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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Ⅱ부:Q9요한복음 21:1-25(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by Mark Yang   08/15/2019   John

Message


요한복음 Ⅱ 부 제 9 강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말씀: 요한복음 21:1-25
요절: 요한복음 21:15a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21장은 요한복음의 에필로그입니다. 본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디베랴 바다에 나타나사 베드로와 사랑의 관계성을 회복하시고 그를 양무리의 목자로 세우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구속역사의 바톤을 수제자 베드로에게 넘겨 주십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 디베랴 바닷가로 가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음성을 들읍시다.

Ⅰ. 와서 조반을 먹으라(1-14)

첫째, 실패를 회복시켜 주신 예수님(1-6). 1절은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 후’란 20장에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여러 사람에게 자신을 나타내신 것을 의미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먼저 슬피 울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사 눈물을 닦아 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사 평강을 주시고 또한 사죄의 메시지를 전하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의심 많은 도마에게 나타나사 십자가에 못박히신 상처의 흔적을 보여 주심으로 의심병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제자들의 마음에 부활신앙을 심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장래 문제로 인한 염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시몬 베드로와 도마와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서로 의지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며칠 후 그들은 세상의 차가운 현실에 부딪혔습니다.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실 때는 여인들이 섬겨 주었기 때문에 끼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안계시자 이제는 아무도 섬겨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할 수 없이 먹고 살기 위해 길을 찾아야 했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야 쓰것어. 먹고 살아야제.” 그러자 그들도 “우리라고 별 수 있간디. 함께 가더라구” 하며 뒤따라 갔습니다. 그들은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크게 낙심이 되었습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느니라” 하시는 주님의 말씀이 귓가에 쟁쟁 울렸습니다.

3년 전 바로 이곳에서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베드로는 낭패와 실의 가운데서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그는 밤이 맟도록 수고하였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는 피곤하고 배가 고팠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매일 고기 낚는 무의미한 생활에 지쳐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 시몬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눅5:4). 그런데 이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시몬이 이 말씀에 단순히 순종했을 때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과거 베드로는 아무런 꿈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에 그저 열심히 일하며 살아왔습니다. 그에게는 인생이 갈릴리 바다의 거품같이 무의미하였습니다. 그에게는 참된 삶의 희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고기 잡는 것을 통해 예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체험하게 되었을 때 그는 예수님 안에서 꿈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이 꿈 때문에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 가시자 그의 꿈은 산산 조각이 났습니다.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른 것은 완전히 헛일 같이 보였습니다. 거기에다 그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한 것 때문에 자신에 대해서도 절망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주님을 배반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깊은 실의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서도 그는 여전히 먹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동료들과 함께 옛 직업으로 돌아가 고기를 잡기 위해 배에 올랐으나 그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했습니다(3b). 베드로에게는 모든 것이 끝장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께는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인간적으로 절망적으로 보이는 때가 예수님께는 희망의 때입니다. 예수님은 생전에 부활 후에 갈릴리에서 제자들과 만나시겠다고 약속하신대로 제자들을 찾아오사 새벽 바람을 맞으면서 디베랴 바닷가에서 서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애로운 눈빛으로 제자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곳에 서 계신 분이 예수님이신 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너무 지쳐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책망하실 수 있는 근거는 많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그들을 두 번이나 심방하셔서 자신이 부활하셨다는 확실한 증거를 보여 주시고 또한 사죄의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과 이를 감당할 수 있는 성령을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물고기를 잡으러 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찾아 오셔서 “너희들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거야? 훈련을 더 받아야 되겠어”라고 책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책망 대신에 그들의 실패를 만회시켜 주셨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애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하시며 부르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없나이다”라고 힘없이 대답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는 아침이었기 때문에 고기잡이에 적합한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순종했을 때 그물을 들 수 없을 만큼 153 마리나 되는 많은 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고기를 잡도록 도와 주신 두번째 사건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성공한 자에게는 상을 주고 실패한 자에게는 벌을 줍니다. 베드로는 어부로서나 제자로서 다 실패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를 조금도 개의치 않으시고 오히려 그가 많은 고기를 잡도록 하심으로 새로운 인생을 출발할 수 있도록 도와 주셨습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결코 실패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실패와 절망 중에 예수님께 나아 오기만 하면 우리 주님께서는 실패를 만회시켜 주시고 희망찬 새 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둘째, 제자들과 사랑의 관계성을 회복하신 예수님(7-14). 7절을 보십시오. 요한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고기를 많이 잡도록 하신 분이 바로 사랑하는 주님이심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베드로에게 “주님이시다”고 외쳤습니다. 이 말을 들은 베드로는 무엇을 했습니까? 보통 물에 들어갈 때는 옷을 벗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반대로 옷을 벗고 있다가 겉옷을 입고 물속에 뛰어 들어 갔습니다. 베드로는 언제나 유별납니다. 베드로의 이런 행동은 무의식 가운데서 얼마나 예수님을 깊이 사랑하고 존경하고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다른 제자들은 작은 배를 타고 고기든 그물을 끌고 왔습니다. 그들이 육지에 올라와 보니 숯불이 발갛게 타고 있었습니다. 이 숯불은 사랑의 숯불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숯불과 같이 발갛게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그 숯불 위에는 생선이 지글지글 타고 있었으며 떡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배고프고 지친 제자들을 위하여 친히 아침 식사를 요리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 오도록 하셔서 즉석 생선찌게를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까지 섬기는 종으로서 죄인들을 섬기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은 마땅히 인생들로부터 존귀와 영광을 받으셔야만 하셨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여전히 종과 같이 제자들을 위하여 친히 아침식사를 요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허물과 실수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사랑은 그들의 허다한 허물과 실수를 모두 덮어버렸습니다(벧전4:8). 예수님은 그들을 초청하셨습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자애로운 어머니와 같이 아침 식사를 요리하시고 “와서 조반을 먹으라”고 하시다니 이는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배반자는 원수보다 더 밉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장 사랑하시던 수제자 베드로가 세번이나 주님을 배반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마땅히 그를 벌해야 했습니다. 아니 적어도 그가 당황하도록 쌀쌀한 눈초리로 노려 보기라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오히려 그를 위하여 조반을 준비하시고 아름다운 비치 파티를 베푸셨습니다. 베드로의 완악한 마음은 예수님의 사랑에 녹아 내렸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랑에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위대한 힘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교만은 겸손으로만이 이길 수 있는 것과 같이 완악한 마음은 사랑으로만이 녹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와서 조반을 먹으라”고 말씀하실 때 주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고 묻는 자가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을 초청하신 분이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주님이신 줄 알았습니다. 제자들은 그분이 바로 부활하심으로 영광스러운 왕이 되신 분이심을 알았습니다. 제자들은 바로 그 분이 어저께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자기들을 사랑하고 계시는 사랑의 주님이심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 비치파티는 은혜가 충만합니다. 이는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사랑의 잔치였습니다. 후에 사도 요한은 이 사랑의 잔치를 요한계시록 3:20b에서 하늘나라의 잔치와 연관시켰습니다.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준비하신 조반을 먹은 후에야 비로소 영적인 눈이 떠져서 영광스러운 부활의 주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제자들에게 무조건적이고 변함없는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Ⅱ.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15-17)

15a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질문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왜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을까요? 예수님은 그에게 다른 많은 것을 물어 보실 수 있었습니다. “동역자와 장모님은 안녕하시냐? 그때 왜 세 번 나를 부인했지?”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그런 질문을 하지 않으시고 다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로, 예수님은 베드로와 새로운 사랑의 관계성을 맺기를 원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에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한 것은 사실입니다. 한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또 다른 때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그러나 이렇게 큰 소리치던 베드로가 예수님의 수난 기간에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그가 왜 실패했을까요? 이는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고 그의 인간적인 충성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하여 그와 새로운 사랑의 관계성을 맺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이런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 질문은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로서는 참으로 대답하기 힘든 질문이었습니다. 그는 “예,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대신에 그는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내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라는 뜻입니다. 그가 어떻게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요? 이는 그가 비치 파티를 통해서 예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찾아 오셔서 조반을 지어 주시고 “와서 조반을 먹으라”고 하실 때 그의 마음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녹았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그 순간 예수님을 통해 그의 마음에 심겨진 하나님의 사랑은 싹이 나서 탐스러운 꽃봉오리처럼 피어났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대한 사랑고백을 하기 전에 먼저 예수님의 사랑을 심령 깊이 영접했습니다. 그가 예수님의 사랑을 영접했을 때 마음의 모든 슬픔과 운명이 사라졌습니다. 장래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대신에 하늘 나라의 기쁨과 평화가 그의 심령에 강같이 흘렀습니다. 그가 예수님의 사랑을 영접했을 때 그의 모든 인생 문제는 순식간에 해결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길은 먼저 예수님의 사랑을 깊이 영접하는 것임을 배웁니다. 요한1서 4:19절은 말합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였음이라.” 사람에게는 많은 문제가 있는 것 같지만 오직 두가지 뿐입니다. 하나는 죄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 문제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받기를 원합니다. 사람은 사랑을 먹고 사는 존재입니다. 사람은 사랑을 받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하여도 행복을 느끼지 못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는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할 때 아무리 인간의 사랑을 많이 받아도 전혀 사랑을 받지 못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사랑과 빛과 생명을 다루고 있습니다. 사랑은 생명의 근원이요, 빛은 생명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영접해야만 합니다. 그때 우리는 진정으로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심령 깊이 영접할 때 하나님의 사랑은 내 마음에 샘이 되어 끊임없이 솟아나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사랑이 필요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베드로가 진실된 사랑 고백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여기서 ‘이 사람들’ 또는 ‘이것들’ 이란 예수님+α를 의미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것들도 사랑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르면서 마음 속 깊이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랐을 때 직장과 가정과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꿈만은 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의 꿈은 지상 메시야 왕국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 꿈 때문에 모든 어려움을 참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사랑했지만 동시에 꿈도 사랑했습니다. 그가 이런 인간적인 꿈을 가지고 있는 한에는 예수님께 대한 순수하고 진실된 애정고백을 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베드로를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그와 같이 은밀히 꿈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네가 이 사람들(또는 이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질문하심으로 꿈을 부인하고 예수님께 진실된 사랑 고백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베드로를 하나님의 양무리의 목자로 세우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세번이나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처음 두번은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세번째 질문하실 때는 마음에 근심이 생겼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같은 질문을 세번이나 하시는가? 내가 예수님을 세번 부인했기 때문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구에게든지 이런 식으로 압력을 가한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번만은 매우 심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실 때마다 동시에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번이나 같은 질문을 반복하신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베드로는 예수님의 양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모든 허물과 약점을 감당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목자의 삶을 보여 주심으로 그를 양무리의 목자로 세우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예수님의 뒤를 이어 하나님의 양무리를 돌보는 선한 목자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나타내는 길은 예수님의 양을 돌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양을 먹이는 목자의 삶은 희생과 아픔이 따릅니다. 그러나 이는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삶입니다.

Ⅲ. 영광스러운 삶과 죽음(18-25)

예수님은 베드로와 사랑의 관계성을 회복하시고 그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사명인으로서 어떤 삶을 살게 될 것인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않는 곳으로 데려 가리라.” 과거 베드로는 어린 양처럼 살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대로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양무리의 목자가 되면 많은 인간적인 자유를 잃어야 했습니다. 심지어는 옷입는 자유까지 잃어야 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대로 옷을 입을 수가 없었습니다. 또 그가 원하는대로 갈 수 없었습니다. 그는 주님의 영광을 위해, 또 주님의 양떼를 위해 옷을 입어야 했습니다. 베드로가 얼마나 큰 희생을 해야 했습니까? 그러나 희생 없이는 주님께서 쓰실 만한 좋은 목자가 될 수 없습니다. Albert Schweitzer 박사는 20세기의 성자로 알려졌습니다. 이는 그가 가난한 아프리카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전 생애를 희생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학문의 자유, 음악가로서의 자유, 경제의 자유를 희생했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아프리카 정글에서 예수님의 생애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19a절을 보십시오. “이 말씀을 하심이 베드로가 어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르키심이러라.”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베드로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하고 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의 죽음은 삶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어떤 죽음을 죽는가 하는 것은 바로 어떠한 삶을 사는가 하는 것입니다. 인생은 일회적으로서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가장 고귀합니다. 이 고귀한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또 사람이 죽음을 어떻게 죽는가 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죽는다고 하면 어쩐지 부담스럽게 들리지만 실상 이는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우리가 끝없는 고뇌와 고통과 더러운 죄 가운데서 죽느니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죽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그 후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9b). 예수님은 이때까지 베드로에게 가장 영광스러운 사명인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라고 명령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아 사명인의 삶을 살 때 우리의 삶은 영광스러운 삶이 됩니다. 베드로는 자기만 그런 삶을 사는 것이 억울하게 생각되어 요한을 걸고 넘어졌습니다.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너는 너고 요한은 요한이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생애를 주님께 드리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격적인 결단을 요구하는 개인적인 일입니다.

요한복음 에필로그를 공부해 볼 때 참된 행복은 예수님과 사랑의 관계성을 가질 때 옴을 배웁니다. 또한 참된 행복은 사명인의 인생을 살 때 온다는 것도 배웁니다. 예수님은 각자에게 질문하십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내 어린 양을 먹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