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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 13-21장

by Mark Yang   05/04/2022   Joshua 13:1~21:45

Message


여호수아 제 11 강 (손사무엘 목자)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 말씀 :여호수아 13-21장

■ 요절 :여호수아 14:12

“그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날에 들으셨거니와 그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 할찌라도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12장까지에서 우리는 가나안 정복 전쟁을 공부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지 690년 만에 가나안이 12지파에게 분배되어 드디어 안식을 얻는 내용입니다. 이러한 축복은 신실하신 하나님, 이 하나님을 온전히 좇아간 갈렙과 여호수아, 이런 주의 종들에게 순종한 백성들이 이룬 아름다운 동역의 역사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새학기 역사를 시작한 우리가 가져야 할 열망과 자세가 무엇이어야 하는지 배우고자 합니다. 특별히 갈렙의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그 열망과 여호수아의 '삼림이라도 개척하라' 그 개척 스피릿을 저희가 덧입길 기도합니다.

I.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13-15장)

13:1절입니다.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나이 많아 늙었고 얻을 땅의 남은 것은 매우 많도다" 이스라엘은 7년간의 치열한 정복 전쟁을 통해 가나안 땅에 대한 주도권을 장악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령관 여호수아는 늙고 얻을 땅의 남은 것은 아직 많았습니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새로운 방향을 주셨습니다. 6,7절을 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복한 땅과 앞으로 얻을 땅까지 포함하여 각 지파들에게 분배하라 지시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내가 그들을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좇아내겠다' 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여호수아는 그 약속을 믿고, 아직 정복되지 않는 땅까지 모두 분배했습니다. 그 땅을 받은 지파들도 그 약속을 믿고 계속 정복해야 나가야 했습니다. 분배하는 쪽이나 분배받는 쪽이나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므로 분배하라는 것은 그 남은 땅을 마저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도전하라는 의미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미 약속은 받았지만, 아직 그 약속을 현실로 얻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이미 받은 줄로 여기는 믿음으로 도전해야 합니다. 갈렙은 이러한 믿음의 도전을 우리에게 잘 보여 줍니다.

6절입니다. 여호수아가 12지파에게 제비뽑아 땅을 분배하고자 했을 때, 갈렙이 찾아왔습니다. 갈렙은 45년 전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 정탐 작전에 참여 했던 열두 명중 한명입니다. 가나안 정탐 후, 다른 열 명의 정탐들은 무시무시한 거인 아낙 자손을 보고 겁이 났습니다. 주신 약속은 다 까먹고 악평을 늘어놓았습니다. "그 땅은 거민을 삼키는 땅이더라 또 거기 사는 사람들이 덩치가 얼매나 큰지 우리는 메뚜기 같더라" 그들의 말을 듣고 백성들은 밤새 울었습니다. "이렇게 죽을라고 그 고생하고 여기까지 왔나" 그러나, 그때 갈렙은 외쳤습니다. "무슨 소리냐!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 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밥 먹으러가자!" 이런 갈렙에게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칭찬 하시고, 특별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오직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좇았은즉 그의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민14:24) 그 후 45년의 시간이 지난 오늘, 갈렙이 여호수아를 찾았습니다. "여호수아 장군님! 45년 전 하나님의 특별 약속을 기억하십니까? 물론 제가 갔던 저 헤브론 땅은 해발 1013m 산지입니다. 그것도 무시무시한 거인 아낙 자손이 지키는 견고한 요새입니다. 그리고 내 나이 85세, 먹을 만큼 먹었습니다. 그러나, 제 팔뚝 좀 보십시요. 그 젊은 시절과 다를 바 없습니다. 무엇보다 저 땅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 야곱, 이삭이 묻힌 곳입니다. 저희들에겐 너무나 소중한 땅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약속하신 땅이요, 특별히 제게 약속하신 땅입니다. 그 하나님이 저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니 저는 반드시 그들을 좇아낼 수 있습니다" 그는 눈을 크게 뜨고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습니다. "장군님! 그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13절을 보십시오. 이러한 갈렙을 여호수아는 축복하고, 헤브론 산지를 기업으로 주었습니다. 그리고 갈렙은 그 헤브론을 공격하여 45년 동안 마음에 간직하고 있던 헤브론을 얻었습니다.

그가 제비도 뽑기 전에 이 산지를 달라고 청원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단지 땅을 얻어 편안한 노후를 보내고자 했다면,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저 평지를 내게 주소서' 하면 됩니다. 그는 그럴 수 있는 위치와 공로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니면, 곧 제비 뽑습니다. 사람들이 백전노장인 원로 장군을 알아서 대접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뒷짐지고 지켜만 보면 됩니다. 마음에 안들면, '겨우 이거야!' 큰 소리 한번 치면 됩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들이 저곳만은 피하고 싶은 제일 어려운 헤브론 산지를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그 정복에 최선봉에 서겠다고 했습니다. 그는 이 일에 어떤 희생도 치를 각오가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헤브론 산지를 향한 불타는 열망이 있었습니다. 그가 왜 이러는 것일까요? 헤브론 산지는 그에게 어떤 곳이기에 그 나이에 그는 이러는 것일까요?

헤브론은 함께 정탐간 열 명의 지도자들에게 낙담과 불신을 심은 곳입니다. 그러한 불신은 곧 자신의 동족들에게 싹 퍼졌습니다. 이로 인해 그들은 가나안의 문턱에서 치욕적인 패배를 안고 40년의 광야 생활을 보냈습니다. 그 패배와 치욕을 안겨준 곳이 바로 헤브론이었습니다. 이는 단지 백성들의 치욕으로 끝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백성들의 불신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땅에 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한탄하셨습니다.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모든 이적을 행한 것도 생각하지 아니하고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아니하겠느냐"(민14:11) 단지 가나안에 못 들어가고, 광야에서 40년 보낸 것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땅에 떨어졌습니다. 이것을 안겨다 준 곳이 바로 헤브론인 것입니다. 자신과 여호수아를 제외한 모든 동족이 죽었습니다. 살아남은 자의 부끄럼 속에 죽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약속은 그를 다시 일어나게 했습니다. "오직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좇았은즉 그의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 자손이 그 땅을 차지 하리라"(민14:24) 주님은 갈렙이 갔던 그 땅! 그 치욕의 헤브론에 승리의 입성을 약속하셨습니다. '치욕의 헤브론을 바로 너를 통해 영광의 헤브론으로 바꾸어 주겠다. 너를 통해 다시금 가나안에, 너희 안에 내 영광을 나타나겠다' 약속하신 것입니다. 사실 헤브론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묻힌 막벨라굴이 있는 곳입니다. 가나안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살아 있는 곳입니다. 그 약속을 믿고 산 조상들의 기도가 생생한 그들의 뿌리요 고향입니다. 그러므로, 헤브론을 얻는다는 자체가 가나안을 얻는 것입니다. 산지라고, 아낙자손이 있다고 피해가서는 도저히 그들이 가나안을 얻었다고 할 수 없었습니다. 아니, 저 헤브론의 악몽이 살아 있는 한, 가나안을 온전히 얻을 믿음과 용기를 가질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헤브론은 가나안 정복의 핵이요 요충지였습니다. 갈렙은 그 헤브론을 40년 만에 다시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이 노장군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저 헤브론을 이젠 박살내야 한다. 바로 내가 해야 한다' 그는 하나님과 동족에 대해 깊은 책임의식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 다시 그 악몽을 되풀이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 악몽의 핵인 저 헤브론에 승리의 깃발을 꽂고자 했습니다. 이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고 백성들에게 믿음과 용기를 주고 싶었습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과 조국을 위해 인생 말년에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이었습니다. 40년 광야 생활 동안와신 상담하며 기다려온 바로 그 일이었습니다. 목숨 바쳐도 아깝지 않을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여호수아에게, 아니 하나님께 요청하였던 것입니다. "그날에 주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캠퍼스는 이 세상의 헤브론입니다. 이 사회와 세계의 예비 지도자들이 자라는 곳으로 성서한국, 세계선교의 핵이요 요충지입니다. 영적 안일에 젖어 있던 18세기 영국을 일깨운 것은 옥스퍼드 대학이었습니다. 대학생 찰스 웨슬리 한 사람이 시작한 홀리클럽이 대학을 바꾸고, 영국을 바꾸었습니다. 18세기 영국 교회와 사회, 세계 선교를 이끄는 많은 인물들이 여기서 탄생되었습니다. 또한 적극적인 사회 참여가 일어나 감옥 개량, 빈민 구제, 병원과 학교 설립, 노예폐지 등의 사회 개혁이 홀리클럽 운동 출신들로 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선교사를 파송케 한 19~20세기 전 세계에 선교의 큰 물결은 18세기 후반 미국 윌리엄스 대학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대학생 사무엘 밀즈 2세가 20 명 정도의 기도모임을 만들고 기도하던 중 불가능에 도전하는 세계 선교 비젼을 덧입었습니다. 이어 밀즈는 초교파적인 선교 단체로서 미국 해외 선교회를 발족했는데, 이는 미국 최초의 선교 기관이었습니다. 이에 자극 받은 많은 교회들이 선교회를 설립함으로 미국은 , 20세기 세계 선교를 주도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캠퍼스는 우리 모임의 헤브론이기도 합니다. UBF의 첫 자 U는 University입니다. 4.19, 5.16 혁명 직후 캠퍼스 지성인들은 어디로 가야할지 방향을 잃고 헤매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대학생들을 불쌍히 여기는 그 마음 하나로 고 이사무엘 선교사님과 머더배리 선교사님이 캠퍼스에서 영어 성경 강좌를 개설함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 캠퍼스는 우리 모임의 뿌리요 터전입니다. 이 캠퍼스를 섬기고자 외부의 도움도 다 끊고 자립 역사를 시작했고, 많은 오해도 받았습니다. 이 캠퍼스를 위해 우리 선배들은 젊음과 인생을 바쳤습니다. 그분들의 삶 자체가 이 캠퍼스를 부탁한다는 선배들의 한맺힌 당부입니다. 우리가 이 캠퍼스에서 서지 못하면, U 자를 빼내야 합니다.

특별히 고대 캠퍼스는 나의 헤브론으로, 나의 영적 고향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예수님 만났습니다. 바로 여기서 "캠퍼스의 복의 근원이 될찌라 !" 약속을 받았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일생 캠퍼스 목자로 살겠노라는 결심이 서려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인지, 고대 소리만 들어도 나에게 책임이 있는 것 같습니다. 고대 총장이라도 된 듯 늘 고대의 미래가 걱정됩니다. 삼성 이건희 회장일로 고대가 온 사회로 부터 지탄받을 때 마음이 아팠습니다. 고대가 잘 안되면 이상하게 힘이 안 납니다. 이는 복음 역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믿는 고대가 되지 않고, 예수님의 제자가 서지 않는 고대가 될 때 마음이 아픕니다. 센타에 고대생들이 줄어가면 이상하게 힘이 안 납니다. 고대는 안암 UBF 의 뿌리요 상징입니다. 이곳에서 잘 되야 저희가 힘이 납니다. 힘이 나서, 다른 곳도 잘 할 수 있는 믿음과 용기가 생깁니다. 고대가 살아야 우리가 살고, 우리가 살아야 고대뿐만 아니라 우리가 섬기는 철도대, 간호대, 성신여대, 서울 여대가 다 살아납니다. 민족 고대가 제사장 캠퍼스가 되어야 이 민족이 변하고 세계 선교를 이룰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대가 날이 갈수록 복음 역사를 섬기기 쉽지 않습니다. 이는 단지 고대 뿐만 아니라 한국 캠퍼스의 분위기기 그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고대 산지를 저희들에게 헤브론으로 주셨습니다. 이 고대 산지에서 당신이 영광 받기를 열망하십니다. 고대 산지를 통해 이 세상을 정복하기를 열망하십니다. 고대 산지에서 우리가 승리하며 당신을 찬양하길 열망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열망이 나의 열망이 되길 기도합니다. 그래서 갈렙과 같이 45년을 키워온 그 열망의 기도를 주님께 드리길 기도합니다. " 이 고대 산지를 내게 주소서 바로 내게 주소서"

우리 안에 그런 열망이 살아나고 있음을 인하여 감사합니다. 하나님은 올해 저희들에게 고대가 제사장 캠퍼스, 고대 70 명 제자 양성이라는 분명한 방향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방향을 놓고 느혜미야서 말씀을 들으며 일주일간 저녁 8시에 모여 합심기도하였습니다. 기도하며 저희는 이 기도제목에 하나가 되고 고대가 다시금 저희 마음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학사 수양회를 통해 학사 목자님들이 캠퍼스 목자로서의 부르심을 새롭게 하시고, 1:1 열 두 팀을 함께 외쳤습니다. 한 목자님은 퇴근 후 호상을 부여 잡고 함께 기도한 후 기숙사 야간 습격 작전을 제안하셨습니다. 제안하셨을 뿐 아니라 지난주 감행하셨습니다. 저는 막 감행하시고 돌아온 두분을 센타 정문에서 목격하였습니다. 마치 갈렙을 보는 듯 했습니다. 학생 목자님들은 그 열망을 이번 바이블 카페 티켓에 담았습니다. '사자성 고대기' 나니아 연대기에서 사자는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사자성 고대기란 호랑이성 고대가 사자되신 예수님이 다스리는 고대가 되기를 고대하며 기도한다는 뜻입니다. 이 티켓을 보시면서 이 고대를 예수님이 다스리시도록 고대하며 기도해야겠습니다. 저는 처음에 70명이 되겠나 싶었습니다. 그러나, 기도할수록 하나님이 이러시는 것 같았습니다. "난 700명, 7000명이라도 맡기고 싶은데, 그런 나의 열망을 아느냐" 하나님을 온전히 좇지 못하고 자신을 좇아 불신하는 저부터 회개하였습니다. 지난주 송사라 선교사님과 점심식사를 같이 했습니다. 저는 식사기도 때 그만 100명 제자양성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빼먹었습니다. 그러나 송사라 선교사님은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고대 제자 70명 중 한명을 제게 주시옵소서" 저는 또 회개하였습니다. 저는 22명 제자학교도 이렇게 정신없는데, '누가 100명을 먹이나' 이런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100명 제자 양성을 위한 기도는 단지 캠퍼스를 위한 기도만은 아닙니다. 바로 우리를 무력감과 불신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는 기도, 이런 우릴 통해 하나님이 영광 받아주시라는 기도입니다.

또한, 갈렙이 최선봉에 섰다는 것은 헤브론을 얻는 일에 어떤 희생도 치르겠다는 각오가 담겨 있습니다. 저희에게도 이런 각오가 필요합니다. 특별히 저희에게는 한 영혼을 향한 희생의 각오가 필요합니다. 한 영혼이 100명, 1000명으로 보여야 그 영혼이 살아납니다. 축구를 하다보면 공을 보지 말고 사람을 보라고합니다. 사람에 집중해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한 영혼에 집중해야 합니다. 올해 내게 보내주신 양들의 이름을 붙들고 갈렙처럼 기도해야 겠습니다 "이 양을 내게 주시옵소서" 양이 많으신 목자님이 이런 말 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내 마음에 먼저 들어오지 않고 얻어진 양들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우리 영혼을 먼저 기도로 얻으셨습니다. 기도하실 뿐만 아니라 나 한 사람을 위해 희생하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는 자기 자신은 버림 당하시면서도 '내 양을 내게 주소서' 그런 목자의 심정이 담겨져 있는 기도입니다. 이 예수님을 온전히 좇음으로 아낙 자손 같은 가장 어려운 양, 힘든 양 앞에서 물러서지 않아야 겠습니다. '이 양을 내게 주소서" 기도함으로 예수님의 한 영혼을 향한 기도와 희생을 배우길 기도합니다. 이어서 15장은 유다 지파가 제비 뽑아 얻은 땅의 경계와 성읍들, 그리고 갈렙이 헤브론 산지를 실제로 정복하는 과정이 나타나 있습니다.

II. 스스로 개척하라(16-21장)

16, 17장은 요셉의 자손인 므낫세와 에브라임 지파가 얻은 땅에 대해서 기록 하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각 지파가 다 이루지 못한 일과 요셉 지파의 불만 문제입니다. 유다지파는 예루살렘 거민 여부스 사람을, 에브라임 지파는 게셀 주민 가나안 사람을, 므낫세 지파는 세 성읍의 주민을 좇아 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함께 살거나 종살이를 시켰습니다. 그러나 그 남은 거민들이 이스라엘의 신앙을 타락시키고, 게릴라전으로 끊임없이 괴로움을 주었습니다. 훗날 에브라임 지파를 중심으로 한 북이스라엘은 가나안의 풍습에 완전히 물들어 버렸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 망하고야 말았습니다. 그 멸망의 씨앗은 이때 뿌려진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왜 다 쫓아내지 못하였을까요? 표면적으로 볼 때 가나안 사람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스라엘 민족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다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 더 큰 결심을 하고 좇아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철저히 싸우는 과정에서 치러야할 희생을 싫어했습니다. 더군다나 종으로 부려 먹으면 더 좋지 않냐는 나름의 계산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좇지 못한 영적인 죄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보다 자신과 상황을 좇았기 때문에 남은 거민을 쫓아낼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내부에 하나님을 온전히 좇지 않는 불순종, 이로 인한 안일이 침투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그들의 문제는 요셉 지파의 불만으로 표면에 드러났습니다. 그 불만이 무엇입니까? 17: 14절입니다. "요셉 자손이 여호수아에게 말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지금까지 내게 복을 주시므로 내가 큰 민족이 되었거늘 당신이 나의 기업을 위하여 한 제비, 한 분깃으로만 내게 주심은 어찜이니이까?" 요셉지파는 초기에 하나님만 의지해서 다른 지파와 합심하여 가나안 정복에 힘썼습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가나안 땅을 얻은 지금, 그 땅을 한 뼘이라도 더 확보하고 싶었습니다. 장자지파라는 타이틀, 최대의 인원, 여호수아가 자신들 지파 출신이라는 점을 의지해 쉽게 땅을 얻고자 하였습니다. 이를 간파한 여호수아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15절입니다. "네가 큰 민족이 되므로 에브라임 산지가 네게 너무 좁을진대 브리스 사람과 르바임 사람의 땅 삼림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 이는 "큰 민족이라 지금 땅이 좁다고 불평하냐? 큰 민족답게 스스로 개척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요셉 자손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16절입니다 "아니 그런 땅을 개척하라니요. 우리 수준에 안 맞습니다. 게다가 철병거를 든 자들이 버티고 있어요. 희생에 비해 소득이 너무 적어요" 여러 이유를 되었지만, 개척하기 싫다. 빨리 달라는 땅이나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척이란 원래 쓸모 없는 땅을 갈아서 쓸모 있게 만드는 작업입니다. 이러한 개척에 수고와 희생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요셉 자손은 땅은 더 갖고 싶었고 고생은 하기 싫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요셉 지파와 같을 때가 있습니다. 성장은 하고 싶은데 훈련은 받기 싫고, 양이 있으면 좋겠는데 피싱은 나가기 싫습니다. 영적인 거목은 되고 싶은데 새벽기도의 노동은 감당하기 싫습니다. 장학금은 받고 싶은데, 공부는 하기 싫고, 모임이 이랬으면 좋겠다 바라는 것은 많아도, 모임에 헌신하여 섬기기는 싫습니다. 이에 여호수아는 다시 무엇이라 말합니까? 17,18절을 다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 여호수아가 다시 요셉의 족속 곧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일러 가로되 너는 큰 민족이요 큰 권능이 있은즉 한 분깃만 가질 것이 아니라 그 산지도 네 것이 되리니 비록 삼림이라도 네가 개척하라 그 끝까지 네 것이 되리라 가나안 사람이 비록 철병거를 가졌고 강할 찌라도 네가 능히 그를 좇아내리라"

첫째, 삼림이라도 개척하라: 개척하라는 말은 어떤 영어 성경을 보면 cut down 즉 베어내다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개척은 나무를 베고 뿌리를 뽑고, 땅을 개간하여 사람이 살만한 땅으로 일구는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그러므로 개척은 노동입니다. 수고와 아픔이 따릅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인간 본연의 삶이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입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만드신 다음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그러므로 개척정신, 노동정신을 잃는다는 것은 곧 인간 본래의 정신을 잃는 것입니다. 그것을 잃어버리면 사람은 안일과 나태로 조금씩 죽어갑니다. 아직도 가야할 길이라는 책에서 정신과 의사인 스캇펙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삶은 고난이다. 그러나 이러한 평범한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런 고난에 직면하여 해결코자 할 때 삶은 더이상 고난이 아니다" 우리 인생은 장미 화원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은 개척해야 할 삼림입니다. 문제와 고난이 우거진 삼림입니다. 삼림으로 영접하고 땀흘리며 개척코자 할 때, 힘이 나고 재미가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문제가 해결 될 뿐만 아니라, 믿음을 배우고 내면이 강해집니다. 그러나 어딘가에 있을 고생 없는 장미화원을 찾아 헤매이면, 왜 세상이 이러냐고 불만만 늘어납니다. 그러다가 장미 화원처럼 보이는 쾌락과 죽음의 늪에 빠지고야 맙니다. 여호수아는 더 큰 축복을 요구하는 요셉 자손에게 그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기초, 즉 개척 정신을 일깨워 준 것입니다. 덴마크 하면 누구나 깨끗하고 아름다우면서 부유한 나라를 떠올립니다. 그러나, 1864년 덴마크는 망국의 해였습니다. 10년을 끌어왔던 독일과의 전쟁에서 패배했습니다. 최대의 곡창지를 빼앗기고 황무지만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젊은이들은 댄스나 당구치기로, 어른들은 도박과 술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이런 때에 구국 운동에 발 벗고 나선 사람이 그룬트비 목사였습니다. 그는 세 가지 사랑을 국민들에 외쳤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백성들을 도우신다. 살고자 땀 흘려 일하는 백성들을 하나님은 도우신다. 둘째, 땅을 사랑하라! 황무지도 , 모래땅도 땀 흘리고 정성들여 가꾸면 옥토로 바뀐다. 셋째, 동포들을 사랑하라 건장하고 똑똑한 젊은이는 10년 전쟁에서 다 죽고 약자만 남았다. 그러나 낙망하거나 포기하여서는 안된다. 약한 사람도 뭉치면 위대한 일을 해낼 수 있다." 그룬트비 목사는 황무지가 문제가 아니라 황무지가 된 백성들의 마음이 더 문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이런 마음에 도전정신, 개척정신을 일깨우는데 혼신의 힘을 다하였습니다. 그의 애국 설교에 감명 받은 젊은이들이 교육, 농업 등 각 분야로 흩어져 개척함으로 덴마크를 낙원으로 만들어 냈습니다.

둘째, 너는 큰 민족이요 큰 권능이 있다: 여기서 크다는 양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질적인 의미의 크다, 즉 위대하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내려진 현재의 축복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개척 정신을 잃어버리자, 그 축복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방금 전 까지 '큰 민족'이라고 뽐내던 그들이 이제는 철병거를 가진 적이 무섭다고 벌벌 떨고 있습니다. 이에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큰 축복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그 축복으로 인해 얼마나 자신들이 큰 권능을 가진 큰 민족, 위대한 민족이 되었는지 일깨워 준 것입니다. 그리고 이 축복에 감사하며 개척할 때 "가나안 사람이 비록 철병거를 가졌고 강할지라도 네가 능히 그를 좇아내리라" 믿음을 심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대 개척기에 양마가, 양앤나 목자님의 개척정신을 축복해주셨습니다. 그 이전에 많은 사람들이 고대를 개척하고자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그리고는 ‘고대는 정말 힘들다’하는 말만 하였습니다. 이때 양마가, 양앤나 목자님은 ‘그럴리 없다. 고대라고 유별나게 개척하기 힘들리 없다’며 고대 개척에 도전하셨습니다. 이때 마가목자님은 고대 개척의 열망과 함께 고대생들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길에서 고대 뱃지를 달고 다니는 고대생만 보면 ‘ 와.. 저기 고대생이 간다’ 하며 넋을 잃고 쳐다보시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공군 군의관으로 있으셨던 이병두 목자님으로부터 야구선수 백인천씨의 동생인 고대 자연대생 백인학이 공군에 복무하다는 사실을 들었습니다. 그를 어찌하든지 만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를 추적해 결국 일대일 양 삼고 제자 삼았습니다. 그가 지금 뉴욕 UBF 지부장이신 백다윗 선교사님입니다. 이외에도 개척 초기 목자님들은 밤늦도록 합심기도하며 고대 개척에 도전하였습니다. 이때 한번은 양마가 목자님이 꿈을 꾸셨는데 변소에 똥이 넘쳐 흐르는 광경을 보고 ‘어.. 똥..!’하며 놀라시다가 잠을 깨셨습니다. 이때 양마가 목자님은 꿈에서 ‘똥’은 좋은 징조라며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고대 부흥의 뜻으로 해석하셨습니다. 그러자 과연 하나님께서는 그해 세븐 타이거 목자님들을 세우셨습니다. 이후 하나님께서는 세븐타이거를 통해 놀랍도록 개척 역사를 축복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우연히 사무실에서 80년대의 한 기록을 보니까 "예배가 300명 대 돌파, 더 이상 있을 곳이 없다. 또다시 개척하지 않을 수 없다" 정말 행복한 고민을 하였습니다. 그 이후, 이제까지 하나님께서는 200여명의 선교사를 안암에서 파송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제 90년대의 침체를 깨시고 올해 정확히 7분의 고대 형제가 이번주 목자선서를 하게 하십니다. 이들이 다시금 80년대 역사를 이끈 세븐타이거 선배들을 이어 21세 역사를 이끌 뉴세븐타이거가 되길 기도합니다. 잔웨슬레는 ‘나에게 주와 복음에 헌신된 100명만 달라, 그러면 세계를 변화시키겠다’고 말했습니다. 저희는 결코 작지 않습니다. 개척기 선배들의 땀과 눈물의 터전 위에 큰 권능을 가진 큰 모임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요셉 자손처럼 되기 쉬운 때이기도 합니다. 요셉 자손처럼 특권을 요구할 땐 큰 민족임을 내세워, '큰 모임에 왜 이게 없냐 저게 없냐' 불평을 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개척하라고 할 때는 삼림과 철병거탓을 하며 작게 여기는 자기모순을 드러내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요셉 자손에게 주신 말씀 "삼림이라도 스스로 개척하라!" 를 저희도 명심해야 겠습니다.

현재 저희가 당면한 내외적인 도전들 앞에서 우리가 가져야할 자세는 삼림이라도 개척코자 하는 자세입니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열망을 갖고, 실제 캠퍼스에 나가 땀 흘리고 때로는 눈물을 흘리는 수고를 감당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80년대 초 개척기와 같이 열심히 피싱할 뿐만 아니라 동역자들끼리, 혹은 팀별로, 요회별로 밤늦게까지 양들을 돌아보며 간절히 합심기도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우리가 합심하여 기도하며 하나님을 의지할 때 삼림이라도 개척할 수 있음을 믿습니다. 또한 이를 통해 1000 팀의 역사- 네자리수 일대일에 도전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 선배들은 말씀대로 살고자 몸부림 치다가 일반 교회와는 다른 독특한 UBF 공동체를 만들어 냈습니다. 성경을 깊이 공부하고 말씀을 잘 전하고자 다양한 방법으로 많은 창조적 시도를 하였습니다. 그런 몸부림 속에 탄생된 것이 1:1과 소감 입니다. 그런 창조적 몸부림 속에 담긴 개척 정신을 하나님은 축복하셨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공동체를 통해 하나님은 저희로 하여금 개인과 시대의 삼림을 베어내고 새 역사를 창조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급변하는 시대에 서 있는 우리는 선배들의 개척의 열심뿐만 아니라 이런 창조적인 개척을 배워야 할 때입니다. 시대도, 캠퍼스도, 고대도, 양들도 변합니다. 이 가운데 우리가 창조적으로 개척코자 할 때, 하나님이 도와주십니다. 이렇게 살면 힘들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안에 역동적인 개척의 기쁨과 생명이 춤추게 될 것입니다. 안일과 불평 속에 있던 우리 자신이 먼저 베어질 것입니다. 이로써, 올해 100명 제자 양성은 경한 일이요 2010년까지 배가의 역사를 이룰 수 있음을 믿습니다. 우리에게는 축복의 하나님이 계십니다. 이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신앙유산을 가진 큰 모임으로 저희를 이미 축복하셨습니다. 이를 먼저 감사하고, 이 하나님이 지금도 살아계심을 믿어야 겠습니다. 그래서, 이 아름다운 신앙 유산을 창조적으로 계승하여야 겠습니다. 나의 삶, 저희 모임, 저희가 섬기는 캠퍼스를 장미 정원으로 만들어 가야 겠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땀 흘리며 하나씩 하나씩 베어나갈 때, 현재의 삼림은 어느새 옥토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18,19장은 나머지 일곱 지파에게 분배되는 과정이 소개 되어 있습니다. 20,21장은 이미 분배된 땅 안에서, 이스라엘이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데 있어 요구되는 제도의 하나인 도피성과 제사와 신앙 지도를 맡은 레위인들의 거처를 마련하는 내용입니다. 그들은 정착하기도 전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가장 중요한 신앙 환경을 마련하는데 마음을 모았습니다. 피흘리며 얻은 성읍을 이렇게 내어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게 뭐 중요한가? 생각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참된 행복은 신앙을 가장 중요시 여길 때 찾아옵니다. 21:43-45절은 분배가 다 마무리 된 시점에서의 결론입니다. 다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열조에게 주마 하신 온 땅을 이와 같이 이스라엘에게 다 주셨으므로 그 모든 대적이 그들을 당한 자가 하나도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의 모든 대적을 그들의 손에서 붙이셨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씀하신 선한 일이 하나도 남음이 없이 다 응하였더라" 결국 가나안 기업 분배는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의 성취입니다. 이 언약이 성취되기 까지 무려 69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사이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습니까? 이스라엘은 무수히 죄와 원망으로 넘어졌습니다. 심지어 애굽에서는 민족 전체가 사라질 위기도 겪었습니다. 시퍼런 요단강, 철옹성 여리고, 장대한 아낙자손, 결심하고 버티는 가나안 족속, 해변의 모래와 같은 남방, 북방 연합군들과 싸워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실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맹세하신대로 주마하신 온 땅을 이스라엘에게 다 주셨습니다. 이 신실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큰 위로와 믿음을 줍니다. 약속대로 이루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을 때 우리도 신실할 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확실히 될 것을 믿을 수 있어야 우리도 자신있게 투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의 그 변치 않는 열망과 개척의 자세는 바로 이 신실하신 하나님에게서 나왔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과 상황을 좇을 때, 그들은 이 신실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좇았기에 신실할 수 있었습니다. 올 한해 저희가 신실하신 하나님을 좇아 저희도 신실하게 투쟁하길 기도합니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기도하며 삼림이라도 개척하길 기도합니다. 저희가 이를 축복하시는 축복의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을 체험하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