다. 여리고 작전 명령에는 제사장 ‘일곱’, ‘일곱’ 양각나팔, 제 ‘칠일’, ‘일곱번’ 등 일곱이라는 숫자가 4절에만 네 번, 6장 전체에 걸쳐 열 네 번이나 언급되었습니다. 성경에서 ‘일곱’이란 숫자는 완전수로서 ‘완전’, ‘완성’, ‘거룩’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온전한 믿음과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온전한 믿음과 완전한 순종이 있는 곳에 온전한 승리가 있습니다. 한번의 순종이 상황을 바꾸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온전한 순종은 반드시 상황을 바꾸어 놓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한 두 번 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용의를 가집니다. 그러나 조금하다가 잘 안되면 쉽게 포기해 버립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해 보았는데 안되더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끝까지 믿음으로 최선을 다하는가 아니하는가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십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8장에서 우리가 한맺힌 과부와 같이 끈질기게 기도할 것을 비유로 가르치신 후에 말씀하셨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18:7,8)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고 한시라도 빨리 가나안에 들어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작전상 성을 돌아야 한다면 힘들지라도 매일 일곱 바퀴를 돌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매일 한번씩만 성을 돌되 엿새동안을 그리하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2백만명이 넘는 그 많은 사람들이 대오를 정비하고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성을 한바퀴 돈다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엿새동안 하루에 한바퀴만 돈다는 것은 젊고 혈기 왕성한 군인들에게는 답답하고 참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도록 하신데에는 그들이 인간적인 혈기와 감정을 버리고 오직 믿음과 인내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궤를 중심에 모시고 돌 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기도하고 도전하고 도전하고 기도하였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6일동안 지속적으로 합심해서 기도했습니다. 여리고성은 7일째 7바퀴를 도는 순간에 갑자기 무너져 내린 것이 아닙니다. 성수대교가 한 순간에 무너져 내렸지만 갑자기 무너져 내린 것이 아닌 것처럼, 여리고성도 갑자기 무너져 내린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6일동안 돌면서 드린 엿새동안의 지속적인 기도가 쌓이고 쌓여서 마침내 무너진 것입니다.
어느날 방탕자 어거스틴은 로마서 13:11-14절 말씀을 읽고 하루 아침에 새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어거스틴 한 사람의 변화는 기독교계에 지각변동을 일으킬만큼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한 사람의 변화가 있기까지는 어머니 모니카의 30년간 끈질긴 인내와 애절한 눈물의 기도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눈물의 기도로 기른 자식은 결코 망하지 않는다”는 말이 모니카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돌보는 양들이 빨리 변화되어 귀히 쓰임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려면 꾸준한 1대1역사와 지속적인 기도가 쌓여야 합니다.
셋째로, 영적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조건 성을 돌라고만 하지 않으시고 제사장 일곱이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나팔을 불면서 언약궤 앞에서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좋아하는 악기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나팔입니다. 일곱 제사장들이 일곱 양각나팔을 불면서 대오에 맞추어 행군하는 모습은 실로 장엄했을 것입니다. 엿새 동안 매일 계속해서 나팔을 불다가 제 7일에는 양각나팔을 길게 울려 불어서 백성들이 그 나팔소리를 듣고 일시에 큰 소리를 지르게 됩니다. 유대인들은 은으로 만든 나팔과 양각으로 만든 두 종류의 나팔을 사용했습니다. 은나팔은 회중을 소집하거나 진을 진행시키거나 전쟁을 하러갈 때 사용되었고(민10:1-9), 양각나팔은 희락의 날과 절기나 희년 때 사용되었습니다(민10:10; 레25:9,10). 그러므로 양각 나팔을 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무 값없이 베푸신 그 크신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푸신 그 크신 은혜와 능력과 사랑을 기억하면서 승리를 주실 것을 확신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일이 잘 풀릴 때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기는 어렵지 않지만, 일이 잘 안 풀리고 상황이 힘들 때 찬양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찬양 대신 한숨과 불평이 나오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일이 잘 안 풀리고 상황이 힘들수록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헬렌켈러는 눈이 멀고 귀가 멀고 입이 막혀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몸이 온전치 못한 까닭에 내 자신과 나의 의무와 또 나의 하나님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나는 내가 온전하지 못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멀린 캐로더스는 한 때 탈주병으로서 감옥생활을 하기도 하고 도박과 암시장 거래꾼으로서 활동했던 불량청년이었습니다. 이러한 그가 어느날 억지로 조부님에게 이끌려 예배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할아버지는 40년 동안 담배를 끊지 못해 담배 골초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날 할아버지가 자기 옆에서 하나님 앞에서 서원을 하였습니다. “하나님, 만일 멀린 캐로더스를 새사람으로 만들어 주신다면 설혹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담배를 끊겠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간절한 서원 기도를 들으시고 그를 기적적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그 후 그는 군목이 되어 수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였습니다. 그는 “감옥생활에서 찬송생활로”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찬양기도는 하나님과 교통하는 가장 좋은 길이며 우리 생활에 큰 능력을 일으킨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기뻐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순종해서 하는 것이다. 찬양기도는 커다란 결심 중에 행하여지며 인내심을 가지고 끝까지 찬양을 계속하면 하나님의 능력은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하여 나중에는 물이 점점 불어나 큰 시냇물이 되어 흘러넘치는 것처럼 내 속에 넘쳐 흘러서 지난날의 모든 상처와 흔적을 깨끗이 씻어버린다.”
어떤 병사의 아내가 수년 동안 엄청난 술주정꾼인 남편으로 인해 너무 큰 고통을 당하다가 절망 끝에 이혼하고자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멀린 캐로더스 목사님을 찾아와 상담을 했습니다. 그 아내는 “목사님,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와 함께 살라는 말씀은 하지 마세요. 저는 정말 그와 함께 살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멀린 목사님은 말했습니다. “상관치 않겠습니다. 그러나 다만 남편의 그러한 짓을 하나님께 감사드리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리고 성경말씀에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 부인은 처음에는 우스개 소리로 생각했으나 절망 가운데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마침내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자 2주 후에는 그의 남편이 술이라고는 한 모금도 마시지 않는 신기한 일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찬송생활의 권능”이란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생활에 완전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 우리가 겪는 재앙이나 질병이나 난관은 나에게 두신 완전한 계획을 성취하기 위한 단계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재앙을 주신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재앙을 없애 달라고 간구하는 대신에 현재 내가 처해 있는 어려운 상황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한 계획의 한 부분임을 즐거운 마음으로 인정하고 이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역사하심으로 삶의 전환점이 생겨나게 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찬양은 신비한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찬양할 때 나를 괴롭히는 모든 악령의 세력이 떠나고 심령에 빛과 생명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찬양할 때 내 마음에 역사하는 모든 불신과 두려움이 물러가고 심령에서부터 평강과 확신과 용기와 희망이 솟아나게 됩니다. 18세기의 영국의 유명한 목사였던 윌리암 로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군가가 당신에게 행복과 온전에 이르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을 가르쳐 줄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의 말은 당신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하라고 하는 말일 것입니다. 그 까닭은 당신에게는 재앙과 같이 느껴지는 일도 주님을 찬양하는 가운데 축복으로 바뀔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과 실라는 빌립보 개척역사를 섬기다가 매를 많이 맞고 쇠고랑을 차고 깊은 옥에 갇치게 되었습니다. 이때 그들의 처지는 하나님께 감사하기는커녕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밤중쯤 되어 일어나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갑자기 지진이 나서 옥문이 열리고 착고가 벗어지게 하셨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간수와 그 가족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행16:19-34). 이렇게 하나님은 찬양 속에 임재하십니다(시22:3). 히브리서 13:15절은 말합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역경과 난관 앞에서도 양각 나팔을 들어 주를 높이 찬양해야 하겠습니다.
넷째로, 침묵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행군하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침묵을 명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레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지니라.” 여호수아가 왜 그들에게 침묵을 명하였을까요? 만일 그들이 말하도록 내버려두었더라면 성을 한 바퀴도 채돌기 전에 작은 웅성거림은 여러 인간적인 소리, 쑥덕거림, 불평 불만의 소리로 번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소리들은 순식간에 전염병처럼 퍼져서 전 군대의 사기를 떨어뜨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백성들로 하여금 침묵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묵상하도록 하였습니다. A.W. 토어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경건훈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침묵의 훈련이다. 왜냐하면 침묵을 배우지 않고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때로 우리는 불필요한 말을 많이 하여 불신을 심고 사람들과의 관계성을 파괴시킬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말을 많이 하기보다 잠잠히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에 힘써야 합니다. 다윗은 고백했습니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시37:7).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시62:1).
백성들은 하나님의 작전명령에 순종하여 첫째날 여호와의 궤를 따라 여리고성을 한번 돌고 진으로 돌아와서 진에서 잤습니다. 둘째날, 셋째날, 넷째날, 다섯째날, 여섯째날도 이스라엘은 이같이 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리고성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성벽의 벽돌하나 빠진 곳이 없었고, 실날같은 금하나 가지 않았습니다. 조금의 변화나 조짐이 없이 요지부동인 성벽을 바라볼 때 그들의 마음 속에는 회의와 불신이 밀려들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끝까지 묵묵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성을 돌았습니다. 그리고 제 칠일 새벽에는 일찍 일어나 여전한 방식으로 성을 일곱 번 돌았습니다. 성을 일곱 번째 돌 때에 제사장들이 나팔을 길게 불었습니다. 이때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명했습니다. “외치라! 여호와께서 이 성을 너희에게 주셨느니라”(16). 그러자 백성들은 오랜 침묵을 깨고 천지가 떠나 갈 정도로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와~” 그 외침은 믿음의 함성이요, 기도의 함성이요, 찬양의 함성이었습니다. 그러자 그처럼 견고해 보이던 난공불락 여리고 성벽이 순식간에 와르르 무너져 내렸습니다(20). 여리고성이 무너진 것은 외침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믿음으로 행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30절은 말합니다. “믿음으로 칠일동안 여리고를 두루 다니매 성이 무너졌으며”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 사단과의 영적인 싸움입니다.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은 승리의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초첨을 하나님께 맞추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순종과 지속적으로 합심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수군거리거나 불평하지 않고 묵묵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말없이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사명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에게 큰 승리를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