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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 9:1-27

by Mark Yang   05/04/2022   Joshua 9:1~27

Message


여호수아 제 9 강 (김 모세 목자)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

■ 말씀 :여호수아 9:1-27

■ 요절 :여호수아 9:14

“무리가 그들의 양식을 취하고 어떻게 할 것을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

지난 강의에서 우리는 아간 한 사람의 언약의 파기가 전쟁에서의 패배요 공동체 전체의 일로 확대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로서 우리는 하나님이 언약을 얼마나 귀중하게 여기시는가를 알았습니다. 여호수아도 이에 깊은 문제의식을 느끼고 아이성과 벧엘을 정복한 후 전쟁을 잠시 중단했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그에게 명한대로 모든 민족을 길갈에서 북쪽으로 48km나 떨어진 에발산과 그림심산으로까지 이동시켜 거기서 말씀 교육을 했습니다. 그는 이런 실패의 원인이 바로 말씀 공부 부족이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말씀 곧 언약을 지키느냐 않느냐에 따라 그들의 축복과 저주가 결정됨을 교육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길갈 진으로 돌아와 전열을 가다듬고 다음 전쟁을 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는 이제 승리만 있어야 했습니다. 다시는 패배가 있어서는 안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간 사건과는 반대로 문제가 밖에서 굴러들어왔습니다. 그들은 그만 속아 쳐 없애야할 원수와 그만 성급히 화친 조약을 맺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큰 정복전쟁을 앞두고 낭패에 빠졌습니다. 이번에 큰 실수를 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습니까? 또한 이 문제가 해결되는 과정에서 우리가 무엇을 배워야할까요? 특별히 여호와께 묻는 기도의 중요성과 함께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신실함에 대해 배울 수 있길 기도합니다.

I. 성급했던 이스라엘

1.2절을 보십시오.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의 모든 왕이 모여서 일심으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로 더불어 싸우려 하였습니다. 그들은 여리고성과 아이성, 그리고 그 곁에 있는 벧엘까지 함락시킨 이스라엘 군대가 이제 본격적으로 자기들을 공격해 올 것을 생각하고 대책을 세우고자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생각하면 두렵기는 하지만 그들처럼 일방적으로 당할 수만은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평소에 서로 사이가 안좋았지만 이스라엘과 싸우기 위해서 일심으로 연합하였습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이스라엘을 연구하고 작전을 짰습니다. 그런데 3절을 보십시오. 기브온 거민들을 달랐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아무리 연합해봐야 다 소용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얻은 정보에 의하며 24절에서 알 수 있듯이 이스라엘이 이 땅 거민을 다 죽이고 이 땅을 차지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임을 정확히 안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왕들에게 안 된 일이지만 조용히 연합에서 탈퇴해 이스라엘과 화친을 맺고자 했습니다. 기브온은 10장 3절에 의하면 가나안 중에서도 왕도와 같은 큰 성이고 아이보다도 크고 그곳 사람들을 다 용사로서 강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의 힘을 과신하지 않고 죽기 전에 조용히 살길 찾기로 한 것입니다.

4,5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친선사절 같이 보이기 위해 먼 여행 끝에 온 것처럼 보이기 위해 헤어진 전대, 에이지고 찢어져서 기운 가죽 포도주 부대를 나귀에 싶고 그 발에는 낡아 기운 신을 신고 낡은 옷을 입고 다 무르고 곰팡이 난 떡을 준비해서, 길길 진으로 들어왔습니다. 길갈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정복을 내내 총사령부를 두고 있는 곳입니다. 그들은 겁도 없이 그곳으로 들어왔습니다. 경비병들은 ‘누구냐’ 하고 그들을 가로막았습니다. ‘우리는 원방에서 왔나이다. 이제 우리와 약조하사이다(6) ’ 7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이 좀 수상했습니다. ‘너희가 우리 중에 거하는 듯하니 우리가 어떻게 너희와 약조할 수 있으랴’ 그러지 그들은 여호수아에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종입니다. -We are your servant.’ 그들은 몸을 굽실거려가며 이렇게 자신을 낮추고 여호수아를 높였습니다. 그러자 여호수아가 물었습니다. ‘너희는 누구며 어디서 왔느냐’ 그러자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 종들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인하여 심히 먼지방에서 왔습니다. 이는 우리는 여호와의 명성과 그가 애굽에서 행하신 모든 일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요단 동편에 시혼과 바산 왕 옥을 진멸시킨 모든 일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거민들이 의논해서 당신들의 종이 되기도 약조하기로 정하고 이곳에 사신으로 왔습니다. 못 믿는가 본데 자 이 떡하고 가죽부대하고 신방을 보십시오. 먼데서 오느라고 그동안 곰팡이도 쓸고 이제 이 모든 것이 닳아버려 다 낡아졌습니다. ’ 그러자 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다같이 14a절을 보십시오. ‘무리가 그들의 양식을 취하고 ’ 그러자 옆이 있던 이스라엘 기무사요원들이 그들이 내놓은 떡을 검사했습니다. 살펴보니 거기 곰팡이가 있었습니다. 그들의 말이 거짓말 같지는 않았습니다. 14b를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어떻게 할 것을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 이에 여호수아는 여호와께 묻지 않고 그들과 화친조약을 맺고 당장에 typing 해서 조약서에 싸인했습니다. 이어 이스라엘 족장들이 추가 서명하였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그들을 해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로서 이스라엘과 기브온 간의 조약은 번갯불에 콩볶아 먹은 듯 순식간에 끝났습니다. 이로서 이스라엘에게는 우방국이 하나 생겼습니다. 이제 뭔가 좀 든든해진 것같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지금 가나안 족속들이 모여 연합해 자기들을 공격하려고 하는 때라 여간 신경 쓰이는 때가 아니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혼자만 사방의 원수에 우겨 싸임을 당해 외로운 전쟁을 해야하는 것같았는데 이렇게 먼나라에서라도 찾아와 ‘우리는 당신의 종입니다’ 하고 말하질 않아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말하며 그 소문을 잘 들었다고 하질 않나 이런 기드온의 존재는 참 더운 날 시원한 냉수 한 사발같이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큰 실수였습니다. 그들은 기브온 사람들의 아첨 같은 말에 정신이 빠져 일을 너무 성급하게 처리해버린 것입니다. 한 나라와 화친 조약을 맺으려면 사신들의 이야기만 들어볼 것이 아니라 그 나라에 한번 정도는 가보고 그곳 국왕도 만나보고 여러 가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적어도 그들이 첫눈에 보기에 그 땅 거민 사람같이 보였으면 좀 두고 보면서 조사를 철저해 해야 했는데 그러질 않았습니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이상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사신으로 왔으면 그런 거지꼴을 하고 올 수 있습니까? 이스라엘 사령부 정문 앞에서 준비한 옷이라도 갈아입고 와야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런 거지같은 모습을 하고 곰팡이 쓴 빵조각 몇 개에 다 떨어진 신발을 보고 믿어주다니 말아 안됩니다. 세상에 이런 식으로 외교하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18절을 보면 이 조약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해 맺어졌습니다. 이렇게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서해할 정도라면 적어도 하나님께 묻고 난 후 해야지 하나님은 쏙 빼놓고 자기들이 나름대로 판단해 일을 처리하면 이건 순전히 자기들 마음대로 하나님 이름을 써먹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무엇을 할 때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관련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며 신중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십계명을 주시면서도 ‘너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말씀까지 하셨습니다. 이를 생각해 보건데 이스라엘은 참 큰 실수 했습니다. 이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까지 했으니 어쩝니까? 그야말로 기브온 사람들은 교활하게 이스라엘을 속이며 그들에게 접근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 믿는 사람들의 가장 큰 약점 중에 하나는 ‘나도 교회 다닙니다.’ 하고 다가오면 ‘아 그래요’, 하면서 상대방에 대한 긴장을 풀고 그를 믿고 영접한다는 것입니다. 주변에 불신자만 가득한 세상에 믿음의 중심 지키기도 외로운데 누가 우리에게 와서 ‘나도 교회 다닙니다.’ ‘나 교회 집사에요’하고 말하면 동지를 만난 것같이 긴장이 풀립니다. 그래서 학교나 직장에서 교회 다니는 사람을 만나면 정말 반갑습니다. 심지어는 술자리에서 전혀 몰랐는데 ‘이봐 미스터 김, 나도 교회 다녀 집사야, 괜찮아 한잔 마셔, 예수님도 포도주 마셨어, 아예 만들어 주셨어’하면서 다가옵니다. 그러면 괜히 똑같이 예수님 믿으면서 나만 술 안마시며 눈치보고 고생하는 것 같습니다.

쎈타에도 이런 사람들이 종종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들이 쎈타에 오는 것은 예수님 이외의 자기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단순히 먹고 잘 곳이 없어 예수님의 이름을 들먹거리며 찾아옵니다. 이중에는 우리 UBF에 대해 상당히 연구하고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소위 우리의 약점을 이용하는 거지요. 이런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신앙이 있는 것같고 또 불쌍합니다. 그리고 말씀에 대한 소원도 있어 보입니다. 그러면 일대일 양 없는 이때 얼마나 감사한지 ‘이것 하나님이 나를 긍휼히 여기 보내주신 양이 분명해’ 하고 welcome 합니다. 그래서 밥도 사주고 당장 잘곳이 없다고 해서 장막에 특별히 부탁해 제워주기도 하는데 어느날 도둑질해 사라집니다. 이것은 제 경험입니다. 그 친구 저와 일대일 몇 번 하면서 저에게 잘 얻어먹고 쎈타에 며칠 자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 그동안 센타 여기저길 봐두었다가 비디오 카메라를 훔쳐갔습니다. 그걸 팔아먹으려다가 경찰에 장물신고가 되어 붙들렸습니다. 그러다 경찰연락 받고 그 카메라를 되찾아 온 적 있습니다. 특별히 장사하는 사람들 중에 자기도 교회다닌다고 하면서 접근해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조심해야합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교회 다닌다면 그 사람에 대해 마음이 약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전철에서 동냥하는 사람들이 하모니카로 왜 그렇게 구슬픈 찬송가를 연주하는 줄 아십니까? 이건 고도의 심리전입니다. 저도 찬송가 부르는 사람에게 돈 많이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요지는 우리는 저자세를 하고 기브온 사람들처럼 거지같은 모습을 하고 다가오고 거기다가 하나님의 이름까지 거들먹거리고 나오는 그런 사람에게 속기 쉽다는 것입니다. 형제들은 ‘나도 교회에 다녀요’하면서 다가오는 자매들을 조심해야합니다. 그러지 않아도 결혼하고 싶은데 이런 식으로 다가오는 여자 왠지 하나님이 보내주신 자기 반쪽 아닌가 하고 꼭 헛생각을 하게 만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이름을 팔며 나오는 사람을 조심해야할 뿐 아니라 이들과의 약속이나 계약을 맺는데 절대 성급하면 안됩니다. 약속이나 계약- 그것이 비록 구두로 한것이라도 우리 마음은 거기에 붙들립니다. 그래서 무슨 결정할 일이 있으면 항상 시간을 두고 기도하고 또 기도하는 것이 좋습니다. 사소한 것이라도 기도하고 정하는 것이 좋습니다. 지금은 그것이 사소한 것 같아도 나중에 산같이 큰 문제가 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은연중에 성령의 판단과 인도하심을 바라고 기다리다보면 전혀 새로운 방향이 나오고 또 감추어졌던 어떤 일을 드러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별히 목자된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섬기고자 할 때 성급한 것을 항상 경계해야합니다. 말 한번 잘못하고 결정한번 잘 못내려 그것을 번복하려고 하다보면 당사자들과 불필요한 갈등이 생기고 또 피차간에 내면의 상처가 발생하는 수가 있습니다. 수양회 때에 말씀 강사 해달라고 사정사정해서 겨우 허락받았는데 나중에 강사가 바뀌었다고 해보십시오. 당사자는 존심이 상하고 무시받는 것 같아 그 사람은 수양회 때 말씀 못받는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일을 처리하면 목자의 권위가 깍이고 더 나아가 하나님이 원망스러워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성급한 결정 항상 조심해야합니다. 옛날 팝송 가사에 ‘ Think twice before you answer’- ‘ Think twice before you say yes’ 라는 말이 있었는데 한마디로 신중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자님들은 무엇을 결정할 때 기도에 기도를 거듭하고 또 기도하며 하나님으로부터 확신을 얻기까지 신중을 기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나님께 묻지 않아서 그 인생을 망친 대표적인 사람은 이스라엘의 사울 왕입니다. 사울은 여호와께 묻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세운 종 다윗을 일생 따라다니면서 그를 괴롭혔습니다. 그는 평소 하나님께 묻지 않았습니다. 묻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제사장도 막 죽였습니다. 이렇게 여호와께 묻지 않는 그는 자기감정과 혈기대로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폭군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말년에는 아예 무당에게 가서 자기 운명을 물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런 그는 전장에서 비참히 죽었습니다. 죽어 그 목이 베여 블레셋 사람들의 우상인 다곤 신전의 전시물이 되었습니다. 이런 그의 최후에 대해 성경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울이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저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며 여호와가 저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돌리셨더라”(대상 10:13,14).

반면 하나님께 자주 물어 인생을 승리한 대표적인 사람은 다윗 왕입니다. 그는 사울에게 쫓겨 광야를 도망 다닐 때나 왕이 되었을 때나 변함없이 여호와 하나님께 나와 물었습니다. 다윗이 사울의 피해 도망 다녀야 했을 때 한번은 그일라가 블레셋 사람들에게 공격을 받아 탈취 당하였습니다. 이에 다윗은 그일라 사람을 구하러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도 되는지를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이 내려가 그들을 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다윗의 부하들이 이를 걱정하자 다윗은 또 한 번 하나님께 물어 승리의 확답을 받고 내려갔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일라 사람들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일라 사람들이 다윗을 사울에게 넘겨주려한다는 소문을 듣고 이번에도 과연 그것이 사실인지 여호와께 또 두 번이나 물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이 주신 방향대로 그곳을 빠져나와 사울의 손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왕이 되어서도 전쟁을 할 때 항상 하나님께 이 전쟁 해도 됩니까 하고 물었고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작전을 펴야하는가까지 말씀해주셨습니다. 다윗의 승리는 그의 용맹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께 묻는데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구하는데 있었습니다. 이런 그는 인생을 승리하며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팔레스타인 지역 남북을 통일하고 역대 최대의 왕국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고 또 하나님도 그를 지극히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를 통해 메시야를 보내주시고 거룩한 하나님 나라를 세우실 것을 예언해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은 창조주로 고백합니다. 이는 우리가 그의 피조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주가 되십니다. 우리는 그의 종임을 고백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군사로 부르신 총 사령관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을 하든 먼저 예수님의 뜻을 묻고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먼저 기도해야합니다. 자기감정과 성질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나름대로의 판단이나 좋은 생각만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무지한 열심히 사람을 괴롭힙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달란트로 일합니다. 우리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해 하나님 역사를 섬겨야합니다. 그러나 먼저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애써야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 주께 하듯 하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합니다. 먼저 여호와 하나님께 물어가며 그 일을 해야 하는지 말아야하는지 확인에 확인을 거듭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지혜를 구해야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지식과 지혜의 근본이시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17:7은 말합니다.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우리가 자신의 지혜의 부족함을 알고, 또한 우리가 모여 머리를 맞대고 회의하여도 우리의 모사가 부족함을 알고 최종적으로 무엇을 결정하기에 앞서 여호와 하나님께 또 묻고 묻는 겸손을 드리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이루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

II. 맹세를 지킨 이스라엘

그러면 그들이 이렇게 여호와께 묻지 않고 화친 조약을 맺은 결과가 어떠합니까? 16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삼일이 지나서야 그들이 근린에 있는 가나안 땅 족속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3일간의 행군을 통해 기브온 사람들의 여러 성읍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뒤늦게야 그들은 화친 조약을 맺은 기브온에 가보게 된 것입니다. 가보니 그 나라는 먼 나라가 아니라 길갈에서 불과 20-25 km 떨어진 성읍이었습니다. 그 성읍은 여러 개가 하나로 통치되는 큰 성읍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를 보는 순간 갑자가 분노가 일어나고 자연스럽게 허리에 찬칼에 손이 갔습니다. 그들은 그때서야 자기들이 속은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진멸하라고 한 가나안 족속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쳐 없애고 정복해야할 대상이었습니다. 보아하니 그들은 우상 숭배자들이었습니다. 성읍 곳곳에 흉측한 우상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족속들과 마찬가지로 음란하고 부도덕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스라엘에 투항하듯 속여 화친조약을 맺고자 한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목숨을 유지하고자 술책을 쓴 것을 그때서야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칼을 뽑을 수 없었습니다. 족장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두고 맹세해 화친조약을 맺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속은 것이 너무 분했습니다. 만일 이때 이스라엘이 칼을 들고 기브온 거민들을 해쳤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첫째, 하나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게 됩니다. 고대 근동지방에서도 상대가 거짓을 꾸며 계약한 것이 있으면 그것을 얼마든지 파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요즘 민법에서도 속여 맺은 계약은 무효처리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교활한 속임수로 이루어진 계약이라도 신의 이름으로 맹세한 것은 결코 변개하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스라엘이 그 조약을 깨뜨린다면 다른 민족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신실하지 못한 하나님으로 여기고 또 그 백성들도 그러하다고 여기게 됩니다. 이때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은 사라집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비웃음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 서원을 해놓고도 그때는 내가 생각이 부족해 그런 서원을 했다며 이런 저런 그럴듯한 핑계를 대기 시작하면 끝이 없게 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이 손상되는 것을 매우 싫어하십니다. 주기도문을 보면 제일 첫 번 기도제목이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입니다. 그리고 그 맨 끝 기도제목은 ‘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니다’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어떤 이유 가운데서도 거룩히 구별되어져야합니다. 그리고 최후에는 그 영광을 노래해야합니다. 이만큼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이 영원히 거룩히 보존되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그 이름으로 맹세되어진 약속은 반드시 지켜져야 합니다. 한번은 사울 왕이 이스라엘과 유다 조속들을 위한 열심히 넘쳐 그만 죽여서는 안 될 기브온 사람들을 고의로 죽였습니다. 이는 여호수아와 화친을 맺은 이래로 이제까지 지켜온 맹세를 깨는 일이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다윗 왕 때, 그것도 그의 왕권 말기에 그 책임을 물으셨습니다. 3년 가뭄이 들게 하셔서 다윗이 어찌된 일인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사울이 기브온 양민을 살해한 것을 기억시키고 기브온 사람들의 한을 풀어주도록 했습니다. 이에 다윗이 기브온 거민의 요구대로 사울의 후손 일곱 명을 그들에게 넘겨준 후에야 하나님도 진노를 푸시고 가뭄을 멎게 하셨습니다(삼하21장). 하나님은 이렇게 그 이름으로 맹세되어진 이런 조약을 그 백성들이 지키게 하시므로 그 이름의 영광을 보존하십니다. 이를 보건데 하나님은 만일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브온 거민들을 칼 대했다면 하나님은 진노하시고 이스라엘을 축복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만큼 우리가 주의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항상 애써야합니다.

둘째, 이제 사람과 사람사이의 약속도 깨어지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다스림을 받고 그 이름으로 율법을 받고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번 사건으로 우리는 단지 속았을 뿐이라며 조약을 취소하고 기브온 거민들을 치면 앞으로 이와 유사한 일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다들 하나님의 이름으로 약속해놓고 그때는 그랬지만 지금을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 못 하게 되었다 하면서 나름대로 이유를 대고 약속을 이행하지 못하는 일들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 사회는 거짓과 사기가 넘치는 나라가 될 것입니다. 미국의 동전에는 이런 말이 새겨져 있습니다. “ In God We Trust " 그들은 하나님이 계시므로 서로 믿고 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이 하나님 이름을 함부로 여기고 그 이름을 경외하지 못할 때 각종 사회범죄가 늘어나고 인본적인 나라가 되었습니다. 인간은 그러지 않아도 부패해서 범죄가 많은데 이제 하나님께 대한 절대성도 사라지니 이 얼마나 사회가 혼란스럽겠습니까?

그러면 이와 반대로 그들이 기브온 거민과의 그 맹세를 지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첫째로, 그들은 가나안 족속으로부터 악영향을 받게 될 것입니다. 기브온 거민이 살아 그들 중에 거하게 될 것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그들은 우상 숭배를 하는 족속입니다. 그들은 악한 민족입니다. 음란 문화 속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이들이 자연히 이스라엘에게 악영향을 끼칠 것은 뻔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가나안 족속들을 왜 다 진멸하라고 했습니까? 출애굽기 34:13을 보면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너희는 도리어 그들의 단을 헐고 그들의 주상을 깨뜨리고 그들의 아세라 상을 찍을 지어다 15 너는 삼가 그 땅의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지니 이는 그들이 모든 신을 음란이 섬기며 그 신들에게 희생을 드리고 너를 청하면 네가 그 희생을 먹을까 함이며” 하나님은 이를 걱정해 이렇게 진작에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르치고 또 여호수아에게도 이를 철저히 행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실수로 조약을 맺어 이들을 없애지 못하게 되었으니 어쩐단 말입니까? 이스라엘이 가나안 정복을 해도 그들 중에 버젓이 살아 있을테니 이스라엘이 이들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을까요?

둘째로 그들은 기브온 족속을 옆에 두고 가나안 전쟁을 하게 되므로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나중에 어떻게 변하여 자기들을 배반할지 알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은 그들과 화친 조약을 맺었으므로 이제 그들은 가나안 족속으로부터 보호해줄 의무가 생겼습니다. 화친 조약을 맺었는데 그들이 공격받고 죽는 것을 보고 모른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10장에서 이런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가나안 다섯 왕들은 기브온이 자기들이 배반했다며 기브온을 공격하고자 합니다. 이때 위기를 느낀 그들은 여호수아에게 ‘빨리 와서 자기들을 구원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이에 여호수아는 할 수 없이 군대를 이끌고 이들 때문에 전쟁에 나가야했습니다. 그들은 이런 대가를 지불해야했습니다.

이를 살펴볼 때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 이 기브온의 문제는 아주 골치 아픈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것 죽일 수 도 없고 살릴 수도 없고 어쩌면 좋을지 이스라엘에게 이는 여간 큰 짐이 아니었습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안 이스라엘 회중들은 족장들을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왜 잘 알아보지도 않고 이렇게 화친 조약을 맺어 골치 아프게 만들었느냐. 도대체 작전참모들은 뭐하느냐며 비난했습니다. 이런 식이라면 그들은 적전에서 혼란과 분열이 일어나 전쟁을 제대로 치를 수 없습니다. 어느 모임이든 리더십이 무너지면 그것은 끝장입니다. 가나안 정복은 커녕 그들이 먼저 망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면 이에 대한 족장들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19, 20절을 보십시오. “ 우리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로 그들에게 맹세하였은즉 이제 그들을 건드리지 못하리라 우리가 그들에게 맹세한 맹약을 인하여 진노가 우리에게 임할까 하노니 ” 그들은 무리의 비난이 있을 때 ‘우리도 여호수아가 화친하지고 해서 한 것이다’하는 식으로 책임을 전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다만 자기들의 잘못을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그들 자신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한 것에 대해 신실하고자 했습니다. 그 이름을 경외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에 무리들은 이런 그들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그들을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나 족장들 모두 성숙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들은 비록 큰 실수가 있기는 했지만 서로 여호와의 이름을 세우고자 했습니다. 만일 회중들이 계속 따지고 물었다면 그것 역시 여호와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한번 세워진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맹세를 존중하고 또 그것을 끝까지 지켰습니다. 그들은 거룩하신 여호와의 이름으로 하나 되었고 여호와의 그 이름의 영광을 위해 하나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의 성숙한 내면성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한 것이면 비록 그것에 실수가 있더라도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 그것을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가 손해를 보더라도 약속을 지켜야합니다. 우리는 목자입니다. 신자입니다.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의 이런 이름을 자연히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이름과 연관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는 사실 이 하나님의 이름과 떨레야 뗄 수 없습니다. 만일 목자가 약속을 했다가 이를 나중에 상황이 바뀌었다고 지금을 안 된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먼저는 목자가 신용을 잃게 되어 더 이상 존경을 받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사정이 바뀐 것은 자기지 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양은 그 약속을 이제까지 마음에 담아두고 살았는데 목자가 일방적으로 자기 사정으로 그 약속을 파기하면 얼마나 억울합니까? 양은 목자의 인격을 의심하고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목자가 믿는 하나님도 믿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그 목자라는 식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주의해야합니다.

몇 해 전 김대중 대통령 집권 초기에 소위 옷로비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때 장관이나 부인, 그리고 이에 관련된 사람들이 거의 다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이들은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자기는 크리스챤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면서 자신들의 결백을 주장하며 청문회에 임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의 내용이 결국 거짓말임이 드러나 기독교인들이 이들로 인해 대 망신을 당했습니다. 당시 많은 기독교인들이 창피해서 고개들과 다니기가 부끄러웠습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고 만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예는 예하고 아니오는 아니오 하지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는 거짓된 우리의 마음을 경계하심이요 우리의 마음이 지나치면 그러다가 하나님의 이름에 불명예를 끼치기 쉽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기에 심히 주저해야합니다. 예는 예, 아니오는 아니요 하면 그것으로 충분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해야할 것들이 있는데 그것을 아주 귀중하게 여겨야합니다. 우리는 결혼할 때 하나님 앞에서 성서에 손을 얹고 서약합니다. 하나님께 맹세하지 못할 정도면 그런 결혼 어떻게 믿고 합니까? 그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 하나님 안에서 서로 존경하고 사랑하기로 했습니다. 싸움 안하기로 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살다가 서로 마음이 상하는 일이 있어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서로 사랑하기에 힘써야합니다. 그들 가정생활에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이 되게 나타나야합니다. 부부 사이가 잠시 힘들어졌더라도 이혼의 이자는 생각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찢어 쪼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부는 피차간에 철저히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 어찌하든지 행복해져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세례를 받을 때 하나님 앞에서 손을 들고 서약합니다. 우리는 이로서 신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정식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의 자녀답게 또한 교회의 일원으로 교회를 위하고 그 이름을 위해야합니다. 우리는 또한 목자선서도 합니다. 이것 역시 하나님 앞에 하는 은혜와 영광의 행사입니다. 우리가 목자 생활을 하다가 좀 손해 볼 수 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 이름을 위해 이를 인해하고 사명을 감당해야합니다. 이렇게 여호와의 이름, 하나님의 이름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을 하나님은 축복하십니다. 그들을 영육 간에 풍성하게 하고 교회에서는 물론이요 세상에서도 귀하게 축복해주십니다.

III. 저주 받은 기드온

그러면 기브온은 이제 이스라엘에게서 영원히 자유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거짓말로 속였습니다. 그것은 죄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속인 잘못이 있습니다. 그것은 제9계명의 위반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이 문제를 따집니다. 이 죄문제는 분명히 기브온이 책임져야할 부분입니다. 거짓말이 계속 통하도록 해서는 안됩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여호수아는 기드온 사람들을 불러 말했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너희에게서 심히 멀다하여 우리를 속였느냐” 그는 기드온 사람들이 그들을 속인 대가로 그들을 심판하고자 합니다. 기브온 사람들의 대답이 어떠합니까? 24절을 보십시오.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종 모세에게 명하사 이 땅을 다 당신들에게 주고 이 땅 모든 거민을 당신들의 앞에서 멸하라 하신 것이 당신의 종에게 분명히 들리므로 당신들을 인하여 우리 생명을 잃을까 심히 두려워하여 이같이 행하였나이다. ” 이 말에 의하면 그들은 이스라엘의 대 가나안 정책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가나안 사람들을 심판할 것을 다 알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보소서 이제 우리가 당신의 손에 있으니 당신의 의향에 좋고 옳은 대로 우리에게 행하소서 ”하며 이제 죽으라며 죽는 시늉까지 하겠다는 식으로 그 앞에 납작 엎드렸습니다. 이에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들이 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대신 그들이 속인 대가로 저주받게 하였습니다. 27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나니 너희가 영영히 종이 되어서 다 내 하나님 집을 위하여 나무 패며 물 긷는 자가 되리라 ’ 여호수아는 이들을 어찌할 것인가 많은 고민을 한 것같습니다. 그들은 사실상 이제 이스라엘 공동체 속에 편입되어 버렸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고 살 때에도 여전히 그들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그들을 지혜롭게 관리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그들의 우상숭배의 습관이 이스라엘에게 영향을 주어서도 안 되고 또한 그들이 앞으로의 정복전쟁에 장애가 되어서도 안될 것입니다. 이에 여호수아는 그들을 무장해제 시키고 여호와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봉사하는 자들이 되게 하였습니다. 특별히 제사지낼 때 쓰는 나무를 패고 물 긷는 자가 되게 하였습니다. 이는 이제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고 봉사하게 함으로 더 이상 우상 숭배하지 못하게 함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이스라엘에서 신분이 가장 낮은 자들이 하는 것입니다.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가운데 조금의 권세를 가지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이후 기브온 족속은 이스라엘에 결코 반역하지 않았고 이스라엘이 망하나 회복되나 변함없이 성전을 위해 나무패고 물 긷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약속에 신실했습니다. 에스라서를 보면 바벨론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귀한한 사람들 중에 느디님 사람들의 족보가 나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전을 섬기는 종으로 깊이 인정된 것입니다. 느헤미야서를 봐도 느디님 사람들로 귀하게 쓰임받기까지 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겸손히 은혜를 구해 얻은 구원입니다.

이로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한 이 조약 문제가 잘 해결되었습니다. 약속도 지키고 하나님의 이름도 더욱 영광스럽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상을 살펴볼 때 참으로 우리가 무엇을 하기에 앞서 항상 여호와께 묻기에 힘써야 함을 깨닫습니다.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새벽에 조용히 나와 기도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성급히 결정하지 말고 범사에 하나님께 묻고 물어가며 하나님의 이름을 이 땅에 떨어뜨리는 일 없이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길 기도합니다. 이 새봄학기 우리가 예수님을 안믿는 사람들과 함부로 약속하고 또 함부로 그들의 모임에 가입하기를 금하여 하나님 역사를 섬기는 일에 올무가 없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