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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Ⅱ부:요한복음 14:1-31(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by Mark Yang   08/14/2019   John

Message


요한복음 Ⅱ부 제 2 강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말씀: 요한복음 14:1-31
요절: 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천국에 대한 소망을 심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여기에는 위로와 희망이 차고 넘칩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도마와 빌립과 가룟이 아닌 유다의 질문에 답변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그들 심령에 드리워져 있는 모든 의심과 근심의 구름을 말끔히 제하시고 분명한 생명의 길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영접함으로써 더이상 근심하거나 방황하지 않고 생명의 길을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하나님께로 이르는 길(1-6)

14장 말씀은 13장에서 계속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하셨습니다. 그 식사 분위기는 무겁고 심각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식사 도중에 갑자기 일어나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또 너희 중 한 사람이 나를 팔 것이라는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때부터 제자들은 불안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있다가 가룟 유다가 예수님께로부터 떡조각을 받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조금 있다가 제자들이 따라올 수 없는 곳으로 가시겠다는 이상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또 베드로가 죽는 데까지 주님을 따르겠다고 하자 오히려 네가 나를 세 번이나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제자들의 마음에는 점점 근심과 염려와 불안의 먹구름이 깔리기 시작했습니다. 제자들은 그 동안 이스라엘 회복이라는 큰 희망 가운데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예수님게서 능력을 행하실 때마다 그들의 희망은 더욱 커져 갔습니다. 예수님만 있으면 모든 현실 문제가 해결되고 그들의 장래도 보장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기들을 버려두고 어디론가 가신다고 하시자 갑자기 그들은 불안해지고 마음에 근심이 가득차게 된 것입니다. 그들의 문제는 장래의 보장(security)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우리 가운데도 장래 문제로 마음에 근심과 염려로 가득 차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어떤 분은 집안 문제로 염려하고 근심합니다. 또 어떤 분은 결혼 문제로 염려하고 근심합니다. 또 장래 진로 문제로 인해 심령이 꽉 막힌 분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확실한 것이 없으면 불안해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눈에 보이는 확실한 것이 있다할지라도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보장되지 않는 미래로 인해 불안한 인생을 살아갑니다. 이러한 불안 문제는 하나님을 떠난 모든 인생들의 공통된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불안한 마음을 잘 아셨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날 밤이면 체포 당하시고 많은 고난을 받으셔야 하셨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힘과 위로를 받아야 할 형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을 부드럽게 위로하기 시작하셨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예수님은 그들이 근심하고 불안한 이유는 하나님을 믿는 개인적인 믿음이 없기 때문임을 아시고 하나님을 믿고 또한 예수님을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믿으라는 말씀은 ‘trust' 즉 ‘맡기라’, ‘신뢰하라’는 뜻입니다. 즉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과 생명의 구주가 되시는 예수님을 신뢰하고 모든 장래를 맡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할 때만이 마음의 근심과 염려, 두려움과 불안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가장 확실한 보장이 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장래 문제로 불안해 하는 아브라함에게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15:1)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아이가 부모를 신뢰할 때 자신의 모든 것을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것과 같이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할 때 우리의 장래 문제, 결혼 문제, 가정 문제 등 모든 것을 안심하고 맡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믿음을 심으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도 심어 주셨습니다. 2a절을 보십시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하나님의 나라는 거주지가 좁아서 아파트 투기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곳에는 얼마든지 거할 곳이 많습니다. King James Version에는 많은 맨숀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맨숀은 수없이 많은 방이 딸린 궁궐과 같은 큰 저택을 의미합니다. 그곳에는 공기 오염도 없고 질병도 없고 사망이나 애통하는 것도 없습니다. 그곳은 생명과 평화와 자유와 기쁨과 사랑이 충만한 곳입니다. 그곳은 우리가 영원토록 안식할 수 있는 영원한 안식처입니다. 제자들은 세상의 모든 소유를 잃게 될지도 모릅니다. 또 핍박을 받아 정처없이 방황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결국에는 목숨까지도 잃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영원히 거할 처소가 있습니다.

우리는 언젠가는 육신의 장막을 벗게 됩니다. 그때는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재산이나 지위나 명예나 모든 것들이 아무 소용이 없게 됩니다. 그때 사람들은 깊은 절망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자들은 바로 그때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새로운 희망으로 불타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고후 5:1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우리에게 영원히 거할 처소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이 집은 하나님꼐서 친히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건설하신 집이기 때문에 가장 확실하고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이 집은 하나님의 왕국이라 불리워지기도 하고 하나님의 도성이라 불리워지기도 합니다. 또한 기쁨과 희락을 나타내는 낙원이라고도 불리워집니다. 우리가 이 아름다운 곳에 영원히 거할 수 있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영광스러운 희망입니다.

이러한 영광스러운 희망을 그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자는 세상 것에 얽매이지 않고 여유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 땅에 희망을 두고 사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 잘 살아야 되기 때문에 세상 것에 집착하게 되고 욕심을 부리게 됩니다. 그리고 인색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은 결코 우리가 영원히 거할 처소가 되지 못합니다. 인생은 나그네요 세상은 잠시 머물다가 가야하는 여인숙에 불과합니다. 우리 인생이 가야 할 본향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에게 이 영광스러운 희망이 있을 때 주와 복음을 위하여 자신있게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습니다. 또 어떤 고난과 역경 가운데서도 절망하지 않고 찬송을 부르며 거룩한 순례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심으신 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처소를 다 예비하면 다시 와서 그들을 영원한 처소로 인도하여 영원히 함께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예수님은 십자가로 구속 역사를 이루시고 부활하심으로 하늘 나라의 문을 여시고 사랑하는 제자들을 그곳으로 인도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너희도 하나님께로 이르는 길을 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도마는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목적지도 알지 못하는데 어찌 그 길을 알 수 있겠는가 하며 반문했습니다. 도마는 현실주의자로서 무엇인가 구체적으로 손에 잡히는 것이 있어야 믿는 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는 너무 비현실적이고 추상적이어서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믿고 싶지도 않았고 또 가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영접할 수 없었습니다. 도마는 마음의 의심 때문에 나아가야 할 참된 인생의 길을 알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인간은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돌아가고자 하는 갈망이 있습니다. 이러한 갈망의 표현은 제사 제도나 우상 숭배와 같은 것으로 나타납니다. 사람들은 죽었다는 말을 돌아 가셨다고 말합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것입니까? 사람들은 산의 정상에 오르는 길이 여러 개가 있듯이, 하나님께로 가는 길도 여러 가지가 있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가든 정상에만 오르면 되듯이, 어떤 종교를 믿어도 착실히만 믿으면 하나님께로 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로 이를 수 있는 길은 오직 한 길 예수님 뿐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라”고 말씀하시고 또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올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심으로 자신이 하나님께로 이르는 유일한 길임을 선포하셨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선언입니다. 세상에 어느 성현 군자도 “내가 곧 길이라”고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공자는 ‘朝聞道夕死可矣-아침에 진리을 찾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하였습니다. 석가는 인생의 참된 길을 찾기 위해 출가하여 10년의 세월을 허덕였습니다. 이들은 모두 참된 길을 찾기 위해 진실되게 고뇌한 구도자였지 결코 길 자체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놀랍게도 내가 바로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그의 신성의 선포입니다.

인간들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떠나 길을 잃었습니다. 벧전 2:25절은 이를 잘 말해줍니다.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사람들은 참된 생명의 길, 바르게 살 수 있는 진리의 길, 행복하게 살 수 있는 행복의 길을 찾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근본적으로 길을 잃었기 때문에 그 어디에서도 그런 길을 찾을 수 없습니다. 우리 인생은 예수님께로 돌아 와야만이 참된 생명의 길, 진리의 길, 행복의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인생들의 근본 문제인 죄와 죽음 문제를 해결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가 되십니다.(딤전 2:5) 예수님은 하늘과 땅을 이으시는 유일한 사닥다리가 되십니다. 쇼펜하우어를 따라가면 한강으로 가게 되지만 예수님을 따라가면 하나님 나라로 가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이르는 길이 되실 뿐만 아니라 실제 생활에서도 길이 되십니다. 사람은 누구나 제한된 인생을 의미있고 보람되게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방황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인생들에게 분명한 삶의 길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길이 되실 뿐만 아니라 진리가 됩니다. 진리란 참되고 영원불변하고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세상에 이런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세상에 이런 것은 없기 때문에 진리는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참된 진리가 되십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완전하고 최종적인 계시로서 진리 자체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아는 것은 바로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진리는 철학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격에서 발견됩니다.

예수님은 또한 생명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근원이 되시고 또 생명을 주시는 생명의 수여자가 되십니다. 사람들은 죄와 허물로 그 영혼이 죽어 있습니다.(엡 2:3) 예수님은 이런 인생들에게 참된 생명을 주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그 순간부터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게 됩니다.(요 5:24) 예수님은 “I am the way"라고 말씀하심으로써 항상 진리의 길이 되시고 생명의 길이 되십니다.

Ⅱ. 믿음의 역사(7-14)

예수님은 계속해서 제자들의 문제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도 알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을 알고 보았기 때문에 아버지도 알고 보았다고 하십니다. 이때 빌립이 머리를 돌렸습니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빌립은 지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눈으로 직접 보고 손으로 만지고 경험으로 체험해야 믿겠다고 하는 실증주의자의 대표입니다. 그는 과학주의 사고 방법에 물든 지성인들과 같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보여 주면 믿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고 또 보면 죽습니다.(출 33:20) 딤전 6:16절 말씀은 이를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지어다. 아멘”

예수님은 빌립을 인하여 몹시 섭섭하여 그를 책망하셨습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9) 예수님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골 1:15), 하나님의 모습을 완전히 계시하셨습니다.(요 1:18) 예수님은 3년 동안 제자들과 함께 계시는 동안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심을 여러 가지로 나타내셨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의 지식과 지혜를 초월하여 신령한 영적 세계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인 군자의 말이 아무리 훌륭하다 할지라도 우리에게 생명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죄사함의 은혜를 주고 영혼을 소생시켜 줍니다.

둘째는, 예수님이 행하신 능력의 역사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믿으라.”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는 장차 오실 메시야가 행하실 능력의 역사에 대해 예언했습니다. 그것은 소경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이었습니다.(사 35:5,6, 61:1) 예수님은 그 예언대로 능력의 역사를 행하심으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눅 7:21,22)

예수님은 부정적인 빌립에게 믿음을 심으실 뿐 아니라 그가 믿음으로 큰 일을 하도록 도우셨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더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믿음으로 예수님이 하신 일을 할 수 있고 또 더 큰 일도 할 수 있다는 것은 질적인 역사가 아니라 양적인 역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는 사람을 회심시키는 일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님이 하신 일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3년 동안 유대 지방에서만 복음 역사를 감당하셨지만, 우리는 오랜 세월 동안 온 천하에 다니며 복음을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큰 일을 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큰 일을 하려면 반드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쓰신 위대한 사람들은 인간적인 능력이 많거나 학벌이 좋거나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 모두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기도의 능력에 대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13)” 제자들이 예수님이 안계시더라도 자립적으로 큰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믿음이 있을 때만이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한계에 부딪힐 때가 많습니다. 이때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간절히 기도할 때 인간적인 한계를 뛰어 넘을 수 있습니다. 기도의 능력을 체험한 사도 요한은 요한1서 5:14절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기도는 하늘의 보고를 열 수 있는 열쇠입니다.

Ⅲ. 보혜사 성령(15-31)

15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예수님을 사랑하면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게 됩니다. 예수님의 계명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은 성령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이 됩니다. 예수님은 떠나시지만 그들과 영원토록 함께 하실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16). ‘보혜사’란 “도움을 받기 위해 곁에서 부름 받은 자”로서 우리 곁에 계셔서 우리가 도움을 구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보혜사는 상담자(counselor)가 되셔서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를 공급해 주십니다. 또 위로자(conforter)가 되셔서 힘과 위로가 필요할 때 위로하시고 격려해 주십니다. 성령은 우리 죄를 깨닫게 해 주시고, 우리를 거듭나게 함으로써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십니다. 성령은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시고,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바른 결정을 내리도록 도와 주십니다. 성령은 우리가 슬픔 중에 있을 때 눈물을 닦아 주시고, 우리의 마음이 상처를 입고 있을 때 상처를 싸매 주시고 위로해 주십니다. 성령은 믿는 자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만이 승리의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보혜사는 진리의 영으로서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성령을 받지 못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그들 내면에 거하십니다. 성령이 늘 그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에 그들은 외롭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신앙생활 하면서도 외롭다고 말합니다. 이는 그 마음 속에 성령께서 내재하신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영원토록 사시기 때문에 제자들도 예수님 때문에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19). 성령께서 강림하실 때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그들이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그들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20). 예수님은 계속해서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비결은 예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21). 예수님은 계명을 순종하는 자를 사랑하시고 그에게 자신을 나타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가룟이 아닌 유다가 예수님께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세상의 구주께서 왜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지 않으시고 은밀히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나타내시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예수님을 사랑치 않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받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영적인 눈을 뜨지 못하여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것을 아시고 보혜사 성령이 오셔서 하실 일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26절을 보십시오. 보혜사 성령은 우리의 성경 선생이 되사 우리에게 영적 세계를 가르쳐 주십니다. 또한 보혜사 성령은 우리가 공부한 말씀을 생각나게 하사 말씀으로 모든 것을 이길 힘을 주십니다.

27절에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평안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같지 아니합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상황에 따라 변하고 일시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바다의 저류와 같아서 어떤 형편 가운데서도 요동치 않고 변함이 없습니다. 이 평안은 마음에 깊이 묻힌 보배와 같아서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이 평안이 있기 때문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이 평안은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예수님이 가시면 보혜사 성령께서 오시기 때문에 제자들은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는 것을 슬퍼하지 않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28). 예수님께서 미리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예수님이 체포 당하시고 고반 받을실 때 제자들로 하여금 시험에 들지 않고 믿게 하려 하심입니다(29). 이 후에는 세상 임금 곧, 사단의 때가 오지만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고난 받으시고 죽으시기 때문에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30,31).

결론적으로 오늘날은 불확실성의 시대입니다. 우리의 삶이 불확실하고 우리의 미래가 불확실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엇인가 눈에 보이는 확실한 것을 붙잡고자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가장 확실한 보장이 되는 것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뿐이십니다. 예수님을 따라갈 때 우리는 생명의 길, 진리의 길, 행복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