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Study View


요한복음 Ⅱ부:요한복음 16:1-33(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by Mark Yang   08/14/2019   John

Message


요한복음 Ⅱ부 제 4 강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말씀: 요한복음 16:1-33
요절: 요한복음 16:13a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16장은 14장의 연속입니다. 14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곧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께로 가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의 마음에는 근심이 가득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영원토록 그들과 함께 하실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실 것과 또 성령이 오셔서 하실 일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복음 역사를 섬길 때 성령의 역사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령에 대한 그릇된 인식 때문에 잘못된 길로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성령의 역사를 바로 알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성령의 역사(1-15)

16:1-4절은 15:18-27절에서 계속되는 말씀으로서 제자들이 받게 될 핍박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를 미리 말씀하시는 이유는 제자들이 실족지 않도록 마음 준비를 시키기 위함입니다(1). 그들은 어떤 핍박을 받게 됩니까? 종교 지도자들은 그들을 출회할 뿐만 아니라 때가 이르면 죽이기까지 하게 됩니다(2). 출회는 회당에서 쫓겨나는 것으로서 사회부터의 고립을 의미합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먼저 제자들을 고립시키고 그들의 재산을 빼앗고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박탈하여 쫓아내게 됩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종이라고 자처하였지만 실제로는 적그리스도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제자들을 죽이는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제물로 생각하고 자신들의 악한 행동을 정당화시켰습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도 알지 못하고 예수님도 알지 못하는 영적무지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그때를 당하면 그들이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제자들이 심한 핍박을 받게 될 때 두려움과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시험에 들기 쉽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때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되면 말씀이 주는 힘으로 끝까지 핍박을 견디고 믿음의 중심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핍박을 받는 것은 무슨 뜻이 있습니까? 이는 핍박을 통해서 믿음의 뿌리를 깊이 내리고 거목으로 성장하도록 하기 위함임니다. 거목이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거목이 되려면 많은 비바람을 맞고 견뎌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앞으로 혹독한 시련을 받을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핍박으로부터 보호하시지 않고 오히려 핍박과 담대하게 싸우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그들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
4b절을 보십시오.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니라.” 이 말씀을 볼 때 예수님께서 그동안 제자들을 얼마나 섬세하게 보살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보호자가 되어 그들을 세상의 모든 위험으로부터 보호하시고 또 세상의 악영향으로부터 지키셨습니다. 제자들은 목자되신 예수님의 보호 아래 연약한 내면이 점점 강해지고 세상을 이길 내적 힘을 기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때가 되어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가시게 됩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자립신앙을 가져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 중에는 아무도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느냐고 묻는 자가 없고 도리어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습니다. 이는 그들이 예수님을 인간적으로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존심이 있을 때 사람이 나약해지고 소심해지고 그 내면이 병들어 쓸모없게 됩니다. 의존심이 있는 자는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나약함을 잘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나약하고 소심한 졸장부가 되기를 원치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대적이 심한 세상에서 복음의 원수들과 담대하게 싸우는 대장부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내면 깊이 자리잡고 있는 의존심을 극복하고 자립 신앙을 가져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을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7절을 보십시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예수님은 자신이 떠나는 것이 그들에게 유익하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어떤 점에서 유익합니까?

첫째로, 보혜사 성령께서 오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본체가 하나님이시지만 육신의 몸을 입고 계시기 때문에 시공간적으로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원할 때 동시에 도울 수도 없고 또 영원히 함께 계실 수도 없습니다. 제자들이 외국에라도 가면 더욱 돕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영이시기 때문에 시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성령은 제자들이 어디로 가든지 항상 함께 하시며 도우실 수 있습니다. 성령은 제자들이 지혜가 필요할 때 지혜를 주시고, 절제가 필요할 때 절제의 영을 주시고, 사랑이 필요할 때 많은 사람을 품고 섬길 수 있는 풍성한 사랑을 주십니다. 예수님의 떠나심은 영원한 이별이 아니라 새로운 연합입니다.

둘째로, 자립 신앙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그 마음에 의존심이 있을 때 창조적이고 능력있는 종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장차 신기원을 이루는 역사 창조의 일꾼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떠나신다고 말씀하시자 그들은 슬픔과 염려와 두려움에 사로잡혀 떨었습니다. 그들이 인간 예수님을 의지하고 있는한 나약함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은혜의 날개 아래 머물러 있는 한 자립적이고 능력있는 종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성령을 의지하게 되면 자립적이고 능력있는 종이 될 수 있습니다. 후에 제자들이 성령을 의지하고 자립신앙을 갖게 되었을 때 그들은 두려움을 모르는 믿음의 용사가 되었고 사도행전의 새 역사를 창조하는 능력있는 일꾼들이 되었습니다.

1977년 UBF 개척자이신 이사무엘 선교사님과 배사라 선교사님이 선교사로 나가실 때 본국 역사는 줄어들고 망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목자님들이 성령을 굳게 의지함으로 자립신앙을 갖게 되었을 때 오히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놀랍게 성장하였습니다. 저는 개척 초기에 훌륭한 평신도 목자님들을 의지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아무리 힘을 내려고 해도 힘이 나지 않았습니다. 식사를 많이 못해서 그런가 하고 아무리 밥을 많이 먹어도 힘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하루는 기도하는 중에 내 마음 깊은 곳에 사람을 의지하는 의존심이 있음을 발견하고 눈물로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의존심을 회개하고 온전히 성령님을 의지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저에게 위로부터 놀라운 능력을 부어주셨습니다. 성령께서 저에게 힘과 용기와 창조적인 지혜를 공급해 주심으로 능력있게 개척역사를 감당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자립신앙을 갖기에는 많은 아픔이 따르지만 확실히 우리에게 유익합니다. 자립신앙을 가질 때 모든 연약함과 두려움을 극복하고 내면이 강해집니다. 또한 성숙한 영적인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립신앙을 가진다고 해서 결코 자기 나름대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립과 독립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자립신앙을 가질 때 비로소 동역을 잘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성령이 오셔서 하실 일에 대해 말씀해 주십니다. 8절을 보십시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책망하다’는 단어는 “죄를 폭로하다. 죄를 깨닫게 하다. 각성시키다. 빛으로 인도하다”는 법률상의 단어입니다. 성령은 세 가지 면에서 세상을 책망하십니다.

첫째, 성령은 죄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십니다. 9절을 보십시오.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성령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불신앙이 가장 큰 죄임을 깨우쳐 줍니다. 세상 사람들의 죄의 개념은 도덕적이고 상대적입니다. 사람들은 간음이나 살인과 같은 것은 죄로 생각하기 때문에 죄의식에 시달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으로 인해 죄의식에 시달리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어도 그만, 안 믿어도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불신앙은 모든 죄의 뿌리입니다. Bengel은 “불신앙은 모든 죄의 집계이며, 그 중 최악의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1:21-32절은 이를 잘 말해 줍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하나님을 버렸을 때 금수와 버러지 형상을 섬기는 어리석은 우상숭배자가 되고 또한 마음의 정욕대로 행하는 음란의 노예가 되어버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시기, 살인, 분쟁, 사기 등 온갖 악을 서슴치 않고 행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모든 도덕적인 죄와 사회적인 악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은 불신앙에서 온 것입니다. 불신앙은 모든 죄악의 근본이 됩니다. 그러므로 불신앙의 죄를 깊이 회개하면 치료 불가능하게 보이는 도덕적인 죄도 치료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불쌍히 여기사 예수님을 구주로 허락해 주시고 누구든지 진실되게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어떤 몹쓸 죄도 용서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에게 허락하신 최대의 선물입니다. 이 선물을 영접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멸시하는 것이므로 이는 도덕적인 죄보다 더 무서운 죄입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불신의 죄가 가장 근본적이고도 큰 죄임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둘째, 성령은 의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십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의’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성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관계성이 단절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는 깊은 죄의 심연이 가로놓여 있어 인간이 아무리 도를 닦고 비상한 노력을 해도 하나님께 이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함으로 죄로 인해 영원한 파멸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인간을 불쌍히 여기사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다리를 놓을 수 있는 중보자 예수님을 허락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또 부활 승천하사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의가 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의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선행이나 고행을 함으로써 자기 의를 쌓기도 하고 유대인들과 같이 율법을 열심히 지킴으로 자기 의를 쌓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자기 의는 사람을 교만하게 만듭니다. 자기 의가 강한 자는 자기가 얼마나 비참한 죄인인줄 깨닫지 못하고 자기 의를 기초로 남을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의는 하나님께서 보실 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사야 64:6절은 말합니다.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 가나이다.” 인간은 행위로 의에 이르는데 실패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있습니까? 롬 1:17절은 말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롬10:3,4). 성령은 이 예수님을 믿음으로만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을 수 있음을 깨우쳐 줍니다.

셋째, 성령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십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이 세상 임금은 사단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사단은 죄와 죽음 권세로 인간을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사단은 인간으로 하여금 정욕과 미움과 같은 죄의 소욕과 허무와 절망과 자살 충동과 같은 죽음의 권세에 시달리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때 사단이 승리한 것 같고 예수님은 악의 세력에 패한 것 같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사단의 머리를 박살내시고 승리하셨습니다. 부활을 통해 예수님은 산 자와 죽은 자의 심판주가 되셨습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사단이 이미 심판을 받았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 믿는 자들에게는 큰 힘을 주지만 불신자들에게는 절망을 안겨 줍니다. 불신자들은 자신이 속한 세계의 왕이 이미 심판을 받아 폐위 당했고 그 세계는 곧 멸망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절망하게 됩니다. 이 사실을 깨닫게 될 때 그들은 회개하고 예수님께로 돌이킬 수 있게 됩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성령의 역사에 대해 살펴 보았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불신자들은 그들의 불신앙이 얼마나 어리석고 악한 것이며, 자신은 아무리 노력해도 그리스도의 의의 표준에 미치지 못하며, 또 자신이 사단에게 속하여 심판 아래 있음을 깨닫고 회개하게 됩니다. 성령의 역사 없이는 누구도 이러한 죄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험한 세상에서 복음 역사를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성령께서 역사하사 사람들의 완악한 마음을 감동 감화시키시고, 죄를 깨우치사 영적 눈을 뜨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직도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것이 많지만 그들이 어린 믿음으로 이를 다 감당치 못할 것을 아시고 더 이상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성령님께 맡기십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성령은 진리의 영입니다. 세상에는 거짓 영이 많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불신과 회의를 심고, 우리를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 미혹의 영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영이라고 해서 다 믿어서는 안됩니다(요1서 4:1,2). 우리는 영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마귀로부터 왔는지 분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고 순수하게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냅니다. 그러면 진리의 성령이 오셔서 하실 일이 무엇입니까?

첫째, 성령은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세상은 노아 시대와 같이 거짓과 불의와 강포로 충만합니다. 세상은 너무 험하여 사람 살기 힘듭니다. 때로 우리는 연약한 내가 이 험한 세상에서 어떻게 말씀대로 진실되게 살 수 있을까 염려될 때가 있습니다. 험한 세상을 살아 나가려면 적당히 거짓말도 하고 처세술도 익혀야 되지 않는가 생각됩니다. 또 내가 지금은 믿음으로 살지만 군대 가거나 직장생활을 하면 죄악된 분위기에 동화되어 그릇된 길로 가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그러나 조금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성령님을 의지하고 진리의 말씀을 붙들고 믿음으로 살 때 진리의 성령께서 우리를 한 걸음 한 걸음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죄와 불의가 난무하는 세상에서도 의롭고 진실되게 살 수 있습니다.

둘째, 성령은 장래 일을 알리십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세계선교 비젼을 심어 주시고 또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망을 심어 주십니다. 또한 성령은 정확한 때는 모르지만 예수님의 재림의 때가 임박했음을 알려 주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것을 알려 주십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이 세상 일에 매이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거룩한 순례의 길을 기쁨으로 갈 수 있습니다.

셋째, 성령은 믿는 자에게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14,15). 14절을 보십시오.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불신자들은 세상에서 비극적이고 추한 것만 보기 때문에 비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람들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이는 믿는 자에게 큰 특권입니다.

Ⅱ.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16-33)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의 역사를 말씀하신 후 조금 있으면 아버지께로 가실 것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16). 이는 예수님께서 조금 있으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또 조금 있으면 부활하실 것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이 마치 수수께끼처럼 들렸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여인의 해산의 비유로 설명해 주셨습니다. 여인이 해산을 하게 될 때 산통으로 인해 근심합니다. 산통이 얼마나 큰지 다시는 아이를 낳지 않고자 결심합니다. 그러나 아이를 낳게 되면 새 생명이 탄생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 잊어버리고 다시는 기억하지 않게 됩니다. 이와 같이 제자들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잠시 슬퍼하게 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때 모든 슬픔과 근심이 사라지고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이 기쁨은 어느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참된 기쁨입니다. 제자들이 고통하고 슬퍼한 원인은 죽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고통의 원인을 제거하셨습니다. 이로써 신자가 이 세상에서 당하는 고통은 해산의 고통과 같이 의미있는 고통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고통을 통해서 예수님의 남은 고난에 동참할 수 있고 더 나아가 부활의 기쁨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23,24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누릴 수 있는 또 다른 기쁨에 대해 말씀해 주십니다. 그것은 기도의 응답을 받는 데서 오는 기쁨입니다. 제자들은 이때까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했으나 이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기만 하면 다 응답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에 대한 가장 큰 영적 무기를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의 역사와 부활에 대해 말씀하시자 제자들의 마음에 영광스러운 빛이 비추이더니 영적인 눈이 떠졌습니다. 그때 그들은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서 나오심을 우리가 믿나이다”(30). 예수님은 그들이 신앙고백하기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도우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을 혼자 두고 흩어질 때가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조금도 외롭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3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불안해 하는 제자들에게 평안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영적 장군이 되도록 격려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실 때 수많은 환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믿음으로 모든 환난을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십자가의 고난도 이기시고 죽음의 권세도 이기셨습니다. 이 예수님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승리자가 되십니다. 예수님께서 승리하셨으므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도 세상을 승리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고자 할 때 반드시 크고 작은 환난을 당하게 됩니다. 이때 우리는 두려워하여 움츠러들거나 뒤로 물러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답게 담대히 싸워야 합니다. 이는 우리에게 죽음까지도 이길 수 있는 승리가 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험한 세상 가운데서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성령님께 감사와 찬송과 존귀와 영광을 돌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