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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Ⅱ부:요한복음 20:1-31(부활하신 예수님)

by Mark Yang   08/15/2019   John

Message


요한복음 Ⅱ부 제 8 강


부활하신 예수님


말씀: 요한복음 20:1-31
요절: 요한복음 20:17b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예수님은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고전15:3,4). 예수님께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다는 소식은 인류 역사상 가장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죄사함을 확증해 줍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궁극적인 승리를 약속해 줍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참된 소망을 줍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우리는 슬픔과 두려움 대신에 기쁨과 승리에 찬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심령에 역사하는 모든 슬픔과 두려움과 의심이 사라지고 부활의 산 증인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빈 무덤(1-10)

안식 후 첫 날 이른 아침이었습니다. 이날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영광스러운 부활의 아침이요, 승리의 아침이었습니다. 어두움과 절망의 밤이 물러가고 희망찬 새 역사가 시작되는 영광의 아침이었습니다.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그 곁에서 이를 지켜 보았으며 시체를 장사지내는 것도 목격하였습니다(19:25). 그후 마리아는 안식일 때문에 집에 와서 밤새도록 울었습니다. 그 다음 날도 하루 종일 울었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이 끝난 이른 아침에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시체에 향유라도 발라 드리고자 무덤으로 갔습니다. 마리아는 무덤 입구를 큰 돌로 막은 것과 또 파숫군들이 무덤을 굳게 지키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마27:62-66). 그러나 예수님께 대한 사랑과 충성 때문에 그런 것들은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마리아가 무덤에 도착했을 때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마리아는 원수들이 와서 무덤을 파헤치고 시체를 가져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황급히 베드로와 요한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이 소식을 듣고 급히 무덤으로 달려 갔습니다. 부활의 아침에 죠깅 대회가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요한이 베드로보다 젊기 때문인지 더 빨리 무덤에 먼저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무서워서 감히 무덤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구푸려 세마포 놓인 것만 보았습니다. 베드로는 달리기에는 졌지만 용기에는 지지 않고자 용감하게 무덤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맞수요 영원한 동역자였습니다. 이는 본인이 그 현장에 있지 않았더면 이렇게 사실적으로 생동감 있게 묘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저자는 이를 통해 자신이 부활의 증인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져 있었습니다. 무덤 속은 마치 자고 난 사람이 이불을 가지런히 개어 놓은 것처럼 잘 정돈되어 있었습니다. 만일 사람이 시체를 가져갔더라면 시체를 쌌던 세마포와 머리를 쌌던 수건까지 벗기고 이를 잘 정돈해 놓고 갈리는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해 줍니다. 특히 예수님의 몸의 부활을 증거해 줍니다. 예수님은 평소 말씀하신 대로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막8:31, 10:34, 14:28). 무덤이 생명의 주를 가둘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에 있는 예수님의 무덤에 가보면 “He has risen. He is not here!”라는 팻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기 때문에 무덤은 있으나 시체가 없습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의 빈 무덤 위에 세워졌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왔던 저자 요한도 베드로를 따라 무덤에 들어가 보고 희미하게나마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는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 무덤 안에 시체를 쌓던 세마포와 수건이 가지런히 개켜져 있는 사실들을 통해 초자연적인 사건이 일어난 것을 직감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은 완전치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성경에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반드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기이히 여기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영광의 빛이 그들의 어두운 심정에 비추이기 시작했습니다.

Ⅱ.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예수님(11-18)

두 제자는 집으로 돌아갔으나 마리아는 갈 수 없었습니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계속 울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혹시나 하고 울면서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님의 시체 뉘었던 곳에 앉아 있었습니다. 천사들은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고 물었습니다. 마리아는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님이 서신 것을 보았으나 눈물이 앞을 가리워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마리아가 왜 그토록 계속해서 울고 있는 것입니까? 이는 슬픔이 그녀를 사로잡았기 때문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과거 더러운 일곱 귀신에 들려 심한 괴로움을 겪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녀가 너무 추하여 멀리하고 멸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사 일곱 귀신을 쫓아내 주시고 많은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황공주와 같이 귀히 여기시고 사랑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크신 사랑으로 말마암아 마리아는 새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후부터 마리아는 모든 진심과 애정을 바쳐 헌신적으로 복음역사를 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자 모든 것이 물거품 같이 되었습니다. 선하신 예수님, 그렇게 능력 많으신 예수님도 죽음 앞에서는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은 마리아를 더욱 슬프게 하였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능력이 많고 건강하고 부족함이 없이 모든 것을 소유했다 할지라도 결국 죽는다는 사실은 우리를 근본적으로 슬프게 만듭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운명적이 되게 하고, 체념적이 되게 하고, 실패의 인생을 살게 합니다. 마리아의 슬픔은 겉으로 볼 때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졌기 때문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근본 뿌리는 죽음입니다. 인간의 모든 비극은 죽음으로 인해 생깁니다. 죽음은 모든 것을 무효로 만들고, 모든 것의 가치를 부정하고, 모든 것의 존재를 말살시켜 버립니다.

마리아는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사랑하고 복음역사를 충성스럽게 섬겼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을 때 해결되지 않는 슬픔 문제를 안고 슬픈 신앙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가운데도 충성스럽게 복음역사를 섬기지만 어딘지 모르게 우수에 찬 얼굴을 하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 슬픈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조금만 슬픈 일이 생겨도 잘 울고 깊은 한숨을 쉬며 신세 한탄을 합니다. 운명과 한을 안고 슬픈 신앙생활을 합니다. 이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슬픈 마리아를 어떻게 도와 주셨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은 가장 먼저 마리아에게 나타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 말씀은 더 이상 울 필요가 없는데 왜 우느냐는 것입니다. 또한 왜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로 눈 앞에 두고도 믿지 못하고 울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마리아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동산지기인 줄 알고 당신이 시체를 옮겨 갔거든 알려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마리아야!” 하고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마리아야!” 이는 마리아를 잘 아시고 양의 이름을 부르는 선한 목자의 음성이었습니다. 이 음성은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전이나 부활하신 후나 조금도 변함이 없으신 예수님의 사랑의 음성이었습니다. 이 음성은 마리아의 슬픈 눈물을 씻어주시는 따뜻한 위로의 음성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죽음을 이기시고 모든 슬픔과 운명 문제를 해결하신 부활하신 예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이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순간 영적 눈이 떠졌습니다. 마리아는 돌이켜 “랍오니여!”라고 외쳤습니다.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순식간에 눈물이 그치고 슬픔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심령에는 하늘나라의 기쁨이 솟아났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때만이 인생의 슬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어려운 일을 만날 때 사람들에게 위로를 구하다가 실망하고 마음에 상처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우리를 위로할 수 없습니다. 오직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만이 우리를 위로하실 수 있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마리아는 너무 기뻐 예수님을 만지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기 때문에 나를 만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영광스러운 몸이었습니다. 여기서 만진다는 것은 “비끄러 맨다”는 뜻이 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꽉 붙잡고 다시는 놓지 않을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예수님께서 왜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이라고 했을까요? 이는 예수님의 아버지 하나님이 바로 나의 아버지 하나님이 되심을 말해 줍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개개인의 아버지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 하나님이 되시기 때문에 나를 잘 아시고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과 비교하면 안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아버지께로 가야 하셨습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첫째로,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만유가 회복됩니다.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세상은 영적 질서가 파괴되고 하나님의 주권이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심으로 하나님의 주권이 회복되고 만유가 회복됩니다.(고전15:24-28)

둘째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줍니다. 예수님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이라고 하심으로 자신과 제자들을 동일시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그들도 예수님과 같이 부활하여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다는 소망을 심어 주셨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달려가서 “내가 주를 보았다!”,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증거했습니다. 이는 기쁨과 확신과 소망에 찬 음성이었습니다.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더 이상 슬픈 마리아가 아니라 기쁜 마리아가 되었습니다.

Ⅲ. 제자들에게 나타내신 예수님(19-23)

한편 제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1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부활하신 바로 그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두려워 방문을 꼭꼭 닫고 합심하여 떨고 있었습니다. 남자의 남자다움은 용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혔을 때 방문을 닫고 떠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두려움은 생각을 위축시키고 마음의 문을 닫게 합니다. 잘 자라던 형제가 갑자기 마음이 완악해져서 말씀 공부 안하겠다고 선언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그 마음에 두려움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이 생기면 사람이 소심해지고 목소리가 작아집니다. 생각하는 것도 째째해지고 자기 중심적이 되어 버립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면 모든 것이 두렵고 산다는 것 자체가 두렵습니다. 두려움은 심리적인 현상이 아니라 두려워 하는 영인 사단이 심어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두려움의 뿌리도 바로 죽음입니다. 이 두려움은 반드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야 해결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나타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하시며 평강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며 그들에게 부활의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이를 보고 기뻐했습니다.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심령에 강하게 역사하던 두려움이 사라지고 기쁨과 평강이 생겼습니다.

그후 예수님은 제자들을 선교사로 삼으시고 세상에 내 보내셨습니다. 21b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은 제자들의 사도의 권위가 어디에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누구로부터 보냄을 받는가에 따라 그 권위가 달라집니다. 인간이나 단체로부터 보냄을 받을 때 그것은 절대적이 되지 못하지만,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을 때 그것은 절대적이 됩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께로부터 세상에 복음 전파의 사명을 띠고 보내심을 받은 예수님의 전권대사들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어떻게 엄청난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까? 22절을 보십시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저희를 향하여 숨을 내쉬며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으라.” 성령은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의 원천입니다. 능력이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임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성령이 임했을 때 마음의 두려움이 사라지고 대적이 심한 세상에서도 능력있게 복음역사를 감당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세상에 나가서 감당해야 할 사역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23절을 읽겠습니다.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제자들에게 죄사함의 권세가 있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는 성경 전체의 사상에 위배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복음 증거자들을 통해 일어날 사죄의 역사를 말해 줍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인류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부활로 이를 인치셨습니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죄의 은혜를 덧입고 영원한 파멸에서 구원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기쁜 소식을 전할 증거자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증거자로 삼으셨습니다. 그들을 통해 세상 만민에게 복음을 전함으로서 인류 구속 역사를 이루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적극적으로 사죄의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그때 그들의 증거를 통해 성령께서 능력으로 역사하사 사죄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만히 있으면 아무런 역사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근대 선교의 아버지 William Carey가 살던 18C 영국의 분위기는 세계선교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하시므로 우리가 나서서 할 필요가 없다는 무사 안일주의가 팽배해 있었습니다. William Carey는 이런 시대에 도전하여 세계선교는 바로 크리스챤이 절대적으로 감당해야 할 사명임을 역설하고, 이방인들을 영적 무지와 우상숭배에 방치해 두는 것은 큰 죄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방안에 세계 지도를 걸어놓고 날마다 기도했습니다. 또 구체적으로 인도 선교사로 가기 위해 구두 수선을 하면서 단어를 외웠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 그리고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Expect great things from God. Attempt great things for God) 우리에게는 세계 각처에 나아가서 복음을 전하고 제자 양성하는 위대한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고,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시도할 때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놀랍게 역사하실 것입니다.

Ⅳ. 도마에게 확신을 심으신 예수님(24-29)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공교롭게도 도마가 없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며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있게 증거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두려움에 사로잡혀 사시나무 떨듯이 떨던 제자들이 마음에 큰 기쁨과 평강을 가지고 확신있게 증거할 때 도마는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더군다나 한 명도 아니고 열 명의 증거는 믿을만한 증거였습니다. 그러나 도마는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의 말은 믿을 수 없고 내가 직접 보고, 만지고, 경험해 보지 않고서는 절대로 믿지 않겠다는 경험주의자요 회의주의자였습니다. 그의 말에는 강한 자존심과 교만이 숨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지 여드레 후에 의심하는 도마 한 사람을 위해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도마의 말을 괴씸하게 생각하고 만나자마자 “왜 너는 항상 의심만 하느냐?” 하고 책망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도마를 깊이 이해하셨습니다. 그가 믿음이 연약하여 의심하는 경향이 있음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도마에게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자국을 보여 주시고 직접 손을 넣어 만져보게 하셨습니다. 이로써 마음의 의심을 풀어 주시고 부활의 믿음을 심어주셨습니다. 그리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도마를 지극히 사랑하셨습니다. 도마는 이 예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확신에 찬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님은 바로 도마의 주요 도마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그 후부터 도마는 의심의 사람에서 확신의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는 후에 인도에 가서 복음을 확신있게 전하다가 순교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도마와 같이 의심하는 경향이 있는 자들을 무시하고 비판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의심하는 자도 의심하고 싶어서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연약하여 자신도 원치않게 의심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롬14:1에서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같이 도마와 같은 자도 마음에 품고 그 의심하는 바를 조근조근 풀어 주어야 합니다.

2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도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이 말씀은 부활의 증인들의 증거를 통해 믿는 자들은 복되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히11:1). 보고 믿을려고 할 때 우리는 깊은 믿음의 세계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칼빈은 “믿음이란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만이 믿음에 이를 수 있고, 더 깊은 믿음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롬1:17)

30,31절을 보십시오. 저자가 이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 함입니다.

결론적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은 슬퍼하는 마리아에게 기쁨을 주시고,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평강을 주시고, 의심하는 도마에게 확신을 심어 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 개개인의 주가 되시고 하나님이 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