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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Ⅱ부:요한복음 18:1-40(체포 당하신 예수님)

by Mark Yang   08/15/2019   John

Message


요한복음 Ⅱ부 제 6 강


체포 당하신 예수님


말씀: 요한복음 18:1-40
요절: 요한복음 18:37b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체포와 심문에 관한 것입니다. 불의한 종교 지도자들에게 체포되어 심문 받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패배자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밤 하늘이 어두울수록 별빛이 더욱 찬연히 빛나는 것 같이, 가장 절망적인 때에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모습이 잘 나타났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진리의 왕 예수님을 영접함으로써 불의한 이 시대에 진리를 증거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체포당하신 예수님(1-11)

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제자들에게 유언과 같은 말씀을 하신 후 대제사장적인 기도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마치신 후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를 지나 감람산 기슭에 있는 겟세마네 동산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이곳은 예수님께서 기도로써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던 곳이요(눅22:39), 또 제자들과 함께 자주 사랑의 교제를 나누던 곳입니다. 가룟 유다도 이곳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곳을 피하여 다른 곳으로 갈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뜻을 좇아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이곳으로 오셨습니다.

저자는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공관복음서와의 중복을 피하기 위해 생략했습니다. 공관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땅에 엎드려 고뇌에 찬 기도를 하셨습니다.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14:36). 예수님은 땀방울이 피방울이 되도록까지 동일한 기도를 세번이나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자기의 뜻을 부인하시고 하니님의 뜻에 온전히 복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꺼이 십자가의 잔을 마시고자 결단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로 앞으로 당할 모든 고난을 능히 감당할 영적인 힘을 덧입으셨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유다가 군대와 종교지도자들에게서 얻은 하속들을 이끌고 등과 홰와 병기를 가지고 그곳으로 나타났습니다. 12절에서 천부장이 나오는 것을 보면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해 600명의 대대 병력이 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등과 횃불이 어두운 밤 하늘을 밝히고 곳곳에서 창칼이 불빛에 번뜩였습니다. 긴장감이 감도는 살벌한 분위기였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는 누구나 두려워 떨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때 예수님은 자신을 어떻게 나타내셨습니까?

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앞으로 체포당하시고 심문 받으시고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등 자신이 받으실 고난을 다 아셨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당할 일을 알면 두려워서 물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조금도 물러나지 않으시고 담대히 나아가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들은 “나사렛 예수라” 대답하였습니다. ‘나사렛 예수’는 예수님을 조롱하고 무시하는 호칭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로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군병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6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내로라”고 말씀하시자 그들은 물러가 일제히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잡기 위해 무기를 들고 중무장을 하고 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위엄에 찬 말씀 한 마디로 중무장한 대대병력의 군사들을 엎드러지게 할 수 있을 만큼 강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주도권을 잡으시고 상황을 리드해 나가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해서 적극적으로 체포를 당하셨습니다.

이 위기의 때에 예수님의 가장 큰 관심사가 무엇이었습니까? 사람들은 대개 어려운 일을 만나면 자기 중심적이 되어 다른 사람을 생각할 여유를 잃어버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체포당하는 위기의 순간에도 자신의 안전보다 제자들의 안전을 더 생각하셨습니다. 7,8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 후 “너희에게 내로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었습니다(9).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한 책임성있는 사랑을 배우게 됩니다. 예수님은 위기의 때에 자신의 목숨을 내걸고 이리 떼로부터 양을 지키는 선한 목자이셨습니다.

반면 시몬 베드로는 이 위기의 순간에 무엇을 했습니까? 병사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다가서는 순간 베드로의 분노가 그를 삼켰습니다. 그는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베어 버렸습니다. 베드로는 그의 머리를 쪼개려고 했으나 그가 피하는 바람에 귀만 떨어져 나갔습니다. 베드로는 분노로 충만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사랑했고 또 예수님께 충성했습니다. 그의 행동은 남아대장부답게 용기있는 행동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의 행동 이면에는 두려움이 숨어 있었습니다. 그는 기도해야 할 때 잠만 자다가 막상 일을 당했을 때는 인간적인 혈기로 대항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11절을 보십시오.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여기서 우리는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검을 쓰는 방법과 잔을 마시는 방법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검을 쓰는 것은 혈과 육의 방법이라면, 잔을 마시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이요 영적인 방법입니다. 검을 쓰는 것은 무력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때문에 강하게 보이고 또 문제가 빨리 시원스럽게 해결되는 것 같이 보입니다. 반면 잔을 마시는 것은 소극적이고 약하고 어리석은 것 같이 보입니다. 그래서 인기가 없습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잔을 마시는 것보다 검을 들고 검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검을 쓰면 문제가 잘 해결되는 것 같지만 실상은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고 결국에는 검으로 망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6:52절에서 “검을 가진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역사가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세계를 무력으로 제패한 영웅들, 곧 징기스칸, 알렉산더, 시저, 나폴레옹, 카이저, 히틀러, 무솔리니, 그 밖의 많은 사람들이 칼을 드었다가 결국 칼로 망했습니다. 토인비는 그의 역저 「역사의 연구」에서 무력을 사용한 나라는 예외없이 망하였고, 예수님이 사용하신 십자가의 온유의 법칙만이 진정한 승리의 비결임을 증거했습니다. 무력으로 정권을 잡은 자는 반드시 무력으로 망하게 됩니다. 열왕기서를 읽어보면 북이스라엘의 역사는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후에 쿠데타로 망하는 악순환으로 점철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사람들은 불의를 보고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는가? 분연히 일어서서 불의와 대항하여 싸워야 된다고 말합니다. 옳습니다. 우리는 불의와 대항해서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방법으로 싸우느냐가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검을 쓰는 것이 가장 확실하고 빠른 방법이요 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검은 검을 부르기 때문에 검으로는 결코 문제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검을 집에 꽂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방법을 좇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은 십자가의 쓴 잔을 의미합니다. 이는 고난의 잔이요 순종의 잔입니다. 마태 26:53절을 보면 “내가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영(한 영은 6,000 명으로 구성된 로마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폭풍우도 말씀 한마디로 잠잠케 하시고 죽은 나사로도 살리신 신적 권능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만일 검을 사용하신다면 원수들은 순식간에 초개와 같이 쓰러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마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인류 구속 역사를 이루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습니다. 우리가 문제 해결을 위해 검을 사용하지 않고 잔을 마시는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살아계셔서 이 세상 역사를 주관하시고,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나가시며, 결국에는 선악 간에 세상을 심판하실 것을 믿습니다.


Ⅱ.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12-27)

마침내 예수님은 체포당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결박하여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갔습니다.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으로 실제적인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체포당하시자 제자들은 다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그 중 시몬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을 따라 갔습니다. 요한은 대제사장과 아는 사이므로 그 집 뜰에 들어갔으나 베드로는 제지당했습니다. 요한이 문지기에게 이야기하여 겨우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를 알아보고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고 지적했습니다. 베드로는 깜짝 놀라 얼떨결에 “나는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종과 하속들과 함께 서서 불을 쬐고 있었습니다. 그는 끼어서는 안될 곳에 끼어 있었습니다.

한편 예수님은 안나스로부터 심문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안나스는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해서 예수님을 심문했습니다. 안나스는 예수님의 배후 조직을 철저히 수배하여 그 씨를 없이 하고자 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아무 죄목도 없이 체포했음으로 죄목을 찾고자 유도심문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질문에 대답할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평소에 은밀히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않고 모든 것을 드러내어 놓고 공개적으로 가르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은 진리의 말씀만을 가르치셨기 때문에 아무 것도 숨기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생활과 그이 가르침은 온 세상을 환하게 비추이는 태양과 같았습니다. 기독교의 교훈은 빛은 교훈입니다. 그 진리들은 지붕 꼭대기에서 소리쳐 전하기에 합당합니다.

예수님께서 안나스에 심문에 당당하게 말씀하시자 하속 하나가 건방지다고 손으로 예수님을 쳤습니다. 이것은 분명 율법에 어긋나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 지도자들은 타락하여 유대 최고 법정에서 심문 도중에 폭력적인 가해를 하도록 허용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화가 불길같이 치밀어 그를 반격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감정적으로 대하지 않으시고 그의 잘못을 분명히 지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안나스에게 심문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진리로 거짓된 안나스를 심판하고 계셨습니다. 안나스는 예수님을 결박한 그대로 가야바에게고 보냈습니다.

예수님께서 심문 받으실 때 시몬 베드로는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25절을 보십시오. 그는 원수는 소굴에서 계속 불을 쬐고 있었습니다. 그는 적극적으로 예수님의 곤나에 동참하든지, 아니면 그 자리를 피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엉거주춘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이런 태도는 그를 더욱 궁지로 몰아넣었습니다. 불을 쬐고 있던 사람들이 베드로의 태도가 이상하여 가만히 보니 틀림없이 예수님의 제자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번에도 ‘나는 아니라’고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하나는 베드로에게 귀를 베이운 말고의 친척인데 자신이 그 동산에서 분명히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이를 완강히 부인했습니다. 그가 세 번 예수님을 부인했을 때 갑자기 새벽의 찬 공기를 가르며 닭이 울었습니다. 닭은 베드로가 계속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어 그에게 회개를 촉구하기 위해 울었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밖에 나가 심히통곡하였습니다. 그 눈물은 진실된 회개의 눈물이었습니다. 그후 베드로는 새벽에 닭이 울 때마다 회개의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베드로의 실패의 원인은 자신을 지나치게 믿고 깨어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그는 자기의 연약함을 깨닫지 못하고, 기도로 마음 준비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깨어 기도하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사단의 시험에 들기 됩니다(마26:41). 선 줄로 생각한 자는 넘어질까 조심해야 됩니다.(고전10:12)

Ⅲ.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님(28-40)

그들은 가야바에세서 빌라도가 있는 로마 관정으로 끌고 갔습니다. 때는 새벽이었습니다. 이를 볼 때 그들은 밤에 불법집회를 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공회는 재판의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반드시 해가 뜬 후부터 해지기까지 모여야 했습니다. 특히 사형에 대한 정죄는 밤에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목적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겨준 후 자신들은 더럽힘을 받지 않고 주말에 유월절 잔치를 즐기고자 관정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이는 유대인들이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면 부정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위선으로 가득찬 자들이었습니다. 빌라도는 그들의 행동이 아니꼬와서 밖으로 나와 무슨 일로 고소하느냐? 너희가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죽음으로 죽으실 것을 예언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법대로 죽으면 돌에 맞아 죽기 때문에 나무에 달리셔야 한다는 말씀이 응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방인의 손에 넘어가 많은 고난을 받으시고 온 인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높이 달리심으로 말씀을 성취하신 것입니다(요3:14, 갈3:13). 모든 것이 말씀대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압력에 못이겨 관정에 들어가 예수님을 심문했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그러자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뇨?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네게 한 말이뇨?”라고 물으셨습니다. 이는 빌라도가 예수님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가 알아보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귀찮다는 듯이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자신의 나라가 어디에 속하였는지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36절을 보십시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여기서 우리는 이 세상 나라와 세상에 속하지 않는 두 나라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세상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어거스틴은 이를 「신의 도성」에서 지상 나라와 천상 나라, 어둠의 나라와 빛의 나라로 표현하였습니다. 세상 나라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 곧 사단이 지배하는 나라요,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는 나라입니다. 세상 나라는 사단이 지배하기 때문에 거짓과 부정부패와 권모술수와 폭력이 끊일 날이 없습니다. 이 세계는 무정하고 무자비합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세계에서 정의사회를 구현하고 행복한 사회를 만들려고 몸부림치지만 그럴수록 상처와 허무와 절망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어떠합니까? 이사야서 9:6,7절은 하나님의 나라의 성격을 잘 말해줍니다. 이 나라를 다스리는 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요, 영존하시는 아버지가 되십니다. 또한 평강의 왕이 되셔서 그의 백성을 사랑과 평화로 다스리십니다. 또 이 나라의 특징은 공평과 정의입니다. 이 나라에는 거짓이 없고 부정부패가 없습니다. 또 이 나라는 세상 나라와 같이 망하지 아니하고 영원무궁합니다. 다니엘서 7:14절은 말합니다.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이 나라는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습니다. 생노병사의 괴로움도 없습니다. 이 나라에는 생명과 평화, 은혜와 진리가 차고 넘칩니다. 이 나라는 검으로 건설한 나라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잔으로 건설하신 나라입니다(벧전1:3,4). 우리는 바로 이 나라의 시민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와!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우리는 이 세상에 발을 붙이고 살고 있지만 이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시민이지만 이곳은 잠시 머물 여인숙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진정한 시민권은 하나님 나라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므로 이 세상 가치관을 좇아 살아서는 안되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과 법도대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도는 은혜와 진리, 공평과 정의, 사랑과 평화입니다. 위에서 군림하지 않고 낮아져서 섬기며,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상대방의 유익을 구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빌라도는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무엇이라 대답하셨습니까? 37b절을 보십시오.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예수님은 자신이 진리의 왕 되심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진리를 심고 진리를 전파하고 진리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이 세상에는 진리가 없습니다. 세상은 거짓과 불의와 부정부패로 가득차 있습니다. 세상에는 참되고 절대적인 진리가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육신과 감정과 상대적인 가치관대로 행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세상에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오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침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진리를 심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에게도 그가 진리의 음성을 듣고 천국 시민이 될 수 있도록 초청하셨습니다. 이는 그에게 임한 영광스러운 초청이었습니다. 그는 이때 그 음성을 듣고 진리 편에 서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진리가 다 무엇이냐”하며 초청을 거절했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빌라도와 같이 진리의 음성을 듣고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로 초청을 받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대한 욕심과 육신이 원하는대로 살고 싶은 마음 때문에 이를 부담스럽게 여기고 거절합니다. 이런 자는 현명한 자 같으나 실상은 가장 어리석은 자입니다. 우리는 진리의 음성을 듣고 진리를 위해 살아야 됩니다. 사도 바울은 고후13:8절에서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습니다. 그는 마땅히 예수님을 무죄 석방해야 했지만 유대인들과 정치적인 협상을 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진리편에 서지 못하고 타협하려고 하다가 결국 악의 세력에 발목을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아무 죄없이 체포당하시고 심문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가운데서도 진리의 왕으로서 진리에 대하여 선한 증거를 하셨습니다. 거짓이 난무하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진리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진리를 좇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