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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15:22-18:27(광야 훈련)

by Mark Yang   08/14/2019   Exodus

Message


출애굽기 제 6 강
광야 훈련
말씀: 출애굽기 15:22-18:27
요절: 출애굽기 16:4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우리는 지난 강의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크신 능력으로 홍해를 건넌 것을 배웠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하고 기쁨이 충만하여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후 그들은 완전히 자유의 몸이 되어 신천지를 향해 소망찬 발걸음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 이르기까지 광야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여기에는 이스라엘의 뿌리 깊은 노예근성과 이들을 오래 참으시고 훈련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제사장 나라로 쓰시기 위해 광야에서 기초부터 훈련하셨습니다. 이는 일용할 양식 먹는 훈련과 안식일 지키는 훈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쓰실만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일용할 양식과 안식일의 중요성을 깨닫고 하나님이 쓰실만한 내면성 있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치료하시는 하나님(15:22-27)

이스라엘은 믿음으로 홍해를 건넌 후 승리의 기쁨이 충만하여 시를 쓰고 춤을 추며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그러나 이 승리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그들의 입에서 불평과 원망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들이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사흘 길을 행하였으나 물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라에서 겨우 물을 발견했는데 이제는 써서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사흘 동안은 물이 없어도 믿음으로 잘 견딜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인 어려움에 부딪치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노예근성이 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모세를 대하여 “무엇을 마실까” 하며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원망하는 것을 볼 때 그들이 제사장 나라로 세움받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함을 보게 됩니다.
이에 모세는 어떻게 했습니까? 백성들로 하여금 다른 곳에서 우물을 파도록 하였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막막한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셨습니다. 모세가 그 나무를 물에 던지자 쓴물이 달아졌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지시하신 한 나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상징합니다. 세상은 죄로 인해 씁니다.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는 미움, 불신, 원망, 저주, 복수심 등 쓴 뿌리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래서 입을 열었다 하면 욕설과 불평불만이 튀어나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죄로 인해 생겼기 때문에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쓴물을 달게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원망을 감사로, 미움을 사랑으로 불신을 신뢰로,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어 놓는 위대한 능력이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벧전 2:24).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의 모든 내면의 고통을 치료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다가 마음이 쓰리고 아플 때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 모든 마음의 고통이 사라집니다. 또 사람들로부터 마음의 상처를 받고 쓴 뿌리가 생길 때 십자가를 바라보면 위로와 은혜와 사랑을 덧입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쓴물을 달게 하신 것으로만 끝나지 않으셨습니다. 거기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셨습니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의를 행하며 말씀을 지켜 행하면 애굽 사람에게 내린 질병을 하나도 내리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들을 치료하시는 여호와이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볼 때 건강하고 축복된 인생을 살 수 있는 비결은 보약을 먹고 몸을 잘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순종하는 생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요사히는 젊은 나이에 암에 걸려 죽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육신의 병 뿐만 아니라 정신 질환으로 고통하며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람의 행복은 영육간에 건강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을 순종하며 믿음으로 살 때 하나님은 영육간에 우리의 모든 질병을 치료하사 건강하고 행복한 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27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엘림에 이르자 거기 물 샘 열둘과 종려 70주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맑은 생수를 풍성히 허락해 주심으로 광야에서 새 힘을 얻어 순례길을 가도록 하셨습니다. 여기서 열둘이라는 숫자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가리키고, 70은 이스라엘 70 장로를 가리킵니다. 이곳의 풍성한 물은 항상 흘러 넘치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상징하고, 나아가 장차 그 백성이 들어가 살게 될 낙원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Ⅱ. 일용할 양식을 주신 하나님(16:1-36)

첫째, 은혜의 하나님.
이스라엘이 엘림을 떠나 엘림과 시내산 사이 신광야에 이르렀습니다. 이때는 이미 애굽에서 나온 지 두 달 반이나 되어 양식이 다 떨어졌습니다. 그들은 배가 고팠습니다. 사람이 배가 고프면 소원이 저급해져서 먹을 것밖에 생각나지 않게 됩니다. 그들은 이때 기도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과거 애굽에서 배불리 먹던 때를 회상하며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 이 가운데 내면 문제가 잘 드러났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사랑으로 출애굽하여 그 지긋지긋한 노예생활에서 벗어났습니다. 노예생활은 비참했습니다. 그들은 바로의 종이 되어 감독의 눈치를 보며 중노동을 해야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자유가 없었고 인생의 참된 기쁨이나 미래에 대한 희망도 없었습니다. 한가지 좋은 것이 있었다면 고기 가마 곁에서 떡과 고기를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현재의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비참한 옛 생활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몸은 출애굽 하였으나 마음은 출애굽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자들은 신앙생활 하면서도 항상 불평이 많습니다. 사명인의 십자가가 무겁다고 불평하고 과거 죄악된 옛 생활을 동경하며 헛생각에 빠집니다.
하나님은 원망하는 이스라엘을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4a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보라!’ 이는 감탄사로서 “비 같이 내리는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를 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원망하는 그들을 마땅히 징계하셔야 마땅하셨지만 그들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고 놀라운 은총을 베푸셨습니다(시103:10). 하나님은 그들의 원망을 들으시고 아침에는 만나를 비 같이 내려 주시고 저녁에는 메추라기를 진에 덮이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이것은 실로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만일 그들이 밥을 먹기 위해 농사를 지어 보십시오. 한 사람이 한달 먹는 양이 약 한 말로 잡으면 200만에게는 한달에 20만 가마가 필요합니다. 또 고기를 먹으려면 얼마나 많은 짐승을 잡아야 했겠습니까? 그들이 만일 메추라기를 공기총으로 잡는다고 한다면 하루에 몇 마리나 잡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만나를 하늘에서 비 같이 내려 주시고, 또 동풍을 불게 하사 메추라기가 진에 덮이도록 하심으로 김일성이가 45년이 넘도록 해결하지 못한 쌀밥과 고깃국 문제를 순식간에 해결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를 얻기 위해 삯이나 댓가를 지불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온전히 은혜로 주신 선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사 그들이 광야에서 굶주리지 않도록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만나를 며칠 동안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16:35절을 보면 그들이 가나안 땅에 이르기까지 40년 동안을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내려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40년 동안 날마다 필요한 것을 채워 주심으로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원망을 들으시고 일용할 양식을 주신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은 이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못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너무 막막하여 광야에서 영락없이 굶어 죽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을 인도해 준 목자를 원망했습니다. 모세는 8절 하반절에서 그들이 목자에게 하는 원망은 곧 하나님께 원망하는 큰 죄임을 지적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공중의 새도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도 입히시는 하나님께서 하물며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마태6:26,30)?
우리를 위해 사랑하는 독생자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 주신 하나님께서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않으시겠습니까(롬8:32)? 우리가 다만 받지 못하는 것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믿음으로 구하지 않고 정욕에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야고보 4:2b,3). 우리는 먹고 마시는 가장 기본적인 현실 문제에서부터 하나님이 친히 해결해 주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지 아니할 때 먹고 마시는 현실 문제에 얽매여 심령이 어두워지고 불신에 빠져 하나님을 배반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들에게 양식을 주실 때 한꺼번에 주지 않으셨습니다. 날마다 1인당 한 오멜씩 필요한 일정량만 주시고 거두게 하셨습니다. 많이 거두어도 남는 것이 없고 적게 거두어도 부족함이 없도록 주셨습니다. 이는 욕심을 부리지 않고 매일 매일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살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는 먹을 양식이 많으면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 양식을 더 의지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제 6일에는 각 사람이 갑절을 거두도록 하심으로 거룩한 안식일을 예비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들이 평소에는 만나를 아침까지 남겨 두면 냄새가 났지만 안식일에는 냄새도 나지 않고 벌레도 생기지 아니하였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안식일을 거룩히 구별하여 지키도록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을 배우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양식을 거두는데 있어서 백성들의 내면 문제가 나타났습니다. 16:20절을 보십시오. 모세는 양식을 아침까지 남겨 두지 말라고 하였는데 그들은 모세의 말을 청종치 않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습니다. 그러자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났습니다. 이들이 아침까지 남겨 둔 것은 혹시 내일은 굶어 죽지 않을까 하는 염려와 불안 때문이요 이는 근본적으로 불신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또 27절에서는 안식일에도 양식을 거두러 나갔다가 허탕치고 돌아왔습니다. 이들의 문제는 탐심입니다. 모세는 이들의 불신앙을 심하게 책망했습니다(29).

둘째, 만나를 주신 뜻.
그러면 하나님께서 40년 동안 날마다 만나로 이스라엘을 먹이신 뜻이 무엇입니까? 16:4b절을 보십시오.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하나님은 이들이 중심에서 말씀을 순종하는가 알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시험의 근본 의도는 그들을 징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깊은 은혜와 사랑을 깨닫고 믿음으로 살도록 훈련하는데 있었습니다. 신명기 8:2,3절에 보면 그 근본 의도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결국 하나님께서 만나를 먹이신 것은 그들이 육신과 감정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게 하심이었습니다. 사람은 짐승과 달리 떡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은 영을 소유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때 비로소 인생 다운 인생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이상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심으로 두 가지 훈련을 시키셨음을 보게 됩니다. 첫째는, 일용할 양식을 먹는 훈련이요, 둘째는, 안식일을 지키는 훈련입니다. 이는 가장 기본 생활을 잘 하도록 하는 훈련입니다. 이것은 노예백성 이스라엘에게는 꼭 필요한 훈련이었습니다. 노예들의 특징은 기초가 없고 규모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인간의 기본적인 훈련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감정과 욕심을 절제할 내면성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감정과 정욕대로 행했습니다. 이들은 마치 배고프면 울며 보채는 어린아이와 같았습니다. 그들은 먹고 싶을 때는 왕창 먹고 먹고 싶지 않을 때는 굶었습니다. 그들은 기분대로 살았습니다. 그들은 생활에 규모가 없고 신실하지 못했습니다. 한마디로 이들은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들에게 큰 희망을 두셨습니다. 그 희망은 그들이 영광스러운 백성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희망이 위대하셨기 때문에 훈련도 위대하였고 철처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큰 희망 가운데 이들이 매일매일 규칙적으로 일용할 양식을 거두고 안식일을 지키게 함으로 기초를 쌓도록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그들 내면에 있는 불신과 욕심과 불평하고 원망하는 죄악된 습관을 하나 하나 뿌리 뽑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기본 훈련을 통해 그들을 쓰실 만한 백성으로 연단 시키셨습니다. 훈련시키는 사랑은 가장 큰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날도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 훈련과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훈련을 시키고 계십니다. 이 두 가지는 신자의 기본 생활입니다. 이 두 가지를 잘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쓰실 만한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안일과 적당주의, 감정과 욕심대로 행하고자 하는 노예근성이 있습니다. 이 노예근성 때문에 잘 나가다가도 넘어지고 자신에 대해 절망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절망하지 않고 넘어질 때마다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께 나아가 일용할 양식을 먹고 안식일을 절대적으로 지키고자 노력할 때 때가 되면 내면이 성숙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한술 밥에 배부르지 않듯이 한번의 일용할 양식으로 단번에 성장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꾸준히 일용할 양식을 할 때 자신도 모르게 내면이 강한 자로 성장하게 됩니다.

그러면 일용할 양식을 어떤 자세로 먹어야 합니까?
첫째로, 날마다 규칙적으로 먹어야 합니다. 한꺼번에 며칠씩 먹거나 ‘주용할 양식’으로 먹을 때 영양실조에 걸려 영적으로 잘 자라나지 못하게 됩니다. 신앙 상태가 좋지 않은 사람을 보면 일용할 양식을 꾸준히 먹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용할 양식을 규칙적으로 잘 먹는 사람은 은혜의 살이 쪄서 은혜가 있고 감사가 있습니다. 사람이 건강하게 되는 비결은 특별히 보약을 먹는데 있지 않고 규칙적으로 식사하고 규칙적으로 운동하는데 있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은 정열이 넘쳐서 식사를 불규칙적으로 하여서 학생시절에 장염으로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그런데 선교사로 가서도 기분 내끼는 대로 식사를 하여서 마침내는 병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가 건강하게 되는 비결은 규칙적으로 식사하는 것입니다. 요사히 규칙적으로 음식을 먹는 훈련을 통해서 2kg이나 몸무게가 늘고 건강해졌습니다.

둘째로, 아침 일찍 먹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만나를 아침 이슬과 함께 주셨습니다. 아침 해가 떠 올라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면 다 없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일용할 양식은 해뜨기 전, 아침 일찍 먹어야 함을 보게 됩니다. 그러할 때 이슬 같은 은혜가 심령에 임하게 됩니다.

셋째로, 말씀을 영접하고 순종하는 자세로 먹어야 합니다. 일용할 양식은 지식을 축적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날에 영적 힘을 덧입기 위함에 있습니다. 그날 주님의 음성을 듣고 한 말씀을 영접하고 순종하고자 애쓸 때 주님께서 위로부터 힘과 능력과 지혜를 공급해 주십니다.

일용할 양식 훈련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내면이 성장하게 하는 가장 좋은 훈련입니다.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통해서 세상의 온갖 죄의 소욕을 극복하고 승리의 삶을 싸울 수 있습니다. 또한 이 훈련을 통해서 어떤 경우에나 변함없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신실한 사람이 될 수 있고, 또 실제 삶 속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만나를 대대로 간수하여 기념하게 하셨습니다.(33)
이는 후손들도 일용할 양식 훈련을 받음으로서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Ⅲ. 반석에서 샘물나게 하신 하나님(17,18장)

첫째, 너는 반석을 치라(17:1-7)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광야에서 떠나 르비딤에 장막을 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 광야에서 마실 물이 없다는 것은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아이들은 목말라 보채고 생축은 비실비실 쓰러져 갔습니다. 이들은 모두 목말라 죽을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때 그들은 이때까지 그들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기억하고 주님께 매달려 간절히 기도해야 했습니다. 죠지 뮬러는 일용할 양식이 없을 때마다 간구하여 1만번 이상의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기도할 때 반드시 응답해 주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도 대신 신경질을 내며 목자에게 대들었습니다.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2).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생축으로 목말라 죽게 하느냐” 그들은 현실 문제로 심령이 막히자 원망과 불평이 튀어 나왔습니다. 그들은 바로 얼마 전에 받은 바 은혜조차 까 먹었습니다. 그 정도가 아닙니다. 7절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 하나님의 존재조차 의심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원망하고 불평하는 원인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그들은 역사관이 없었습니다. 이들은 노예 백성으로서 그때 그때 눈치를 보며 살았기 때문에 찰라적인 인생관이 몸에 배어 버렸습니다. 이들에게는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고 오직 현실 뿐이었습니다. 이들이 과거에 베푸신 은혜를 조금만 기억했더라도 앞에 놓인 현실의 어려움을 견딜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역사관을 가질 때 우리는 현실 문제에 얽매이지 않고 현실의 어려움을 타개해 나갈 수 있는 영역을 덧입을 수 있습니다.

둘째로, 노예근성이 몸에 배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조그만 어려운 일이 생겨도 참지 못하고 지도자를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그들은 먹을 것이 없으면 먹을 것이 없다고 불평하고, 마실 것이 없으면 마실 물이 없다고 불평했습니다. 길이 험하면 다리가 아프다고 불평했습니다. 불평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버렸습니다. 과거 바로에게 하던 불평을 이제는 모세와 하나님께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이 불평할 때마다 진노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평하고 원망하다가 마침내는 광야에서 엎드러졌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10:10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서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우리는 원망과 불평 대신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을 몸에 익혀야 합니다. 조그만 일에도 감사하는 법을 배울 때 행복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였습니다(살전5:18). 우리가 어떤 형편 가운데 있든지 감사하는 생활을 할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형제들에게 은혜를 끼칠 수 있습니다. 원망하고 불평하면 자기도 망하고 다른 사람도 실족시키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물을 내놓으라고 다투었습니다. 모세에게 돌로 치려고 할 정도로 상황이 급박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모세는 백성들과 함께 싸우지 아니했습니다. 그는 이때에도 문제를 들고 하나님께 나아가 부르짖었습니다(4). 이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방향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5, 6절을 보십시오. “백성 앞을 지나가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하수를 치던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내가 거기서 호렙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반석을 치라고 하셨습니다. 딱딱한 바위에서 샘물이 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살아 계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며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는 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반석을 쳤습니다. 그러자 반석에서 샘물이 콸콸콸 쏟아지는 기적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목마른 백성들이 다 이 물을 마셨습니다.

둘째, 아말렉을 물리친 이스라엘(17:8-16)
이스라엘은 목마름을 해결하고 나자 아말렉과 싸우게 되었습니다. 이때 모세는 여호수아 장군으로 하여금 나가 싸우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아론과 훌과 함께 싸움터가 보이는 산꼭대기에 올라가 손을 들고 서 있었습니다. 이는 참으로 이상한 작전이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겼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승리를 위해서 계속해서 손을 들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팔이 피곤하여 더 이상 손을 들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아론과 훌은 모세를 돌 위에 앉게 하고 그의 양쪽 손을 붙들어 해가 지도록까지 손이 내려오지 않게 했습니다. 이로 인해 결국 이스라엘이 승리를 얻었습니다. 모세는 그곳에 단을 쌓고 여호와 닛시라 이름하였습니다.

이 전쟁에서 승리의 비결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뒤에서 기도로 지원했기 때문입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전쟁의 승패는 사람의 수가 많고 적음이나 또 병기에 달려 있지 않고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영적 전쟁의 무기는 말씀과 기도입니다.
특히 일선에서 싸우고 있는 복음의 일꾼들을 위한 기도 지원은 싸움의 승패를 가름할 만큼 중요합니다. 모세는 기도의 중요성을 잘 알았습니다. 그는 직접 일선에 나가 적과 싸우지 않고 뒤로 물러가 기도했습니다. 그가 손을 들고 서 있는 것은 온전히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께 항복하는 기도입니다.

둘째는, 동역자들의 합심입니다. 그들은 모세를 중심하여 합심그릇을 잘 이루었습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명령에 순종했고 아론과 훌은 모세의 연약함을 잘 감당하여 기도의 동역을 이루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의 합심을 통해 친히 역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를 중심으로 합심하여 성령의 그릇을 이루는 곳에 반드시 승리의 역사가 있습니다.

셋째, 이드로의 충고를 받아들인 모세(18:1-27)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출애굽의 소식을 듣고 십보라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세에게로 왔습니다. 이드로도 모세로부터 그동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베푸신 모든 능력의 역사를 듣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의 제단을 드리며 함께 기뻐했습니다. 그는 모세가 그 동안 가정을 돌보지 않았다고 조금도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막중한 사명을 감당할 때 가정을 잘 돌봐 주었습니다. 그리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기뻐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세가 백성의 목자로서 혼자서 무거운 짐을 지고 있음을 보고 지혜롭게 역사를 감당하도록 카운슬링을 해 주었습니다. 그는 참으로 훌륭한 장인입니다. 이런 장인 덕분에 그 동안 모세는 가정을 맡기고 안심 놓고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모세는 겸손하게 장인의 충고를 받아들이고 그대로 행했습니다. 그는 최고 지도자로서 권위를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이 옳으면 즉시 실행에 옮기는 겸손이 배우는 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때 모세에게 이드로를 보내신 뜻이 무엇일까요? 모세는 출애굽 후 백성들의 실제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어야 했습니다. 모세는 홀로 무거운 짐을 지고 하루 종일 재판을 했습니다. 모세는 열심이 있고 상한 목자의 심정이 넘쳤지만 지혜가 부족했습니다. 그가 만일 계속해서 이런 식으로 일을 감당한다면 얼마 못가 기력이 쇠하여 넘어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적절한 때에 장인 이드로를 보내사 역사를 효과적으로 감당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전도서 10:10절에 보면 “무딘 철 연장을 갈지 아니하면 힘이 더 드느니라. 오직 지혜는 성공하기에 유익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소 같이 열심히 일한다고 훌륭한 지도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백성에게 법을 가르치면 범죄자가 줄어듭니다(19,20). 또 부족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고 진실하고 공정한 자를 세워 사소한 일을 처리하면 큰 짐을 덜 수 있습니다(21,22). 그러면 모세는 여유를 가지고 더 큰 하나님의 역사를 계획하고 섬길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훈련하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택한 백성 이스라엘의 참 목자가 되십니다. 하나님은 노예근성에 찌든 그들을 오래 참으시고 그들이 쓰실 만한 제사장 나라요, 거룩한 백성이 되기까지 기초부터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찬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