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제 4 강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말씀 : 마가복음 1:40-45
요절 : 마가복음 1:41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한 문둥병자를 깨끗케 해 주신 사건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몸과 마음이 깨끗한 순결한 인생을 살기 원합니다. 그러나 원치 않게 죄로 말미암아 문둥병자와 같이 추하고 더러운 인생을 살아갑니다. 우리가 어떻게 추한 죄를 씻음 받고 순결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까? 오늘 말씀은 그 비결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나아온 한 문둥병자를 통해 죄로 인해 만신창이가 된 인간 실존의 모습을 봅니다. 또한 문둥병자를 민망히 여기시고 깨끗케 해 주신 예수님을 통해 죄인을 향한 예수님의 깊은 사랑을 봅니다. 이 시간 우리 주님의 크신 구속의 사랑이 한 분 한 분의 심령에 충만히 임하시기를 기도합니다.
Ⅰ. 예수님께 꿇어 엎드린 한 문둥병자 (40)
(i) 온 몸에 문둥병 걸린 문둥병자
예수님께서 온 갈릴리에서 다니시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시고 한 동네에 계실 때였습니다. 이때 한 문둥병자가 예수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간구했습니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이 문둥병자는 눅5:12절에 보면 온몸에 문둥병이 들린 자였습니다. 문둥병은 만성 육아 종성 질환으로서 팔레스타인 지방과 같이 덥고 못 사는 나라에 많다고 합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과거에 남쪽 지방인 경상도에 문둥병자가 많아서 경상도 문둥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병은 조직과 신경을 파괴시켜 살을 썩게 하는 무서운 병입니다. 몸의 말초부에 결절이 생기다가 결절이 터지면 궤양이 고름이 되어 흐르게 됩니다. 나균은 피부뿐만 아니라 연골 조직도 부식시키기 때문에 심하면 코가 문드러지고 손가락과 발가락이 떨어져 나갑니다. 눈썹도 빠지고 시신경을 상하게 하기 때문에 눈을 멀게 만듭니다. 무엇보다 무서운 것은 신경을 파괴시키기 때문에 바늘로 찔러도 아픈 줄 모르고 찬 것, 더운 것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무감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잠복기간이 길기 때문에 조기 발견하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문둥병자는 온몸에 문둥병이 걸린 것을 볼 때 상태가 매우 심한 자였습니다. 그의 온 몸은 궤양투성이고 거기에서 고름이 샘물같이 흘러 나왔습니다. 그리고 살이 썩는 냄새가 송장 썩는 냄새와 같이 진동하였습니다. 그의 눈썹은 다 빠지고 코는 문드러지고 눈도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또한 손가락과 발가락이 떨어져 나가 그의 모습은 마치 흉한 짐승의 몰골과 같았습니다. 멀쩡한 몸이 죽은 송장과 같이 썩어 들어갈 때 그 고통이 어떠하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육신적인 고통보다도 더 견디기 힘든 것은 정신적인 고통이었습니다. 문둥병은 상처난 부위를 통해 접촉으로 생기는 병이기 때문에 문둥병자는 격리 수용시킵니다. 율법에 의하면 문둥병은 부정한 병으로 문둥병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우고 “부정하다, 부정하다” 외쳐야 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과 격리하여 진 밖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레13:45,46). 사람들은 그를 멀리하고 가까이 오면 돌을 던졌습니다. 또 그가 지나간 자리는 소금을 뿌렸습니다. 문둥병자는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가족과 생이별을 하여 소록도와 같은 격리된 장소에서 무기징역을 받은 죄수와 같이 무서운 고독을 씹으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 형편에 처해 보지 않고서는 누가 그의 정신적인 고통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보다도 더 견딜 수 없는 것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저주받았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예로부터 문둥병은 천형병이라 하여 하나님께 저주받은 병이라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영원한 멸망에 처하게 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두려운 것입니다. 그는 저주받았다는 생각으로 인해 그의 영혼은 절규하며 절망의 심연으로 곤두박질쳤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생을 저주하며 세상을 저주하며 저주스러운 인생을 살아야 했습니다.
문둥병자는 문둥병 때문에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권리를 박탈당하고 인간 폐업을 해야 했습니다. 저는 문둥이의 처지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기 위해 시인 한하운의 슬픈 반생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한하운은 개화 시기의 유능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나 문둥병에 걸려 한없이 슬프고 고독하고 절망적이고 한 맺힌 인생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의 시 중에서 소록도로 가는 ‘전라도 길’과 ‘손가락 한마디’는 이런 그의 심정을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토길, 숨막히는 더위 속에서 절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길 전라도 길”
“간 밤에 얼어서 손가락이 한 마디, 머리를 긁다가 땅 위에 떨어진다.
이 뼈 한마디, 살 한 점, 옷깃을 찢어서 아깝게 싼다.
하얀 붕대를 덧싸서 주머니에 넣어 둔다.
날이 따스해지면 남산 어느 양지 터를 가려서 깊이깊이 땅 파고 묻어야 겠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문둥병을 죄와 관련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죄로 인해 저주를 받을 때 문둥병이 발하였습니다 (민12:10,왕하5:27). 문둥병은 여러 가지 면에서 죄와 그 증상이 흡사합니다. 어떤 점에서 그렇습니까?
첫째로, 죄는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시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걸작품으로서 모든 피조물 중에서도 가장 멋있고 아름답게 창조되었습니다. 눈 위에 조화 있게 그려진 눈썹, 안경을 쓸 수 있는 얼굴 중앙에 우뚝 선 코, 굳게 다문 입,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역사를 창조해 낼 수 있는 열 개의 손가락, 인간은 짐승과 달리 참으로 멋있고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문둥병에 걸리게 되면 이러한 아름다운 모양이 하나하나 이그러져서 보기 흉한 짐승의 몰골과 같이되어 버립니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과 거룩하심과 의로움과 같은 아름다운 내면적 속성대로 지음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은 순수하고 진실되고 고상합니다. 사랑이 풍성하고, 거룩함을 사모하고, 은혜와 진리가 조화되며, 부지런하고, 책임성 있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죄를 범하게 되자 죄가 점점 인간 내면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시켰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음란과 정욕과 강포가 충만하고 시기심과 이기심과 거짓과 부패로 가득찬 존재, 곧 육체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죄는 사람의 마음과 양심을 부패시키고 인격을 파괴시키고 영혼을 썩게 만듭니다.
둘째로, 죄는 무감각하게 만듭니다. 문둥병은 신경을 파괴시키기 때문에 처음에는 고통을 느끼다가 조금 지나면 전혀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죄도 처음 지을 때는 심한 죄의식으로 인해 죽을 것같은 양심의 고통을 느낍니다. 그러나 반복해서 죄를 짓게 되면 점점 죄에 대해서 무감각하게 되어 버리게 됩니다. 이 때문에 더욱 용감하게 죄를 짓고 아무 문제가 없는 듯이 살아갑니다. 그러나 고통이 없다고 해서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실상은 보이지 않는 가운데 그 내면은 점점 썩어 들어가고 그 영혼은 파멸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죄는 사람을 추하게 만듭니다. 문둥병이 사람을 추하고 더럽게 만들듯이, 죄도 사람을 추하고 더럽게 만듭니다. 사람이 죄를 짓게 되면 아무리 얼굴이 예쁘게 생겨도 추하고 더럽게 보입니다. 또 아무리 겉모양을 아름답게 꾸미고 향수를 뿌려도 더러운 냄새가 나게 됩니다.
넷째로, 죄는 관계성을 단절시킵니다. 문둥병이 사람을 격리시키듯이,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단절시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성 단절은 생명의 근원에서 끊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죽음을 의미합니다.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져 꽃병의 꽃과 같이 살았으나 죽은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또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성만 단절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 상호간의 관계성도 단절시켜 시기와 다툼과 분열로 얼룩지게 되었습니다.
문둥병이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은 것같이 보이지만 점점 발전할 때 그 결과는 치명적입니다. 이와 같이 죄도 처음에는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점점 발전할 때 나중에는 죽음이라는 무서운 결과를 낳게 됩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작은 죄라도 소홀히 다루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문둥병자는 죄를 범함으로 고귀한 하나님의 형상을 잃고 추하고 더럽게 된 인간 실존의 모습을 말해 줍니다.
(ii) 예수님께 나아간 문둥병자
문둥병자는 문둥병으로 인해 절망적인 인생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는 문둥병과 싸우고 고독과 싸우고 절망과 싸워야 했습니다. 그는 육신적, 정신적 고통을 견디다 못해 몇 번이나 자살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는 한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모든 욕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생명에 대한 강한 애착심으로 인해 죽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는 모진 목숨 죽지 못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예수님께 대한 놀라운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몹쓸 병도 고쳐 주시고 어떤 몹쓸 죄인도 따뜻이 용납해 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소식은 그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었습니다. 그가 이 소식을 듣게 되었을 때 그에게는 강한 삶의 의욕과 희망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로 나아가기만 하면 그 지긋지긋한 문둥병이 깨끗함을 받고 새 인생을 살 수 있게 된다니 이는 생각만 해도 가슴 벅찬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예수님께로 나아간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무리들로 둘러 싸여 계시기 때문에 그는 무리들로부터 돌에 맞아 죽을지도 모르는 두려움을 극복해야 했습니다. 또한 추하고 더러운 몸을 사람들에게 내보이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깊이 형성된 자의식을 극복해야 했습니다. 또한 해도 안된다는 불신감과 자포자기하는 마음, 나을 수 없다는 절망감도 극복해야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나같이 추하고 더러운 자를 받아 주실까 하는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의심, 또한 예수님께서 과연 나의 고질병을 고칠 수 있을까 하는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불신을 극복해야 했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예수님께 나아 왔습니다. 그는 예수님만 바라보고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 왔습니다. 우리는 이런 그에게서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예수님의 능력과 사랑을 믿고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는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와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대고 엎드려 간구했습니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그는 자신의 추한 모습이 깨끗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원하시기만 하면 그를 깨끗케 하실 수 있음을 믿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요구하며 일방적으로 간구하지 않고 겸손하게 주님의 은총과 자비만을 구했습니다.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자기 의나 교만한 요소가 있으면 주님께서 그 기도를 응답해 주시지 않습니다. 겸손하게 자비와 긍휼만을 구해야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눅18:9-14).
Ⅱ. 문둥병자를 깨끗케 하신 예수님 (41-45)
문둥병자가 믿음으로 나아가 긍휼을 구하였을 때 예수님은 그를 어떻게 고쳐 주셨습니까?
첫째, 예수님은 민망히 여기시고 그에게 손을 대셨습니다 (41a). 온몸에 문둥병 들린 자를 용납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흉측한 모습으로 나아왔을 때 “더 이상 가까이 오지 말고 그 자리에 서 있으라. 내가 말씀으로 깨끗케 해 주리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의 마음에 얼마나 상처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조금도 그를 부담스러워 하지 않으시고 마음으로부터 그를 따뜻이 영접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보시자마자 민망히 여기셨습니다. 이는 내가 그를 불쌍히 여겨야 되겠다는 의지적인 투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심령 깊이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온 감정이었습니다. 이는 죄로 병든 인간에 대한 메시야의 사랑이었습니다. 이 사랑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죄로 인해 파멸해 가는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사 사랑하는 독생자까지도 아끼지 않으시고 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민망히 여기시고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셨습니다. 이는 지극한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손을 대기는 커녕 가까이 오기조차 꺼려했습니다. 사람들은 문둥병이 나았을지라도 그와 악수하고 나면 비누로 씻고 수세미로 손을 문지릅니다. 그리고 악몽에 시달립니다. 손을 댄다는 것은 사랑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또 문둥병자에게 손을 대는 것은 율법에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은 율법을 초월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고독한 내면을 잘 아셨습니다. 그의 깊은 슬픔을 아셨습니다. 그가 사랑에 굶주려 울고 있는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민망히 여기시고 손을 대셨습니다. 예수님의 손길은 사랑의 손길이었습니다. 은혜의 손길이었습니다. 메시야의 손길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인간애(humanity)를 배웁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죄를 짓게 되면 판단하고 정죄하고 멀리합니다. 사회에서는 한 번 전과자가 되면 영원한 전과자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떤 몹쓸 인간이라도 불쌍히 여기십니다. 예수님은 남자의 사랑을 구하다가 만신창이가 된 사마리아 여인을 보실 때도 불쌍히 여기시고, 38년 중풍병자를 보실 때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이기심으로 마음이 갈쿠리와 같이 된 세리 레위를 보실 때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또한 모처럼의 휴식을 방해하고 바다 건너편까지 좇아온 염치없는 무리를 보실 때도 목자 없는 양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시고 여러 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막6:34).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을 때 사람을 도울 수 있습니다. 사람을 돕는 것은 결코 기술 문제가 아니라 심정 문제입니다. 사람을 잘 돕는 분들을 보면 인간애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인간애는 모든 장벽을 뛰어 넘습니다. 인간애는 어떤 어려움도 끝까지 참고 인내하게 합니다. 인간애는 사람을 근본적으로 살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파멸에 이른 것을 불쌍히 여기시는 인간애 때문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저희에게 인간애를 주셔서 죄로 인해 파멸의 길로 치닫고 있는 캠퍼스의 영혼들을 구원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예수님은 적극적으로 그를 깨끗케 해 주셨습니다. 41b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민망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대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이 말씀에는 추한 한 인간에 대한 예수님의 적극적인 사랑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믿음으로 나아왔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소극적으로 고쳐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그를 고쳐 주셨습니다. “내가 원하노니”(I am willing) 이 말씀은 그가 낫기를 원하는 것 이상으로 예수님께서 그를 깨끗케 해 주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는 몸이 깨끗케 되기를 원했지만 예수님은 그의 몸뿐만 아니라 마음과 영혼까지도 깨끗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믿음으로 나아왔을 때 무조건 뜨겁게 그를 영접해 주셨습니다. 이는 허랑방탕한 탕자가 돌아왔을 때 무조건 뜨겁게 영접해 주시는 아버지의 사랑과 같았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추하고 더러운 죄인이라도 믿음으로 나아오기만 하면 뜨겁게 영접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예수님은 죄로 인해 추하고 못쓰게 된 인간을 깨끗케 하사 하나님의 형상대로 온전히 회복되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한 인간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보배피를 흘리셨습니다. 문둥병이 깨끗하게 나음 받으려면 나균을 멸해야 되듯이, 사람이 깨끗케 되기 위해서는 인간을 근본적으로 추하게 만드는 죄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런데 죄는 대가를 요구하는데 그 대가는 죽음입니다.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피를 흘리며 비참하게 죽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고 인간이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 속죄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것은 인간 대신 짐승의 피를 흘려 인간의 죄를 속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불완전하였으며 그 효과도 일시적이었습니다. 이는 장차 올 온전한 속죄의 그림자에 불과했습니다.
히9:12절에 보면 예수님은 짐승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드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온전한 희생 제물이 되셨습니다 (요1:29).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순결한 보배피를 흘리심으로 우리의 추하고 더러운 모든 죄를 깨끗케 해 주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속죄는 완전하고 영원한 속죄였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목하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는 죄의 소욕으로 가득찬 우리의 내면을 점점 변화시켜서 거룩한 소원으로 충만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을 능히 섬길 수 있게 합니다 (히9:14). 그리스도의 피는 어떤 몹쓸 죄인도 구원하고 새 사람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내가 어떤 몹쓸 죄를 지었을지라도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께 나아가 진실되게 죄를 고백할 때 그리스도의 피는 모든 불의와 죄악에서 깨끗케 해 주십니다 (요한1서 1:9,10). 내 죄가 너무 많다고 해서 내가 어느 정도 씻고 나가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기에는 우리의 공로가 전혀 필요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피 공로만 의지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때 우리는 순결한 인생, 건강한 인생,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자 곧 문둥병이 떠나갔습니다. 그러자 그의 살은 신기하게도 갓 태어난 어린 아이의 살과 같이 깨끗해졌습니다. 그는 이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 기쁜 소식을 전하고 싶어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엄히 경계하셨습니다. 이는 메시야의 사역이 방해를 받지 않고 조용히 일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다만 그가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있도록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것을 드려 건강진단서를 얻도록 하셨습니다(44).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치 않고 자기 나름대로 이 일을 많이 전파했습니다. 이 일로 인해 예수님의 사역이 방해를 받았습니다(45). 여기서 볼 때 자기 나름대로 하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를 얼마나 방해하는가를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은혜 받을 때 붕붕 뜨기보다 조용히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내가 주님을 위해서 무엇인가 하고자 하기보다 주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는가 섬세하게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의 죄를 깨끗케 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보배피를 흘리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