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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Ⅱ부:요한복음 19:1-42(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

by Mark Yang   08/15/2019   John

Message


요한복음 Ⅱ부 제 7 강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


말씀: 요한복음 19:1-42
요절: 요한복음 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초대 교회 때부터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를 자기의 믿음의 상징으로 표현해 왔습니다. 십자가로 인하여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난과 멸시를 받고 고통과 수치를 당한다 할찌라도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를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십자가를 사랑하고 자랑해 왔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증거하기에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고통과 수치와 저주의 상징이 아니라 구원과 승리와 영광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로 인해 고통하며 멸망해 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고 영광스러운 세계로 인도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 인간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발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놀라운 구속 역사의 비밀이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많은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신 사건입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은 구속 역사의 절정으로서 인류 구속역사의 완성을 의미합니다. 이시간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생각하는 가운데 죄 사함의 은혜와 구원의 기쁨을 충만히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예수님의 고난(1-16)

18장에서 예수님은 체포 당하시고 공회 앞에서 철야 심문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참람죄로 사형언도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로마 식민 통치 하에 있는 유대인들에게는 사형 집행 권한이 없기 때문에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로마 총독인 빌라도에게 넘겼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하였으나 아무 죄가 없음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마땅히 예수님을 무죄 석방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유대인들이 두려워 석방하지 못하고 유월절 전례를 이용하여 유대인들과 타협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백성들이 당연히 예수님과 바라바 중 예수님을 택할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의 선동을 받은 무리들은 예수님 대신에 살인자요 강도인 바라바를 택했습니다. 이에 실패하자 빌라도는 또 다른 타협책을 강구했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 로마 시대의 채찍은 여섯개의 가죽끈으로 되어 있는데 끈 하나 하나에 납덩이나 뼈 조각이 달려 있었습니다. 채찍질 할 때는 옷을 벗기고 사람을 틀 위에 묶어 놓고 건장하고 억센 군인이 등에 사정없이 내려갈겼습니다. 그 채찍질이 너무 아프고 포악하여 이를 견디지 못하고 죽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는 "채찍질은 사람을 죽이는 시해 행위와 같다"고 비난하였습니다. 그래서 로마인들에게는 채찍질을 금지시켰습니다. 그리고 비로마인에게는 채찍 40대, 반항심이 강한 유대인에게는 채찍 120대를 때렸습니다. 예수님은 무자비한 군병으로부터 채찍 120대를 맞으셨습니다. 채찍이 허공을 가르며 예수님의 등을 강타할 때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등에는 깊은 상처가 패이고 피가 온 등을 적시며 흘러 내렸습니다.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이렇게 채찍에 맞으신 것은 바로 우리의 죄로 인한 상처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심으로 죄로 인한 상처가 아물고 나음을 얻게 되었습니다.(벧전2:24)

군병들은 이런 예수님에게 가시로 면류관을 만들어 그의 머리에 씌웠습니다. 날카로운 가시가 그분의 이마에 박히면서 머리에서 피가 방울 방울 흘러 내렸습니다. 그들은 왕의 예복인 자색 옷을 입히고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찌어다." 하며 손바닥으로 치며 조롱했습니다. 부당하게 이런 조롱과 멸시를 당한다는 것은 참기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조롱과 멸시를 다 참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만큼 비참하게 되었습니다. 빌라도는 이러한 예수님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 말했습니다. “보라, 이 사람이로다!” 이는 “가련하고 연약한 이 사람을 보시오. 우리는 그에게 채찍질하고 가시 면류관을 씌웠소. 이제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소” 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더 깊은 영적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이것은 “보라, 우리 죄 때문에 채찍에 맞으시고 가시 면류관을 쓰신 고난의 주를 보라!” “나의 모든 슬픔과 운명과 죄짐을 담당하시기 위해 모진 고난을 당하신 슬픔의 주를 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 고난의 주, 슬픔의 주를 바라볼 때 죄로 인한 마음의 상처가 아물고 마음에 평화를 얻게 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채찍질하고 가시 면류관을 씌움으로써 무리들에게 만족을 주고 동정심을 불러 일으켜 예수님을 석방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무리들은 예수님을 보자 피를 본 야수와 같이 소리질렀습니다.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빌라도는 이제 화가 나서 말했습니다.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못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노라.” 빌라도는 예수님이 아무 죄가 없다는 것을 반복해서 말하고 있습니다(18:38, 19:4,6). 이는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이 바로 우리 죄 때문임을 이방인 재판관을 통해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율법에 따르면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였으므로 신성모독죄로 마땅히 죽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빌라도는 더욱 두려워하며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너는 어디로서냐?”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빌라도는 자신에게 생사여탈권이 있음을 예수님께 주지시켰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자신을 해할 권세도 위로부터 온 것임을 주지시켰습니다(11a). 이에 빌라도는 예수님을 놓으려고 힘썼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빌라도의 약점을 물고 늘어졌습니다.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12). 이 말을 들은 빌라도는 예수님을 끌고 나와서 재판석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는 말에 더욱 결정타를 맞고 마침내는 예수님에게 십자가 형을 언도하고 말았습니다(16). 빌라도는 능력있는 행정관리로서 로마의 전형적인 공명정대한 태도를 지닌 것으로 인해 명성을 얻은 자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무죄를 확신하였으며 유대인들이 불의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재판관으로서 마땅히 진리 편에 서서 예수님을 무죄 석방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총독으로서의 사회적 지위와 안전을 잃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불의와 타협하다가 결국 불의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장본인으로서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역사가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그는 이 비극의 순간을 잊지 못해 고심하다가 5년 후에 유배당하여 자살했다고 합니다.

Ⅱ. 예수님의 죽으심(17-30)

첫째, 자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에 오르신 예수님(17)
17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는 곳에 나오시니" 예수님은 사형 선고를 받자마자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셨습니다. 다른 죄수들이 지고 가는 십자가는 자신의 죄 때문에 지는 십자가였지만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의 십자가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십자가는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십자가였습니다. 예수님은 평소 제자들에게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8:34). 예수님은 이 말씀대로 친히 자기 십자가를 지시고 한 걸음 한 걸음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마에는 피와 땀이 범벅이 되어 한 방울 한 방울 흘러내렸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극심한 고통이 밀려왔습니다. 골고다를 향하여 가는 좁은 길 옆에는 유난히도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상기된 얼굴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평소 온 마음과 진심을 바쳐 주와 복음을 위하여 충성하던 여인들은 울며 그 뒤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철야 심문을 받으시고 무서운 채찍에 맞으시고 조롱과 멸시를 받으며 시달리셨기 때문에 육신의 기력이 다하여 언덕을 오르시다가 쓰러지셨습니다. 그러나 다시 일어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러나 얼마 못가서 또 쓰러지셨습니다. 예수님은 또 다시 일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몇번이나 쓰러지고 일어나시고, 쓰러지고 일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포기치 않으시고 나중에는 구레네 사람 시몬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끝까지 자기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에 오르셨습니다(막15:21). 골고다 언덕으로 오르는 이 길은 비아돌로로사(Viadororosa)라고 합니다. 이 길은 죄인들을 위한 고난의 가시밭 길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기 위한 구원의 길이요 영광에의 길이었습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가신 이 길을 좇아가야 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히13:12,13)

둘째,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18-22)
18a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을쌔" 골고다에 이르자 군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십자가는 인류가 고안해 낸 형벌 중 가장 악독한 것입니다. 로마인들은 십자가 형을 살인, 반역, 또는 무장 강도 죄를 범한 죄인들에게 적용했습니다. 로마의 정치가요 철학자인 키케로는 십자가 형을 "가장 잔인하고 혐오스러운 형벌"이라고 비난하였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못박는 것처럼 끔찍한 행위를 표현할 수 있는 적합한 말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루이 16세를 처형한 단두대도 그 고통은 순간적이지만 십자가 형은 못박히는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 처절한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히면 보통 2-3일 동안 나무에 매달려 극심한 육체적 고통을 맛보다가 물과 피를 다 쏟고 기아와 갈증으로 죽게 됩니다. 리히터라는 독일인 의사는 십자가에 못박힌 고통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신체의 부자연스러운 위치와 격심한 긴장 상태는 가장 미미한 동작에서부터도 괴로운 느낌을 유발하였으며, 군데 군데 난 상처와 찢겨진 파열상은 노출되어 염증을 유발하였고 그것은 점차 부패되어 매 순간 통열한 고통이 더해갔다.” 그 고통이 얼마나 극심한지 십자가에 못박힌 후부터 죽기까지 1000번 이상 까무러친다고 합니다. 사형수에게 베풀어지는 유일한 자비는 다리를 망치로 때려 빨리 죽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입니다. 군병들은 예수님을 발가벗기고 십자가가 있는 땅에 눕혔습니다. 그리고 양 손목에 굵은 대못을 대고 망치로 사정없이 박았습니다. 쾅! 쾅! 쾅! 골고다 언덕에 망치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습니다. 군병들은 예수님의 발목도 겹쳐서 못을 박았습니다. 쾅! 쾅! 쾅! 주홍 같은 피가 솟구쳐 마구 쏟아졌습니다. 온몸에 경련이 일어나고 사지가 뒤틀렸습니다. 예수님은 너무나 고통스러워 절규하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시편 기자는 그 고통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는 잇틀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시22:14,15)

아무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왜 이토록 고통스러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셔야 하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왜 나무에 달려 비방과 멸시와 조롱의 표적이 되시고 저주받은 자가 되셔야 하는 것입니까? 이는 바로 우리의 허물과 죄 때문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이러한 예수님을 가리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외쳤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일찌기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고 증거했습니다(사53:5).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고 증거했습니다(벧전2:24). 예수님은 바로 내 죄 때문에 무서운 고통을 받으시고 저주받은 자가 된 것입니다. “저희가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을쌔” 군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군병들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바로 우리의 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나의 교만과 정욕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나의 불순종과 반발심, 나의 욕심과 이기심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교만과 정욕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혀 뼈가 어그러지는 무서운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욕심과 이기심 때문에 나무에 달려 저주받은 자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원한과 증오심 때문에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대신 죽음의 고통을 당하심으로 나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시고 죽음의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영광스러운 생명의 세계, 빛의 세계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죄로 인한 마음의 고통과 상처가 있습니다. 어릴 때 지은 죄로 인한 상처, 실패로 인한 상처, 가난으로 인한 상처, 2세 선교사로서 이해 받지 못하고 푸시 받은 상처 등 여러가지 상처가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러한 마음의 고통과 상처를 안고 남몰래 괴로와하며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 이를 잊기 위해 술을 마시고 마약을 피웁니다. 전자 오락실과 노래방을 전전긍긍합니다. 쾌락에 탐닉하여 자신을 학대합니다. 좀 고상한 사람은 공부나 운동이나 음악에 몰두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죄가 주는 마음의 고통과 번민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로 인한 마음의 고통과 상처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성 파괴에서 생기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로 인한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약은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보배 피를 흘리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놀라운 사죄의 은혜가 임하게 됩니다. 그때 죄로 인한 마음의 고통과 번민이 사라지고 상처가 깨끗이 나음을 받게 됩니다.

“만왕의 왕 내 주께서 왜 고초 당했나. 이 벌레 같은 나 위해 그 보혈 흘렸네.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 나의 맘에 큰 고통 사라져,
오늘 믿고서 내 눈 밝았네 참 내 기쁨 영원하도다.”
18절을 다시 한번 봅시다. “저희가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쌔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 예수님의 좌우에 못박힌 두 사람은 흉악한 강도였습니다. 강도 중 하나는 예수님을 비방하며 배척하였으나 다른 하나는 자신의 죄를 깊이 뉘우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였습니다(눅23:39-43). 이와 같이 갈보리는 오늘날도 중앙에 서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주 다른 세 사람이 골고다에서 세 개의 십자가에 함께 매달렸다. 한 사람은 죄인들의 구세주였고 한 사람은 구원받을 죄인이었고 또 다른 한 사람은 멸망받을 죄인이었다.” 당신은 영접하는 죄인입니까? 배척하는 죄인입니까?

19절을 보십시오. 빌라도는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였습니다. 강도들은 “어린이 유괴범”, “거액 사기범”과 같은 죄패가 붙어 있었지만 예수님의 죄패는 “유대인의 왕”이었습니다. 또 이 죄패도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만왕의 왕이심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 되시기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셋째, “다 이루었다” 하신 예수님(23-30)
군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후 그 겉옷을 취하고 속옷은 제비 뽑고 있었습니다. 이는 시편 22:18절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그들은 무지하고 물질적이고 무감각적인 자들로서 인간성을 상실한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서 있었습니다. 그들은 평소 예수님을 사랑하고 뒤에서 복음 역사를 충성스럽게 섬기던 자들로서 십자가의 증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 밑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모친 마리아의 심정은 칼이 그 마음을 찌르는 듯 하였습니다(눅2:35). 예수님은 극심한 고통 중에서도 울고 있는 모친을 위로해 주시고 그 장래를 요한에게 부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친의 슬픔을 담당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모친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슬픔을 담당해 주셨습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슬픔의 사람이 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운명하실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이후에 예수님은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시기 위하여 “내가 목마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육신의 목마름을 축이고자 하는 것보다 성경 말씀을 온전히 성취하는데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3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신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다 이루었다”(It is finished) 하며 인생을 마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당대에 명성을 날리고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던 막트윈이나 체홉 같은 사람들은 “만일 내가 다시 인생을 산다면” 하며 인생을 후회하면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 하고 운명하셨습니다.
그러면 “다 이루었다”는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메시야에 대한 모든 구약의 예언이 온전히 성취되었습니다. 구약에 줄기차게 흐르는 사상은 메시야 사상입니다. 성경에는 시대와 때와 장소를 달리 하여 오실 메시야에 대한 예언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 약속과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일거수 일투족이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는 생애였습니다.

둘째로, 인류 구속 사업을 100% 이루셨습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 죄값을 치루어야 하는데 그 죄가 요구하는 것은 다름 아닌 피였습니다. 이는 모든 육체의 생명은 그 피에 있기 대문입니다(레17:11). 인간은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죄의 댓가로 피를 쏟고 죽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죄로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고 속죄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것은 인간 대신 짐승의 피를 흘려 인간의 죄를 대속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피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기 때문입니다(히9:22). 구약의 레위기를 읽어보면 사람이 죄를 범할 때마다 제사장이 흠없는 양이나 염소를 잡아 피를 뿌림으로 죄를 속하였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죄 때문에 아무 죄 없는 짐승들이 수없이 희생제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짐승의 피는 속죄의 효과가 그때 뿐, 죄를 지을 때마다 짐승을 잡아 속죄의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이것은 장차 올 참된 속죄 역사의 그림자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인류 구속 역사를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되 우리 죄를 위한 속죄제물로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기 피로 단번에 영원하고 온전한 속죄의 제사를 드리셨습니다. 이 피는 짐승의 피가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의 피요, 흠없고 점없는 하나님의 어린 양의 피이기 때문에 단 한번의 사건으로 영원하고 온전한 속죄가 될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죄사함의 효과가 100% 완전히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율법의 요구가 완전히 충족되고 죄의 값이 남김없이 지불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속죄의 역사를 100% 완전히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은 “거의 다 이루었다.” “99% 이루었다” 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99% 이루셨다면 우리는 나머지 1%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하여서 1%의 행위로도 죄의 값을 치룰 수 없게 되었습니다. 벌키트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빚을 어느 한 부분이라도 갚지 않은 채로 놓아 두셨다면 우리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영원까지 지옥에서 지불 불능인 채로 있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인간들을 위해 우리의 죄값을 100% 온전히 치루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1%의 행위도 요구되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전적으로 믿음만이 요구됩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신 사실을 단순히 믿기만 하면 됩니다. 단순히 믿기만 할 때 우리에게 위로부터 놀라운 죄사함의 은혜가 임하고 구원의 기쁨이 영혼 깊은 곳에서 솟아나게 됩니다. 나를 그토록 얽어매고 괴롭히던 죄의 사슬이 뚝 끊어지고 참 자유와 평강을 맛볼 수 있게 됩니다. 진노의 자식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아 영생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다 이루었다.” 이는 실로 위대한 해방 선언입니다.

“다 이루었다.” 이 말씀은 소년 허드슨 테일러를 거듭나게 하여 중국 선교의 아버지가 되게 하였습니다. 17살인 테일러는 어느날 창고 한쪽 구석에서 복음 소책자를 읽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한 문구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 것은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다 이루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다 이루었다? 무엇이 다 이루어졌다는 말인가?” 이때 그의 마음에 성령이 역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이것이 “완전하고도 영원한 속죄”임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을 깨달은 순간 그는 거듭남의 체험을 하였습니다. 그는 그날 밤 회심한 글을 이렇게 썼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모든 죄의 빚을 깨끗이 청산하시고 돌아가셨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내가 할 일이라고는 한가지도 없다. 다만 무릎 꿇고 겸손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모셔들이고 주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아 영원히 주님을 찬양하는 것 밖에 없다.”

사람들은 구원을 얻는 길이 너무 쉽고 단순하여서 이를 잘 영접지 않습니다. 그리고 구원을 얻기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해야 되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양을 잘 치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구원을 취소하시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회의에 빠집니다. 사람들은 주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은혜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합니다. 용서의 사랑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죄의식에 시달리며 괴로와 합니다. 특히 반복해서 죄를 지을 때 깊은 불의에 빠져 주님께 용서를 구하는 것이 너무 염치 없는 것 같이 생각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어떤 몹쓸 죄를 지었다 할찌라도 십자가에서 다 용서해 주셨습니다. 과거에 지은 죄, 현재의 죄, 반복해서 지은 죄, 미래에 지을 죄까지도 십자가에서 소멸해 주셨습니다. 그만큼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이루신 속죄의 사역은 놀라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만 믿음으로 십자가 앞에 나아가 나의 죄짐을 내려 놓기만 하면 됩니다. 히 10:19절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6)

셋째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사명을 끝까지 완수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명이 너무 부담스럽고 힘들다고 중도에서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는 것이 너무 고통스럽다고 중간에서 내려오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겨 주신 사명을 십자가에 죽기까지 완수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의 잔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으시고 다 마시셨습니다. 이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승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승리의 십자가, 영광의 십자가가 되었습니다.


Ⅲ. 예수님의 묻히심(31-42)

예수님께서 죽으신 날은 예비일이므로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위해 빌라도에게 시체를 치워주기를 요청했습니다. 군병들이 가서 예수님과 함께 못박힌 두 죄수의 다리를 꺾어 빨리 죽게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했습니다. 대신에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쏟아졌습니다. 이로써 우리의 더러운 죄를 씻는 보혈의 샘이 열렸습니다(슥13:1). 이 샘에 죄를 씻으면 어떤 더럽고 추한 죄라도 정하게 됩니다. 저자가 이를 기록한 것은 예수님이 완전히 죽으셨다는 것을 증거함으로 우리로 하여금 이를 믿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이 일이 이루어진 것은 성경의 예언이 그대로 성취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날은 금요일 오후 늦게였으므로 안식일이 되기 전에 빨리 매장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너무 가난하여서 적당한 매장지가 없었습니다. 이때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장례를 자청했습니다. 요셉은 바위로 판 무덤을 제공했고, 니고데모는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근 쯤 가지고 왔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에게 참된 용기와 믿음을 주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는 산헤드린 회원들로서 세상에서 출세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높은 사회적인 지위를 잃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자신들이 예수님의 제자임을 떳떳이 드러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인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았을 때 하늘나라의 영광의 빛이 어두운 내면을 환하게 비추었습니다. 그러자 내면의 모든 두려움이 사라지고 용기와 확신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이로써 우리의 죄도 예수님과 함께 죽고 묻혔습니다. 이제 영광스러운 부활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이로써 인류 구속 역사를 완성하시고 인류를 죄와 사망 권세로부터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더 나아가 사단의 권세를 파하시고 우리에게 참 자유를 주셨습니다. 이시간 한 분 한 분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 죄짐을 풀고 죄 사함의 은혜와 구원의 기쁨을 충만히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