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Ⅱ부 제 3 강
참 포도나무 되신 예수님
말씀: 요한복음 15:1-27
요절: 요한복음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오늘 본문은 포도나무 비유로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많이 맺을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포도나무는 꽃이 아름답다거나 나무가 쓸 만한 재목이 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열매가 중요합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도 열매가 중요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는 비결이 무엇인가를 배우고자 합니다.
본문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 집니다. 1-8절은 예수님과 제자의 관계에 대해서, 9-17절은 제자 상호 간의 관계에 대해서, 18-27절은 제자들이 세상에 대해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Ⅰ. 내 안에 거하라(1-8)
1절과 5a절을 보십시오.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이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를 잘 말해주는 아름다운 시적 표현입니다. 이 삼자의 관계는 트리오와 같이 서로 뗄래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입니다. 이 관계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생명의 관계로서 살아있는 연합이요, 사랑의 연합이요, 영원한 연합입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은 포도원이요 하나님은 그 포도원을 가꾸는 주인임을 말하고 있습니다(사5:1-7).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주인이실 뿐만 아니라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로서 온 세상의 주인이 되십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포도원이요 하나님은 그 포도원을 가꾸는 농부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그 포도원에 심으신 참 포도나무요 제자들은 그 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왜 참 포도나무라고 했을까요? 이는 예수님만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생명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유일한 포도나무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만이 모든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있게 하시는 완전한 포도나무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이 말씀에서 우리는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와 열매를 맺는 두 종류의 가지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나무와 연합이 잘못된 가지로서 병든 가지이거나 죽은 가지입니다. 이런 가지는 아무 쓸모가 없음으로 농부는 가차없이 잘라 버립니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농부가 원하는 것은 가지의 아름다움이나 무성한 잎이 아니라 열매입니다. 농부이신 하나님은 가지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끊임없이 손질하며 오래 참으십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와 같이 끝내 회개치 않을 때 잘라 버리십니다. 이스라엘도 예수님을 생명의 구주로 영접치 않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장 나라로서 열매를 맺지 않았을 때 구속역사에서 제해 버리셨습니다. 하나님은 열매 없는 개인이나 모임이나 민족은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반면 열매맺는 가지는 어떠합니까? 열매맺는 가지가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깨끗케 해야 됩니다. 2b절을 보십시오.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열매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가차없이 잘라 버리시지만 열매 맺는 가지는 아주 귀히 여기시고 섬세히 가꾸십니다. 농부가 원하는 것은 극상품 포도 열매입니다. 극상품 포도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반드시 깨끗케 하는 전정작업이 필요합니다. 전정은 잔가지를 잘라주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새싹이 나기 전부터 시작해서 열매를 맺기까지 끊임없이 해 주어야 합니다. 포도나무는 잔가지를 많이 내기 때문에 전정을 하지 않으면 영양분이 분산되어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농부는 좋은 열매를 얻기 위해서 열매 맺을 수 있는 가지도 아깝지만 잘라 버립니다. ‘깨끗케 한다’는 말은 헬라어로 ‘카다이로’(καθαιρω)인데 이는 시련을 통해서 연단시키고 성화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깨끗케 하는데는 고통이 따릅니다. 그러나 고통이 없이는 결코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시련을 주십니다. 열매 맺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여러 가지 훈련을 주심으로 깨끗케 하십니다. 하나님은 가난이나 질병이나 교통사고나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과 같은 여러 가지 시련을 통해서 우리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세상적인 생각을 다 잘라버리시고 우리의 믿음을 순수케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산소망을 간직한 영적인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쓰신 믿음의 사람들은 한 사람도 예외없이 여러가지 시련을 통해 깨끗케 된 자들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어떻게 깨끗하게 하셨는가를 말해 줍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제자들의 모습은 인간적이고 세상적이고 내면이 천박하지만 사도행전에 나타난 사도들의 모습은 영적으로 성숙한 믿음과 기도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변화된 것은 예수님께서 3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으로 끊임없이 그들을 깨끗케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깨끗케 하신 것을 보면 초기에는 인간적인 정이나 좋지 못한 습관을 끊도록 하셨습니다.(막3:33-35, 6:1-4, 7:1-4) 그 후에는 제자들의 마음 가운데 자라난 인간적인 야심이나 꿈의 잔가지를 치셨습니다. 제자들은 과거에는 위대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을 때 그들은 꿈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들 내면에는 예수님 안에서 과거 실패를 만회하여 몇 세기만에 나오는 위대한 목자가 되고자 하는 욕심의 잔가지들이 자라나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문에 그들은 틈만나면 누가 크냐 하며 다투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는 말씀과 또한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는 말씀 등 여러 말씀을 주심으로 그들을 깨끗케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그들은 거룩한 소원을 가진 영적인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포도나무의 잔가지는 빨리 자랍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마음에도 교만의 잔가지, 정욕의 잔가지, 욕심의 잔가지 등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잔가지들이 쉴 사이 없이 자라납니다. 또한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 같은 보기에 좋은 잔가지들도 많이 자라납니다. 그러나 격언에 “The better is the enemy of the best"라는 말이 있듯이 이런 것들은 가장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는 원수들입니다. 잔가지들은 반드시 전정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극상품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진리의 말씀으로 깨끗케 하셨습니다. 우리가 꾸준히 말씀을 공부할 때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의 가위로 깨끗케 해 주십니다.
둘째, 예수님의 말씀 안에 거해야 합니다. 4,5절을 보십시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니라.” 4-8절에서 ‘거하라’는 단어가 무려 8번이나 반복해서 나옵니다. 이는 그 안에 거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말해 줍니다. ‘그 안에 거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영적인 연합을 의미합니다. 매사에 예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 중심의 삶을 살므로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생각하고 계획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행동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생활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데 열매 맺기 위해 눈물겨운 투쟁을 하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하지 않고 자기 열심과 노력으로 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별 노력도 하지 않는 것 같은데 열매를 잘 맺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는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는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 붙어 있고자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면 자연히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7a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이 말씀은 그 안에 거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그 말씀 안에 거하는 것임을 말해 줍니다. 이는 말씀을 굳게 붙잡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죄의 탁류가 넘실거립니다. 세상은 음란하고 불의합니다. 물질적이고 육신적입니다. 또 우리의 내면에도 죄의 소욕이 늘 용솟음칩니다. 우리가 말씀을 굳게 붙들지 아니할 때 죄의 소욕에 삼키운 바 되고 거센 죄의 탁류에 떠 내려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씀을 굳게 붙들 때 말씀이 주는 힘으로 승리의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말씀 안에 거한다는 것은 계속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이는 학창시절 뿐만 아니라 졸업 후에도 거하고 일생동안 거하는 것입니다. 가지가 기분이 좋을 때는 붙었다가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떨어져도 안됩니다. 가지는 계속해서 나무에 붙어 있어 끊임없이 영양분을 공급받아야 살 수 있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있었던 사건인데 9살 난 소년이 병원에서 인공심장을 부착한 채 죽어 있었습니다. 이를 조사해 본 결과 어떤 사람이 인공심장으로 힘을 전달해 주는 전기 플러그를 부지중에 빼버린 것이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리스도와 관계성이 단절되면 영적 생명을 잃어 버리게 됩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는 것이 따분하고 얽매이는 것 같아서 벗어나게 되면 일시적으로는 자유로운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얼마 못가 생명력을 상실하고 말라 비틀어지게 됩니다. 내면의 자유와 기쁨을 잃고 심령이 곤고해 집니다. 결국에는 아무 쓸모없이 되어 불쏘시개감이 되어 버립니다(6). 그러므로 나는 가지로서 포도나무되신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영양분을 공급받기에 힘써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라”는 말씀을 골 2:6,7절에서 “그 안에 뿌리를 박으라”는 사상으로 더 발전시켰습니다. ‘그 안에 뿌리를 박으라’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초로 흔들릴 수 없는 인생관과 가치관을 확립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안에 뿌리를 박은 자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이 때를 따라 열매를 맺으며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과 같습니다. 이런 자는 그 내면에 늘 감사와 은혜가 넘치고 그 행사가 다 형통합니다.
셋째, 말씀에 기초해서 기도해야 됩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7). 말씀 없이 기도하면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므로 욕심에 기초해서 기도하게 됩니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을 달라고 일방적으로 청구서만 내밀기 쉽습니다. 이런 기도는 하나님께서 진절머리가 나서 응답해 주시지 않습니다. 기도를 응답 받으려면 말씀 안에 거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 안에 거하고 말씀에 기초해서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기도하면 다 응답해 주십니다. 이때 우리는 내적 외적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어떻게 됩니까? 8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첫째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됩니다. 자식이 공부를 잘하여 상장을 타게 되면 부모에게 영광이 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가 열매를 많이 맺게 되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됩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제자로 인정받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된 특징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이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와 같은 내적 열매요(갈5:22), 또한 말씀 전파를 통해 얻는 외적인 생명의 열매입니다. 내적 열매를 맺게 되면 자연히 외적 열매도 맺을 수 있게 됩니다. 또한 외적 열매를 맺으려고 애쓰는 과정에서 내적인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열매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사랑의 열매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Ⅱ. 서로 사랑하라(9-17)
9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안에 거하라.” 예수님은 아버지의 사랑을 덧입고 아버지의 사랑으로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 사랑을 먹고 성장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계속해서 성장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자신을 희생제물로 내어주신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한다는 것은 이 사랑을 영접하고 어떤 경우에나 그 사랑을 의심치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건강하고 일이 잘 풀릴 때는 주님의 사랑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몸이 아프거나 일이 잘 안풀릴 때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왜 이런 어려움을 주시는가 하며 사랑을 의심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부딪히는 여러가지 시련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련을 통해서 주님과 사랑의 관계성을 더욱 견고히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숱한 고난을 많이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떤 경우에나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므로 승리의 찬가를 부를 수 있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5-37)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게 될 때 우리의 내면에 사랑의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에 역사하는 모든 미움과 분노가 눈 녹 듯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그때 우리의 심령은 기쁨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의 사랑에 거할 수 있습니까? 10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계명을 지킴으로 그의 사랑 안에 거하신 것 같이, 우리도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면 그의 사랑 안에 거할 수 있습니다. 그의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12). 우리가 예수님의 계명에 순종하여 서로 사랑할 때 예수님의 기쁨이 우리 안에 있어 충만하게 됩니다. “와! 충만한 기쁨을 누릴 수 있다니!” 이는 실로 놀라운 일입니다. 아무도 예수님의 사랑을 알기 전까지는 만족할 수 없고 참된 기쁨을 누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계명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의 사랑 안에 거할 때 사랑 안에서 성숙하게 되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참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랑은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친구 삼으시고 바로 그들을 위해 자신의 고귀한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종은 주인의 뜻을 알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순종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친구는 주인의 비밀을 알고 기쁨으로 동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종으로 삼지 않으시고 친구로 삼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명하는대로 행하게 되면 예수님의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14). 이때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어 하나님의 역사를 기쁨으로 자발적으로 섬길 수 있습니다(15).
16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스스로 예수님을 택했다고 할 때 내가 실수하게 되면 잘리지 않을까 불안하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권 가운데서 나를 택하여 세웠기 때문에 그 택하심은 확실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택하셨기 때문에 책임지십니다. 내가 비록 실수를 했다 할지라도 주님의 부르심은 변개함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주권적으로 나를 택하신 것은 온전한 은혜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것은 가서 열매맺는 복된 삶을 살도록 함입니다.
Ⅲ.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18-27)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이 세상에 대해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해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게 되면 자연히 많은 열매를 맺고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세상으로부터 핍박도 받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그들과 같이 죄악된 삶을 살지 않고 성별된 생활을 하기 때문에 미워하고 핍박합니다. 이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바가 무엇입니까? 18절을 보십시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로 알라”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미워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예수님을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과 적대관계에 있기 때문에 신자들의 세상과의 전투는 불가피한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속하지 않고 예수님께 속했기 때문에 당연히 핍박을 받습니다. 세상과 타협하며 적당히 신앙생활하고자 할 때 핍박을 받지 않지만 의롭고 경건하게 살고자 하면 반드시 핍박을 받게 됩니다.(딤후3:12) 그런데 핍박은 우리를 못쓰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에게 유익을 줍니다. 핍박은 강한 바람과 같습니다. 강한 바람이 불면 어린 나무는 이리저리 흔들립니다. 그러나 나무는 바람 때문에 더욱 깊이 뿌리를 내리고 거목으로 자라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우리를 핍박만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또 우리가 전하는 말씀에 순종하는 자도 있습니다(20b).
사람들이 우리를 핍박하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영적 무지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모든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기 때문에 저희는 죄를 핑계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미워하는 것은 바로 아버지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이는 아무 까닭없이 괜히 미워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핍박을 받을 때 조금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보혜사는 진리의 성령으로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을 증거해야 합니다. 우리는 대적이 심한 세상에서 핍박 받고 움츠러들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증거하는 생활을 해야 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과거 하나님을 떠나 쓸모 없는 들포도를 맺고 결국에는 심판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참 포도나무되신 예수님께 접붙인 바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힘써 해야 할 일은 가지로서 참 포도나무되신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거함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를 많이 맺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