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제 3 강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말씀: 마가복음 1:21-39
요절: 마가복음 1:38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우리는 지난 강의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 갈릴리 촌어부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신 역사적인 사건을 공부했습니다. 오늘 강의에서는 사명인 예수님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본문에는 사명인 예수님의 바쁜 생활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주로 두 가지 일을 하셨습니다. 첫째는 말씀을 가르치신 것이요, 둘째는 병든 자와 귀신 들린 자를 고쳐 주신 것입니다.
Ⅰ. 말씀의 권세자 예수님 (21-28)
예수님께서 첫 번 제자들을 부르신 후 그들과 함께 가버나움에 들어 가셨습니다. 가버나움은 당시에 동서 교통의 요충지로서 인구가 조밀하고 어업이 번창한 도시였습니다. 이 곳은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의 중심지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곳에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회당은 유대인이 모여서 성경을 공부하고 예배를 보는 장소입니다. 이 곳에서는 평신도도 자유롭게 성경을 가르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유롭게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메시야로서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많은 일을 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이는 비생산적인 일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이야말로 그 어떤 일보다도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일임을 아셨습니다. 인간이 불행한 것은 물질이 없기 때문이나 환경이 어렵기 때문이 아니라 그 마음에 하나님의 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진리가 없기 때문에 사람이 왜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알지 못하고 무의미하고 허무한 인생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진리가 없기 때문에 물질과 육신의 노예가 되어 짐승과 같이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진리가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이 상대적이 되어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지 못하는 가치관의 혼란 속에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진리가 없기 때문에 참된 희망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절망을 느끼며 어둡고 슬프고 운명적인 인생을 살아갑니다. 인간은 영혼의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리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심으로 그들 마음에 하나님의 진리를 심으셨습니다. 인생의 존재 의미와 목적, 참된 가치관,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망, 이 땅에서 감당해야 할 사명 등 하나님의 법도를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첫째로, 예수님의 말씀은 뭇사람을 감동시켰습니다. 22절을 보십시오. “뭇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랐습니다. 놀랐다는 것은 충격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서기관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영적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서기관들은 율법에 정통한 박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백성들에게 자기들도 지키기 힘든 율법과 장로들의 유전을 가르쳤습니다(7장). 율법의 정신은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의 정신은 무시하고 율법의 규례로 사람들을 얽어매었습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1261개조에 달하는 규례를 만들어 이를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이들의 가르침은 복잡하고 어려웠습니다. 그들은 낡은 가죽 부대와 같이되어 아무런 생명력이 없었습니다. 종교가 그 정신을 잃고 형식에 얽매여 굳어 버릴 때 큰 해독을 끼치게 됩니다. 러시아 정교는 오랫동안 성직자들이 두 손가락으로 성호를 긋는 것이 옳은가, 세 손가락으로 성호를 긋는 것이 옳은가? 하는 문제로 다투었습니다. 두 손가락으로 성호를 그으면 이단으로 몰리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종교가 형식적이 되고 부패하게 되었을 때 백성들은 많은 고통을 당하고 마침내는 공산주의에 먹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어떠했습니까? 예수님은 뭇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쉽게 가르쳤습니다. 까다로운 율법의 규례나 장로들의 유전보다도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의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사람들의 심령을 찔러 쪼갭니다(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죄로 고통하는 자들에게 사죄의 은혜를 주고, 삶의 의욕을 상실한 자들에게는 삶의 희망을 불어넣어 줍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이 얼마나 단순하면서도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고 소망을 심어 주는 말씀입니까? 예수님은 어찌하든지 인생들을 구원코자 하시는 상한 목자의 심정으로 충만하셨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의 가르침은 감동력이 있었고 생명력이 넘쳤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말씀은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시자 마침 회당에 앉아 있던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말씀을 듣고 괴로워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그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거룩한 자임을 알았을 뿐 신앙고백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해서 적대감과 증오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또 그는 예수님을 심히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마귀들을 멸하실 수 있는 영적 권세를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그가 예수님과 관계성 맺기를 꺼려하고 두려워하는 근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의 소심한 성격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의 반항적인 기질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이는 그 속에 더러운 귀신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현대 심리학이나 정신 분석학에서는 귀신의 존재를 인정치 않고 단지 정신 현상으로만 봅니다. 그래서 이를 정신요법(psycho therapy)이나 물리요법으로 치료해 보고자 애를 쓰지만 결코 낫지 않습니다. 인격적인 하나님이 존재하듯이 귀신도 존재합니다. 귀신은 영이기 때문에 눈으로 볼 수 없지만 영적인 사람은 귀신의 실체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귀신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 권세와 그의 말씀입니다. 특히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우리가 양들과 말씀을 공부할 때 처음에는 잘하다가 나중에는 반발하고 관계성 맺기를 두려워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때 우리는 내가 혹시 잘못한 것이 아닌가 하고 자학하거나 아니면 양을 괘씸하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는 그 속에 있는 귀신이 말씀을 받고 괴로워 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때 물러나거나 타협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이름 권세를 의지하고 계속해서 말씀으로 도전해야 됩니다.
예수님은 반발하는 그를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25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셨습니다.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예수님께서 보실 때 그 사람을 못쓰게 만들고 있는 것은 그 속에 역사하는 귀신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와 귀신을 분리해서 보시고 그를 사로잡고 있는 귀신의 세력을 말씀으로 쫓아내셨습니다. 더러운 귀신은 그 사람으로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왔습니다. 이를 본 사람들은 다 놀라 말했습니다.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 즉 순종하는도다”(27). 예수님의 소문이 온 갈릴리 사방에 퍼졌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괴롭히는 귀신의 세력을 제어하실 수 있는 영적 권세자가 되십니다.
Ⅱ. 각색 병든 자를 고치신 예수님 (29-34)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신 후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심방을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집을 심방 하심으로 그들의 형편을 알고 인격적인 관계성을 맺고자 하셨습니다. 야고보과 요한은 점심 때가 되어 배가 몹시 고팠을 것입니다 그들은 시몬의 집에서 시몬의 장모가 해 주는 맛있는 점심을 먹을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가 보니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었습니다. 집안 분위기가 무겁고 어두웠습니다. 제자들은 점심 먹을 희망이 사라졌습니다. 시몬의 장모가 왜 열병에 걸렸는지 알 수 없습니다. 짐작컨대 시몬이 고기는 잡지 않고 예수님만 따라 다니자 화병이 난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아가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자 열병이 떠났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손길은 한 늙고 병든 쓸모 없는 자를 살렸습니다. 그러자 시몬의 장모는 일어나 감사의 표시로 맛있는 육계장을 끓여서 점심을 대접했습니다.
이제 해가 뉘엿뉘엿 서산에 기울고 온 세상에 어두움이 깃들기 시작했습니다. 해가 지면 사람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집에 돌아가 쉬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루 종일 일하셨지만 조금도 쉴 수가 없었습니다. 유대인의 안식일은 해가 지면 끝나게 됩니다. 사람들은 해가 저물기를 기다렸다가 모든 병자와 귀신들린 자를 예수님께 데려 왔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지 온 동네가 문 앞에 모일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각색병으로 고통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세상에는 각색 병든 자들이 많습니다. 위장병부터 시작해서 장염, 간염, 신우염, 치질, 축농증, 결핵, 관절염, 갑상선, 암 등 실로 갖가지 병으로 신음합니다. 과거 우리 나라는 가난하기 때문에 제대로 못 먹어서 질병에 많이 시달렸습니다. 그러나 요사이는 너무 잘 먹기 때문에 고혈압, 당뇨병, 심장병, 비만증과 같은 병에 걸려 고통합니다. 더 잘 먹고 잘 살게 되니까 쾌락을 추구하다가 성병에 걸려 남몰래 고통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또 사회가 도시화가 되어 복잡해지자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정신병 환자들이 날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또 은밀히 죄를 짓고 죄의식 때문에 돌아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정신 분열증같이 인격에 이상이 있는 자도 있고, 조울증이나 노이로제와 같이 정신 상태가 좋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그 특징이 불안하고 초조하고 우울합니다.
또한 정신병과는 다른 내면의 병이 있습니다. 조금만 힘들면 잘 드러눕는 중풍병, 사람을 잘 꼬시고 병들이는 사마리아 기질병, 자기 것을 잘 꾸리는 세리병, 모든 것을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는 외아들병, 사랑을 받지 않으면 힘을 쓰지 못하는 막둥이병, 모든 것을 운명적으로 생각하는 운명주의병, 나는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패배주의병, 봄이 되면 봄바람이 들고, 가을이면 가을바람이 드는 계절병 등 갖가지 내면의 고질병들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영혼의 병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불신병과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의심병, 하나님과 동등 되고자 하는 교만병이 있습니다. 그런데 영혼의 병은 육신의 병이나 정신병과는 달리 고통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이 병을 앓고 있는지조차 모릅니다. 이 병은 고통이 없고 또 눈에 보이지 않게 때문에 소홀히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우리의 영혼을 파멸에 이르게 하는 가장 무서운 병입니다. 영혼의 병은 죄로부터 옵니다. 이 병에 걸린 자는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지게 됩니다.
병이 우리 인생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어떠합니까? 사람이 병에 걸리게 되면 고통스럽습니다. 자신만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고통을 줍니다. 또한 사람이 병에 걸리게 되면 삶의 의욕과 희망을 상실하게 되고 어둡고 운명적이 되어 버립니다. 또한 한계적인 인생을 살게 되고 결국에는 쓸모없는 자가 되어 버립니다. 병은 기쁨은 앗아가고 행복을 앗아갑니다. 인간은 병으로 인해 불행한 인생을 살아갑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러한 병에서 고침을 받을 수 있습니까? 육신의 병은 병원에 가면 고침을 받을 수 있지만 정신병이나 내면의 병, 영혼의 병은 고침 받을 수 없습니다. 육신의 병도 병원에서 고칠 수 없는 것이 많습니다. 3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각색 병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어 쫓으시되” 눅4:40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셨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나아오는 자들을 도매금으로 취급하지 않으시고 한 사람 한 사람 인격적으로 영접하시고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영적, 육적 의사가 되셔서 영육간에 모든 질병을 치료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병고침을 받으려면 먼저 내가 병든 자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고치기 힘든 병자는 내가 병들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자입니다. 내가 병든 자라는 인식과 함께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병들었다고 부담스러워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병든 그대로를 영접하시고 우리를 깊이 동정하시고 또 우리의 고통에 동참하십니다. 마태복음의 저자 마태는 이기심으로 내면이 깊이 병든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치료해 주심으로 나음을 받았습니다. 그는 각색 병든 자를 고쳐 주신 예수님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마8:17). 예수님은 우리의 병을 짊어지심으로 우리가 영육간에 건강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어떤 고질병도 고칠 수 있는 치료의 능력자가 되십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고침을 받고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지금 러시아에 선교사로 계신 Augustine Hope Song선교사님은 과거 인본주의와 허무주의로 병든 인생을 살았습니다. 틈만 나면 현실을 도피하여 어디론가 조용한 곳으로 사라지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방학 때마다 다리를 다치게 한다거나 수술로 도망을 못 가도록 묶어 놓으시고 그의 병든 내면을 치료하셨습니다. 그는 이제 누구보다도 복음적이고 강건한 자가 되어 믿음으로 러시아 땅에 나아가 생명력이 넘치는 개척자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브라질에 선교사로 가신 박엘리야 선교사님은 과거 아버지와 이모부의 죽음으로 깊은 허무주의의 병을 앓고 학과 공부의 실패로 깊은 패배주의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합병증 환자였습니다. 아무도 그의 병든 내면을 치료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다만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갔을 때 주님께서는 서제임스 목자님을 통하여 그를 살려 주시고 그의 병든 내면을 깨끗이 치료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그는 한의대 조상으로서 많은 열매를 맺고 이제는 한의사로서 안정된 삶을 버리고 브라질에 선교사로 나아가 위대한 개척자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조상철 목자님은 처음 이곳에 나왔을 때 축농증, 기관지, 허리 디스크, 치질, 환청증세, 강박관념 등 갖가지 질병에 시달렸습니다. 그의 별명은 걸어다니는 종합병원이었습니다. 그는 물구나무서기를 하면 치질이 낫는다는 말을 듣고 아침마다 물구나무서기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세상만 거꾸로 보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꾸준히 말씀을 공부하고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갔을 때 주님께서 그의 모든 질병을 치료하사 이제는 영육간에 건강한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질병도 고칠 수 있는 전능한 분이십니다.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신 예수님은 인생들의 메시야가 되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Ⅲ. 전도하러 오신 예수님 (35-39)
예수님은 전날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쉬지 않고 일하셨습니다. 말씀을 가르치시고 심방 가시고 각색 병든 자들을 일일이 고쳐 주셨습니다. 이렇게 일하고 나면 완전히 녹초가 되어서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기 힘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미명에 일어나셔서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셨습니다(35). 예수님은 육신이 피곤할 때 긴 수면보다 영적으로 재충전하기 위해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새벽기도로 하루를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많은 일을 하시고도 지치지 않으시고 능력있게 메시야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새벽 기도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새벽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고 믿음을 새롭게 하시고 위로부터 능력과 지혜를 덧입으셨습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시기를 마치자 시몬과 그 동역자들이 예수님의 뒤를 따라와 말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인기가 올라가자 어깨가 으쓱해졌습니다. 자신들도 유명 인사가 된 양 기분이 좋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바로 이 때가 바람을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생각하고 흥분해 있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인기에 편승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38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로 가자. 거기서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의 비전입니다. 예수님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다른 가까운 마을들은 어떤 곳입니까? 이는 복음을 듣지 못하고 복음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곳입니다. 오늘날 세계는 교통의 발달로 지구촌이 되었습니다. 모스크바는 10시간의 비행기를 타면 갈 수 있는 가까운 마을입니다. 미국, 중국, 독일, 불란서, 브라질, 인도, 아프리카 등 세계는 모두 가까운 마을들입니다. 이러한 마을들에는 복음을 전혀 듣지 못한 자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면 가야 됩니다. 가지 않으면 아무런 역사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가서 복음을 전할 때 생명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온 갈릴리에 다니며 복음을 전하심으로 갈릴리가 복음화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온 세계에 복음을 전함으로 세계가 복음화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양성하여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막16:15)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죄사함의 복음이요 화평의 복음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듣고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셨습니다.
둘째로, 전도의 사명에 충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이 병 고침을 받고자 할 때 사람들의 요구에 말려들어 중심을 잃기 쉬웠습니다. 사람들이 요구하는 대로 하여 갈릴리 메디칼 센타를 만들어 많은 돈을 벌고 예수님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명의사가 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세상 인기와 명예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길을 가지 않으시고 전혀 인기가 없는 전도인의 길을 가셨습니다. 전도의 사명은 인기가 없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습니다. 인기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비난을 받고 오해받고 핍박을 받습니다. 전도인의 길을 가고자 할 때 현실적으로 많은 아픔이 따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끝까지 이 길을 가셨습니다. 왜냐하면 이 길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부터 받은 바 사명의 길이요 또한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는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전도의 사명을 굳게 지키심으로 가장 위대한 사명인이 되셨습니다.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