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제 12 강 (김 모세 목자)
오직 여호와만 섬기라
▣ 말씀 / 여호수아 22:1-24:33
▣ 요절 / 여호수아 24:14
하나님께서는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모든 땅은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전쟁도 끝나고 안식이 찾아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무 걱정 없이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누리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그들 가운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들이 우상숭배를 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그 땅에 들어가 살게 하신 것은 그들이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귀하게 쓰임 받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아주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면 도무지 그러지 않을 것 같았던 그들이 이렇게 된 원인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여호수아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나갔습니까? 이 시간에는 말씀을 통해 우리 역시 이 시대에 경계해야할 것이 무엇이며 이 시대를 이기기 위해 우리의 결단이 어떠해야하는지 배울 수 있길 기도합니다.
I. 증거의 단을 쌓은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 (22장)
가나안 정복전쟁이 끝나고 이제 지파별 땅 분배도 다 끝났습니다. 하나님은 690년 전 과연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대로 그 땅은 그의 후손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은 인간의 온갖 허물과 실수 속에서도 그 약속을 이루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1절을 보십시오. 그때 여호수아가 르우벤 사람과 갓 사람과 므낫세 반 지파를 불렀습니다. 이들은 여호수아가 모세를 이어 이스라엘의 지도자 되었을 때 여호수아를 적극 지지하고 그를 이스라엘 가운데 굳게 세워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때까지 자기들의 기업이 있는 강 동편으로 돌아가지 않고 7년 동안 신실하게 끝까지 남아 가나안 정복전쟁 선봉에 서서 싸웠습니다. 이제 전쟁이 끝나고 그들이 자기 땅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습니다. 이 때 여호수아는 그들을 불러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모세가 명한데로, 자기의 명령대로 온 마음을 다해 충성하며 끝까지 남아 싸운 것을 칭찬했습니다. 그리고 말로만 끝내지 않고 그들에게 많은 재산, 심히 많은 가축, 은,금, 동. 철과 심히 많은 의복을 주었습니다. 이로서 자기 지파, 가족들과 함께 탈취물을 나누는 기쁨을 누리게 했습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여호수아는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긴장이 풀리지 않도록 영적인 권면의 말씀도 해주었습니다. 5절 말씀을 다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크게 삼가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한 명령과 율법을 행하여 너희 하나니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계명을 지켜 그에게 친근히 하고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성품을 다하여 그를 섬기라” 선물을 잔뜩 주는 것도 좋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런 영적 방향이 되는 하나님 말씀을 주는 것입니다. 이는 그들이 계속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도 여호수아와 같이 수고하고 충성된 종들을 축복하고 선물하며 또 영적 말씀으로 권면하는 지도자들이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
그런데 16절을 보십시오. 강 동편 르우벤 자손과 갓 지파 므낫세 반지파가 가나안 땅 요단 언덕에 거기 아주 큰 단을 쌓았습니다. 강 서편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들은 이를 우상을 섬기는 재단을 쌓은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여호와께 드리는 제물의 단은 성소가 있는 실로에서만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이스라엘 자손들은 이 문제로 그들과 싸우러 갔습니다. 그들은 동족이 우상숭배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각 지파 두령들과 제사장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를 동편 길르앗으로 파견했습니다. 대표단에 비느하스가 끼어 있다는 것은 이 사건이 아주 심각하게 다루어지고 있음을 말합니다. 비느하스는 과거 광야 브올에서 이스라엘이 우상과 간음의 범죄를 할 때 장막에서 간음을 하던 남녀를 창으로 찔러 죽여 하나님의 분노를 대신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조사단은 서편 길르앗에 이르러 르우벤, 갓, 므낫세 반지파 에게 말했습니다. 다같이 16절을 보겠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이스라엘 하나님께 범죄하여 오늘날 여호와를 좇는 데서 떠나서 자기를 위하여 단을 쌓아 여호와를 거역하고자 하느냐” 그리고 실제 브을의 죄로 인해 그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산 사건을 기억시켰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그런데 너희 소유지가 만일 깨끗지 아니하거든 여호와의 성막이 있는 여호와의 소유지로 건너와 우리 중에서 소유를 취할 것이니라 오직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단 외에 다른 단을 쌓음으로 여호와께 패역하지 말며 우리에게도 패역하지 말라 ” 이들은 그들이 사는 땅에 문제가 있다면 자기들의 소유지라도 내놓고 손해를 보는 한이 있더라도 너희들이 살 땅을 줄테니까 다만 하나님 앞에서 패역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께 대한 뜨거운 열정과 함께 죄에 대한 분노, 그리고 동족에 대한 목자의 심정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세지파의 대답은 어떠합니까? “ 우리가 단을 쌓은 것은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배반하고 번제나 혹은 다른 제사를 드리기 위함이 아니요. 다만 후대에 너희 자손이 우리 자손에게 강 건너 사는 너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와 상관이 없다고 할까 염려하여 기념비를 새우고자 한 것이었소. 우리가 만든 단의 모형을 보시오. 하나님의 단을 그대로 본 뜬 것이 아니요”(21-29) 알고 보니 강 이편 세 지파도 하나님에 대한 열정도 대단했습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 열두지파는 모두 하나님께 대한 열정이 대단했습니다. 그들은 피차간에 이 열정 때문에 오해하고 싸울 뻔 한 것입니다. 비느하스와 그와 함께 한 두령들은 이 말을 좋게 여겨 돌아가 이스라엘 자손에서 회보했습니다. 그러자 그들 모두가 다 함께 기뻐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렇게 피차간에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열심히 서로 싸울 뻔 한 것에서 한 가지 교훈을 얻습니다. 그것은 우리 역시 형제나 자매가 여호와께 범죄하고자 할 때 이를 나서서 막고자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형제가 성경적이지 않을 일을 할 때 이를 자기 일이 아니라며 놓아두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면 안됩니다. 오해가 있더라도 싸워 형제의 죄를 막을 수 있어야합니다. 우리도 형제들이 필요 이상으로 비디오를 빌려볼 때 “어째 투쟁하지 않고 비디오만 봅니까? 지금 우리가 100팀의 학생제자를 위해 기도해야할 때가 아닙니까? 그리고 숙제가 많다더니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 “아니야, 이 비디오 보고 내용 분석해서 레포트 내야하는거야” 하는 말이 오고 가야합니다. “아니, 왜 새벽기도 안나가십니까? 우리가 캠퍼스 양들을 위해 한 사람이라도 더 모여 기도해야할 때 아닙니까? ” “ 아니야, 나 벌써 깨어있었어. 지금 나가려가 하는 중이었어” 또 양들이 죄악된 생활을 할 때 그들에게 욕을 먹고 싸우게 될지라도 그들이 하나님에게서 떨어지고 범죄하는 것을 막고자 하는 책망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손해를 보더라도 공동체를 순결하게 보존하고자 힘쓸 수 있길 기도합니다.
II. 이스라엘에게 경고하는 여호수아(23장)
23: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사방 대적을 다 멸하시고 안식을 이스라엘에게 주신 지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이제 여호수아도 나이 많아 늙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제 온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두령들과 재판장, 유사들을 불러 고별사를 합니다. 그 내용은 어떠합니까? 3절을 보십시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모든 나라에 행하신 일을 너희가 다 보았거니와 너희 하나님 여호와 그는 너희를 위하여 싸우신 자시니라 ” 먼저 그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싸우시며 그 땅을 차기하게 했음을 기억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남은 땅의 사람들도 하나님께서 너희 앞에서 다 쫓아내므로 그 땅도 너희가 차지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5). 이어 그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답게 ‘크게 힘써 모세의 율법 책이 기록 된 것을 다 지켜 행하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크게 힘써’라는 말은 매우 강하게, 아주 확실하게 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만큼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말씀에 온전히 철저하도록 당부한 것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해야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여호수아의 당부대로 정말 ‘크게 힘써’ 여호와의 말씀을 지켜 행하지 않는다면 자연히 아직 남아 있는 그들에게 구경 가고 그러다가 그들의 꼬임에 넘어가고 물들어 우상 숭배를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과 친근히 하면 결국 그들과 더불어 혼인하며 피차 왕래하게 됩니다(12). 그들과 사돈 맺으면 이제 이방인의 풍습과 우상이 자연히 이스라엘 속에 들어옵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13절 첫머리로 보십시오. ‘정녕히 알라’- 다시 말해 똑바로 알아라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남은 민족을 쫓아내지도 않을 것이요 그들이 올무가 되고 옆구리의 채찍이 되고 눈에 가시가 되어 필경 이 아름다운 땅에서 멸절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그는 이 아름다운 땅에서 그들이 멸절하리라는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합니다. 15절 끝을 보십시오. ‘ 이 아름다운 땅에서 멸절하기까지 하실 것이라’ 16절 끝을 보십시오. ‘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미치리니 너희에게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너희가 속히 망하리라’
‘이 아름다운 땅에서 멸절하리라 ’는 이런 말이 3번이나 반복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는 아름다운 땅 그 자체가 그들의 축복을 보장해주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하면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 땅을 꿈꾸며 광야 40년을 거쳐 이제까지 왔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기만 하면 축복된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정말 그들이 들어 온 땅은 포도 한송이라도 두 사람이 어깨에 메고 운반해야할 정도로 아주 비옥한 축복의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그들과 함께 우상숭배에 빠지면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 이스라엘 민족은 이런 배교 배반의 역사를 거듭하다가 앗시리아, 바벨론 제국에 의해 멸절되고 말았습니다. 역사는 이를 아주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좋은 환경만 구비되면 행복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번다거나 좋은 직장을 얻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대학, 좋은 학점, 좋은 집, 건강한 자녀들 이런 것만 구비되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결혼을 잘하면 인생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런 것이 우리 행복에 도움이 안되는 것은 아닙니다. 가난해서 배고픈 것은 고통입니다. 그래서 누구든 눈물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았으면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말이 있기까지 합니다. 확실히 배고프지 않은 것은 축복입니다. 그러나 누구든 이 모든 것이 구비되었어도 하나님을 떠나고 말씀을 버리고 우상숭배를 할 경우 반드시 망하고야 맙니다. 우리는 우리의 진정한 축복은 이런 외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제로부터 온다고 믿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경외하며 이를 힘써 지켜나갈 때 거기 우리 영혼의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존재로서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비로소 자기 존재의미와 참 가치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을 믿을 때 우리는 그의 전능하신 능력과 함께 범사에 그의 보호하심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인생을 승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잘 살 수 있는 외적 환경을 구하기에 앞서 먼저는 세상 가치관을 경계하고 먼저 주의 말씀에 기울이며 이를 따라 하나님께 대한 절대신앙과 분명한 영적 가치관을 확립해야합니다. 그것이 축복으로 가는 길입니다. 물론 우리가 말씀 중심으로 살며 말씀을 온힘을 다해 지키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고자 할 때 주변 사람과 원수가될 수도 있습니다. 미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 당연한 것입니다. 미움을 받는 정도가 아니라 좀 더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싸워야 합니다. 사람들은 불신자들과 관계를 맺으며 좋은게 좋은거다는 식으로 살아가며 적당히 신앙적인 타협을 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누이 좋고 매부 좋고 하는 식으로 살자고 합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신앙이 있는 곳에 싸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태복음 10:34-38)
지금 우리가 접하는 주변 문화는 하나님께 대한 절대성을 무너뜨리는 가나안 문화들입니다. 우리 시대는 다원화 시대입니다. 포스트모던 시대입니다. 우리 시대의 문명은 반기독교 적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께 대한 절대 믿음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상대적이기 때문에 기독교의 하나님도 상대적이고 예수님도 상대적입니다. 이런 시대에는 피차간에 적이 되질 않습니다. 너도 옳고 나도 옳다. 나도 너를 인정한다, 그러나 너도 나를 인정해야 합니다. 특정 종교 이야기를 해서 안됐습니다만 천주교, 불교 등이 이미 같은 레벨 상에서 서로 똑같이 인정하고자 합니다. 천주교에서는 해마다 사월 초파일에 ‘부처님의 탄생을 축하합니다’하고 불교에서는 성탄절 때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합니다 하고 말합니다. 지난해 한 성탄극이 기독교와 불교를 믹스해만든 것을 보았습니다. 내용인즉 성탄절에 한 동자승이 교회에 가서 아기 예수님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수녀가 타고 가던 자전거에 비구니를 태워주는 광고는 종교간의 대화합의 상징이 된 광고입니다. 그것은 불교나 기독교나 다 같다는 것입니다. 거긴 진리는 가리워진체 인간의 화합만 있습니다. 사람들을 이런 광고를 보면서 결국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생각하기보다 세상이 원하는 쪽으로 생각하게 만듭니다. 요즘 대중매체에서의 동성애는 이제 일반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불과 10년 전 쯤만해도 우리나라에서는 동성애자들이 발붙이기 어려웠지만 인터넷 등 매체가 발달되면서 이제 동성애자들을 본격적으로 coming out 하고 떳떳하다는 듯 행합니다. 그리고 많은 인본주의자들이 그것 아주 용감했다며 격려의 박수를 보냅니다. 우리나라의 영화 ‘왕의 남자’는 동성애를 기본적으로 깔고 있는 영화라고 합니다. 이런 것들이 감성적인 방법으로 처리되면서 이제 동성애도 영화만 좋으면 다 괜찮은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즘에 예쁜 남자가 되고자 성형수술하는 남성들의 수가 늘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어떤 연극 감독은 배우들에게 제대로 된 연극배우가 되려면 동성해도 해봐야한다는 말까지 합니다. 이런 만큼 이제 동성애자도 성직자로 임명 받기도 합니다. 동성애는 반드시 돌이켜야할 하나님 앞에 죄입니다. 동성애는 여러 가지 죄 중에 하나가 아니라 창조 매카니즘과 그 질서를 깨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가 ‘하나님은 없다’라는 식으로 하나님까지 깨고 비웃는 아주 욕된 타락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사실 우리가 오랫동안 말해왔던 고리타분한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고리타분하게 여기는 그 때 우리는 망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계속해보겠습니다. 유부녀가 애인을 갖는 것. - ‘엄마에게 애인이 있어요’하는 드라마가 나온 이후 이젠 정말 이런 류의 애인이 유행입니다. 이제 사람들은 기혼자들이 혼외 애인을 갖는 것을 하나의 낭만으로 여깁니다. 얼마 전 ‘애인’이라는 영화 광고가 많은 버스에 그려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내용은 결혼을 며칠 앞둔 여자가 어쩌다 만난 남자와 눈이 맞아 정사를 벌이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재미있어하고 이런 영화에서 짜릿함을 느낍니다. 우리가 이런 것들과 친근히 하면서 변합니다. 엄청 변화됩니다. 사고가 확 전환됩니다. 이혼 이야기를 해볼까요? 신일중학교 교사이신 서바나바 목자님 이야기에 의하면 한반 35명 학생 중 부모가 이혼한 아이들이 많으면 10명, 적으면 5명이라고 합니다. 이혼이 유행이 되었습니다. 상대방이 그냥 마음 좀 안들면 자식들이야 어떻게 되는 이혼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기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심지어 믿는 사람들도 좀 살기 힘들면 회개할 생각을 하기보다 이혼하고자 합니다. 제가 얼마 전 핸드폰을 바꾸었는데 과거 핸도폰과는 달리 이상한 메일이 많은 옵니다. ‘ 오빠, 외로워요’, ‘ 화끈한 동영상 보여줍니다.’ 이런 류의 메일이 자꾸 옵니다. 그러지 않아도 이 메시지 바로 이 부분을 쓰는데 제가 한 전화가 와서 받아 보았습니다. 제가 ‘여보세요’ 하는까 ‘나 심심해~ 화끈한 대화를 원하시면 통화버튼을 눌러주세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며칠전 경향 신문에 ‘ 이, 음란한 세상’ 이란 제목의 1면 기사가 있었는데 여자들이 인터넷 화상 체팅을 통해 자기 몸을 보여주면서 돈받는다고 합니다. 그것도 여대생들이 말입니다. 인터넷 portal 싸이트가 뜨자자마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연예인 **가 옷을 벗었다. 집단 누드사진. 세상 도처에 이런 것들이 깔려있습니다. 한마디로 저주의 자식들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정말 크게 힘써 우리자신을 잘지키고 양들과 우리들의 2세들을 깨어 잘 지켜야하겠습니다.
교회 안에 파고 들어오는 음란한 행위들, 참 무섭게 파고 들어오고 있습니다. 우상숭배와 제멋대로 하는 동성애, 제멋대로 하는 이혼, 제멋대로 즐기는 정욕은 노아 홍수 시대의 멸망직전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말이 고리타분 하다고 여겨지면 그런 사람은 성경 없이 살겠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대중매체들, 영화들, 그리고 인터넷- 이런 것과 친근하면 안됩니다. 거기 어느 틈에 하나님을 망각하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비웃으며 이를 아주 자연스럽게 여기는 내용들이 가득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TV 보고 광고 보는 것은 예배드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것이 하나님이 된다는 이야기 같습니다.
‘너희가 필경은 너희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땅에서 멸절하리라’ 우리나라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아주 잘먹고 잘살고 있습니다. 여전히 빈부의 격차로 가난에 고통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지만 우리 나라 국민 일인당 소득은 16,000 달라에 달하고 어느덧 대만의 국민 소득들 앞질렀습니다. 잘살게 되었습니다. 부인할 수 없습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각종 점보기, 사주팔자보기, 우상숭배, 각종 음란 문화가 넘치며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조금도 없습니다. 어떤 국회의원이 여기자 성희롱을 하였는데 취중에 일어난 일라며 그를 두둔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술만 마시면 무슨 일을 해도 면죄부를 받을 수 있는 그런 시대 속으로 들어온 것 같습니다. 이런 식이라면 우리도 하나님이 축복해주신 이 아름다운 땅에서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하고 애국가를 부르는데 그것 아무리 불러도 회개하지 않으면 이 화려강산에서 멸망하고 말것입니다. “ 만일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을 범하고 가서 다른 신들을 섬겨 그에게 절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미치리니 너희에게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너희가 속히 망하리라”(16)
III. 이스라엘을 결단시키는 여호수아(24장)
이제 24:1을 보십시오. 이어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지파들 모두와 장로들과 그 두령들, 재판장, 유사들을 다 불러 세겜에 모이도록 했습니다. 세겜은 에발산과 그림신산 사이에 위치해 있습니다. 또한 야곱이 결단하고 자기 중에 있던 이방신상을 땅에 묻고 벧엘로 올라가 엘벧엘의 신앙 곧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출발한 곳입니다. 이런 점에서 세겜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사실 여호수아가 이들을 이곳에 부를 때 그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 살면서 이미 이방신상을 가지고 우상숭배하기 시작한 것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곳에 그들을 불러 도전하고 그들 중에 이방신을 제거하고 결단시키고자 한 것입니다. 이를위해 그는 무엇을 했습니까?
첫째로 역사교육을 시켰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그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옛적에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의 아비 데라가 강 저편에서 다른 신을 섬겼던 것을 시작으로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가나안 땅을 약속의 땅으로 주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이후 출애굽과 광야 40년의 이야기, 가나안 원수들을 치고자 할 때 왕벌을 미리 보내셔 하나님이 친히 싸우신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그 땅을 차지하게 하셨으며 그들이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원의 과실을 먹게 하셨음을 말했습니다. 여호수아의 이 기다란 역사 교육의 포인트는 결국 하나님이 그 전능하심과 일방적 은혜로 그들을 축복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이스라엘이 이 하나님께 대해 어떤 자세를 가져야합니까?
둘째로 이 하나님께 대해 분명한 결단을 촉구했습니다. 14절을 읽어보겠습니다. “ [14]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 너희의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 그리고 15절에서 그들의 결단을 촉구합니다. 15절을 보십시오. “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 지도자가 이렇게 “ ...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 하고 먼저 자기 결단을 분명히 말하면 어떻게 될까요? 이제는 그들도 마음을 정해야합니다. 결단하고 선택해야합니다. 인생은 선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앙도 선택입니다. 누구를 택할 것인가. 우상의 신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선택할 것인가? 우리도 선택해야합니다. 세상 물질을 믿고 살 것인가 하나님을 믿고 살고자 할 것인가, 자기를 기쁘게 하는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자 하는 삶을 살 것인가, 자매를 택할 것인가 예수님을 택할 것인가. 잠간의 이세상 쾌락을 좇을 것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고난을 택할 것인가? 무리로서 살 것인가 제자로서 살것인가? 이런 선택에는 양다리 걸치는 것이 없습니다. 꿩도 먹고 알도 먹는 식의 양다리 걸치기는 없습니다. ‘ 지금 말고 나중에 잘하지 뭐’하는 식의 말도 없어야합니다. 자기에게 예수님을 믿을 나중이 있는지 어떻게 압니까? 저는 어제 코미디언 김형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김형곤은 제가 왕십리 살 때 바로 아래 아래 집에서 살며 나를 형 형하고 부르던 사람이었습니다. 얼마전까지 살도 빼고 건강을 자랑하며 살빼기 방법을 가르치며 사람을 웃기더니 정말 어느날 갑자기 눈깜빡 사이에 죽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 너희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이제 이런 분명한 신앙적 선택과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결단할 때 우리 마음의 죄악된 요소가 놀라 떠나가고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분명해집니다. 거기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켐벌 모건이라는 목자는 은퇴 석상에서 평생 설교한 체험을 회고하며 “ 설교하기 가장 힘든 회중은 잘 듣는 것같지만 신앙생활에 변화가 없는 회중이다. ” 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형식화된 교인, 듣기만하고 헌신이 없는 교인, 미지근한 상태에 머물러 변화가 없는 교인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말씀에 따라 하나님 앞에서의 결단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단이 분명한 사람은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받습니다. 구세군의 창설자 윌러엄 부스는 죽기 수개월 전 한 사람이 그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그토록 긴 세월 동안 주님의 종으로서 변함없이 알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입니까? ” 그러나 대답했습니다. “ 비결 같은 것은 없습니다. 나는 날마다 하나님께 ‘나의 모든 것은 주님의 것이다 마음대로 써주십시오. 하고 기도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헌신이고 결단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거룩한 백성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입니다. 이런 우리가 세상 쾌락도 즐기면서 하나님도 적당히 섬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단해야합니다. 결단을 하되 작은 결단부터 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작은 결단이 큰 일을 이룹니다. 그것이 어떤 결단이든 상관 없습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주님 앞에 드리는 작은 결단은 주께서 내 인생에 들어오시고 능력으로 역사하실 수 있는 통로가 됩니다. 새벽기도의 결단. 매일을 못해도 일주 몇번이라도 좋습니다. 어떤 사람은 일주일에 피싱 몇 번, 혹은 어떤 모양으로 성경 읽기의 결단 등 이런 작은 결단을 할 때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identity가 확립됩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세상을 싸워 이길 힘을 얻습니다. 이만큼 결단은 그 사람을 하나님 앞에서 분명하게 하므로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이렇게 ‘ ... 너희의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 하며 도전한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24:16절을 보십시오. ‘ 백성이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 섬기는 일을 우리가 결단코 하지 아니하오리니 ’ 이들도 ‘결단코’하며 결단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들 가운데 이루신 모든 일을 생각하며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을 영접한 것입니다. 18b를 보십시오. “ 그러므로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리니 그는 우리 하나님이심이니이다. ” 이는 신앙고백이었습니다. 그러자 여호수아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셋째로, 여호수아는 그들 중에 이방신을 다 제하여 버리게 했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그는 백성들이 여호와를 섬기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질투하시는 하나님, 허물과 죄를 용서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그런 너희를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나는 너희들의 결단을 못믿겠다 너희는 원래 악하지 않느냐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백성들은 황급하게 대답했습니다. “아니니이다 우리가 정녕 여호와를 섬기겠나이다.” 그러자 여호수아가 그들의 대답을 확인합니다. “ 너희가 여호와를 택하고 그를 섬기리라 하였으니 스스로 증인이 되었느니라” 그러자 그들은 ‘우리가 증인이 되었나이다’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여호수아가 결정타를 날립니다. 23절을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 여호수아가 가로되 그러면 이제 너희 중에 있는 이방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너희 마음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향하라” 이는 너희 조상 야곱이 결단하고 이방 신안을 땅에 묻어 제하고 벧엘로 올라간 것처럼 너희도 그렇게 이방신들을 제하고 여호와께로 온전히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그들 중에 이방신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가나안 들어온지 시간은 좀 지나자 그들이 어느 틈에 토속신들에게 절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 패역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이렇게 긴 역사 교육을 시키고 도전하며 이 이방신을 제하게 한 것입니다.
백성들이 결단하자 그는 그들 앞에서 다시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베풀었습니다. 그는 또 큰 돌을 취하여 여호와의 성소 앞 상수리나무 아래에 세우고 모든 백성에게 일렀습니다. “ 보라 이 돌을 이 우리의 증거가 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하신 모든 말씀을 이 돌이 들었음이라 그런즉 너희로 너희 하나님을 배반치 않게 하도록 이 돌이 증거가 되리라 ”
우리도 이들과 같이 분명한 결단을 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여러분들도 이제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분만을 섬기기로 결단합니까? 저도 저의 가족과 함께 오직 여호와 한분만을 섬기겠습니다. 하나님 앞에 결단이 없는 시대 오늘 우리가 아멘으로 응답했음을 우리가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쎈타 2층 홀 벽이 그 결단의 대답을 다 들었습니다. 저기 있는 검은 피아노가 다 들었습니다. 그들이 마지막 때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결단을 증거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가 충만한 시대 우리로 모두를 당신의 백성 삼으신 것을 감사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각 사람을 양들의 목자로 부르심을 감사합니다. 우리 시대는 한명의 목자가 없어 인생을 방황하고 저주하고 한강으로 뛰어내려 자살하고 아파트에서 뛰어내리며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떻게 살지 몰라 술에 취해 거리를 방황하는 젊은이들이 많습니다. 그가 배운 것이 많아도, 부잣집 아들이래도 여전히 인간에게는 목자가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름 목자가 된 것을 감사합니다. 목자로서의 우리 결단과 도전이 우리 시대 캠퍼스의 방황하는 많은 영혼들을 구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 영혼들을 위해 더 많은 목자를 필요로 하십니다. 우리는 지금 금년 100명의 학생제자 양성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 모임의 숫자를 늘리고자 함이 아니요 이 시대 방황하는 젊은이들을 주의 말씀으로 구원하고자 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어 내년 이즈음에 또 100명의 young shepherd 가 선서하고 세워지길 기도합니다.
이제 백성들이 돌아갔습니다. 이일 후 여호수아는 일백 십세에 죽어 그가 개척하여 세운 땅 딤낫 세라에 장사되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살아 있는 동안 자기 백성들에게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오늘 본문처럼 도전하고 결단하게도 하였습니다. 그는 전쟁에서는 용맹스러운 장군이었습니다. 그러나 평화의 때에는 하나님의 종이요 백성들의 목자였습니다. 여호수아가 죽고난 뒤 계속 살아있는 장로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하신 일을 기억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애굽에서 가져온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여 그곳을 요셉의 기업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도 죽고 무리와 그의 아들 비느하스가 에브라임 산지에 장사하였습니다.
이로서 여호수아의 대단원의 막이 내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지난 두달 동안 우리 가운데 여호수아서 말씀을 주시고 친히 앞서 가시며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을 배우게 하셨음에 감사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만 믿음으로 구속사에 쓰임받을 수 있음을 배웠습니다. 그동안 ‘ 하나님, 우리는 할 수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하고 고백하며 하나님 앞에 나와 굻어 기도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이 고백을 날마다 할 수있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이제 친히 앞서 가시는 하나님을 여호수아와 같이 담대히 믿고 나갈 수 있길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여호수아와 같은 사자의 심장을 주셔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무엇에든 도전하는 큰 믿음의 용사로 빚어주시길 기도합니다. 또한 세상이 다 하나님을 등진다 해도 ‘나와 내 가족은 오직 여호와만 섬기리라’는 분명한 결단을 가지고 이 시대 죄와 싸우며 생명의 역사를 섬겨나갈 수 있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