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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2:1-12(사죄의 권세자 예수님)

by Mark Yang   08/15/2019   Mark

Message


마가복음 제 5 강


사죄의 권세자 예수님


말씀 : 마가복음 2:1-12
요절 : 마가복음 2:5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
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성경에는 문둥병자, 중풍병자, 앉은뱅이 등 여러 가지 종류의 병자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병들은 그 증상이 여러 가지 면에서 죄와 흡사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중풍병자도 죄사함을 받아야 할 죄인으로 나옵니다. 그는 어떤 점에서 죄인이며, 예수님은 그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주셨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서 죄사함의 은혜를 덧입고 자립적이고 힘찬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중풍병자와 네 친구들 (1-4)

예수님께서 한 문둥병자를 깨끗이 하신 수일 후에 다시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집에 계신다는 소문이 들리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몰려 왔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위대한 일에 놀라고 위대한 사랑에 감동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계신 곳은 그 어디나 따라갔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지 문 앞에라도 움직이기 힘들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각색 질병으로 고통하는 자들, 귀신들려 울부짖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또한 사랑에 굶주려 우는 자들, 심령이 답답한 자들, 또 소수이긴 하지만 인생에 대한 깊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진리의 말씀을 사모하여 나아 온 자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을 어떻게 영접하셨습니까? “예수께서 저희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2b) ‘도’(道)란 인생이 살아나가야 할 바른 길, 곧 진리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진리의 말씀이 가장 필요한 줄 아시고 먼저 말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구원의 길, 생명의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또한 땅의 일에 얽매여 신음하는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산 소망을 심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로운 말씀으로 인해 분위기가 영적으로 무르익어 갈 때에 이를 깨뜨리는 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네 사람이 한 중풍병자를 메고 예수님께로 나아가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온 수많은 사람들로 인해 도저히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중풍병자에 대한 상한 심령 때문에 애써 메고 왔는데 태산과 같은 장애물에 부딪혔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양을 예수님께로 인도하고자 할 때 동문회, 야유회 등 여러 가지 장애물에 부딪칩니다. 또 이방땅에서는 언어의 장애물, 문화의 장애물이 있습니다. 믿음이란 이런 장애물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장애물에 부딪쳤을 때 뒤로 물러가든지 아니면 이에 도전하든지 두 가지 반응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중풍병자를 도와주고자 했는데 상황이 이러니 어쩔 수 없다고 하며 물러날 수도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선한 일을 하고자 하다가 상황이 이러니 어쩔 수 없다는 합리적인 이유 때문에 포기해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는 무거운 학과 공부 때문에, 나는 직장 일로 인해 늦기 때문에, 세대차 때문에 양을 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불가능한 상황을 생각할 때 모든 것이 부정적이 되고 운명적이 되어 버립니다. 또 불신적인 생각이 들고 패배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한 번 장애물을 극복하지 못하고 물러나게 되면 그 사건이 삶 전체에 영향을 끼쳐 매사에 자신이 없고 무기력하고 패배적인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장애물에 도전하고자 할 때 상황은 완전히 달라지게 됩니다. 생각이 긍정적이 되고 불가능한 상황 가운데서 어떤 가능성을 찾게 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무모한 시도를 감행하게 됩니다. 믿음으로 한계 상황을 극복하고자 할 때 용기가 생기고 창조적인 지혜가 생기게 됩니다. 이때 살아 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새 역사를 창조할 수 있게 됩니다. 믿음이란 장애물 앞에서 뒤로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도전하고 전진하는 것입니다 (히10:38,39).

중풍병자를 메고 온 네 친구들은 장애물 앞에서 포기하거나 연기하고자 하는 마음이 추호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번이 마지막이다 하는 생각으로 중풍병자 친구를 어찌하든지 예수님께 데리고 가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하면 반드시 장애물을 넘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사전에는 불가능이란 단어가 없었습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과 같이 그들이 믿음으로 불가능에 도전하였을 때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지붕으로 공수낙하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발한 아이디어는 떠올랐지만 이를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주인의 허락도 없이 남의 지붕을 뜯어야 했고 또 예수님이 말씀 전하는 영적 분위기를 깨뜨려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어찌하든지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가야 하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지붕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기와를 벗기고 큰 구멍을 내었습니다. 그런 후 조심스럽게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예수님 앞으로 달아 내렸습니다. 그들의 공수낙하 작전은 대성공이었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하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can do spirit”의 소유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새 역사를 창조하는 영적 그린베레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중풍병자 친구에 대한 불타는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풍병자는 사람들에게 부담만 주고 아무 이용가치가 없는 쓸모 없는 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람을 실리적인 눈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순수하게 그 영혼을 사랑하고 도와주고자 했습니다. 그들의 사랑은 순수하고 진실된 사랑이었습니다. 또 그들에게는 예수님께 대한 단순하고도 순수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예수님의 사랑을 믿고, 예수님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갈5:6). 그들은 이 믿음 때문에 서로 합심 동역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생각하고 믿음으로 행동하는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이런 믿음의 사람들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오늘날 우리 나라는 좀 부요하게 되자 힘든 일은 기피하고 모험을 싫어하는 안일 무사주의가 팽배하게 되었습니다. 힘든 일은 아무리 돈을 많이 주어도 하지 않고자 하게 되고 할 수 있으면 쉽고 편하게 살고 인생을 즐기고자 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해외에서 노동력을 사들이고 국내에는 고급 실업자가 날로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또 과거에는 유능한 사람들이 어찌하든지 해외에 나가고자 애를 썼지만 요사이는 어찌하든지 해외에 안 나가고자 몸부림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스크바와 같은 곳에 발령이 나면 사표를 내버립니다. 이런 시대 분위기 가운데서 사람들은 점점 소심해지고 두려움이 많은 자로 변모되어 가고 있습니다. 젊은이들도 왜소하게 되어 젊은이로서의 기개와 박력이 사라지고 고양이나 삽살개와 같은 자들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는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그런데 더욱 슬픈 일은 믿는 젊은이들마저도 이 시대의 영향을 받아 안일 무사주의에 젖어 소시민화 되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것이 쫀쫀하고 목소리가 작고 두려움이 많고 박력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시대를 거스려 싸워야 겠습니다. 우리는 중풍병자의 친구들과 같이 믿음으로 불가능에 도전하고 믿음으로 모험을 해야 겠습니다. 그리하여 새 역사를 창조하는 믿음의 용사들이 되어야 겠습니다.

최초로 북극을 탐험한 Robert.E.Peary는 북극 탐험을 다섯 번을 시도했으나 실패했습니다. 그는 동상으로 인해 발가락이 8개가 짤린 채 병상에 누워 있게 되었습니다. 이때 그는 벽에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길을 찾고야 말겠다. 그렇지 않으면 길을 만들겠다.” 그는 절망을 딛고 믿음으로 불가능에 도전하여 결국 여섯 번째만에 성공했습니다. 우리가 복음 역사를 섬기고자 할 때 이러한 믿음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특히 세계 선교 역사를 섬기고자 할 때 더욱 이러한 믿음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믿음의 용기를 가진 자를 기뻐하시고 귀히 쓰십니다.

Ⅱ. 사죄의 권세자 예수님 (5-12)

네 친구들이 믿음으로 지붕을 뜯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 내렸을 때 예수님은 이들을 어떻게 대하셨습니까?  

(ⅰ)저희의 믿음을 보신 예수님 (5a)
네 친구들이 믿음으로 행동했지만 사람들이 보기에는 너무 예의에 어긋나는 무례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들은 새치기를 하였고 말씀 집회를 방해했습니다. 또 남의 지붕을 함부로 뜯었습니다. 그들의 행동은 비도덕적이었고 반사회적인 것같이 보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다 혀를 차며 “저런 나쁜 놈들이 있나”하고 그들의 행동을 비난했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 조항에 비추어서 주거침입 죄, 재물손괴 죄, 집회 방해 죄 등 하나하나 죄목을 수첩에 적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시는 눈은 사람들과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5a) 예수님은 겉으로 나타난 행동보다도 그런 행동을 하게 된 내면의 동기를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모든 역경을 뚫고 중풍병자의 상을 달아 내릴 수 있었던 원동력은 믿음임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귀히 여기시고 그 믿음을 기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매너가 없고 겉으로 좀 부족할지라도 믿음의 행동을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말씀 공부를 하고 소감을 씁니다. 믿음으로 수치스러운 죄를 고백합니다. 그리고 받은 바 구원의 은혜를 기초로 하여 캠퍼스에 가서 생면부지의 사람을 만나 믿음으로 fishing하고 또 말씀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오지 않으면 전화를 하고 찾아갑니다. 양들이 오면 기뻐하고, 오지 않으면 낙심하고 슬퍼합니다. 그리고 소망을 두고 키운 양들이 도망을 가면 기도실에 들어가 남몰래 웁니다. 뿐만 아니라 믿음으로 선교사로 나갑니다. 이렇게 신앙 생활하는 것을 보면 사람들은 너무 지나치다, 빠졌다, 광신자다 하며 비난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하든 간에 우리의 중심의 믿음을 보시고 믿음을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이 믿음을 축복하사 세계 지성계에 놀라운 역사를 이루시고 계십니다.

(ⅱ)사죄의 권세자 예수님 (5b-12)
예수님은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큰 감동을 받으셨습니다. 여기서 저희의 믿음이란 중풍병자의 믿음도 포함됩니다. 예수님은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소자야”(my son)하시며 아들과 같이 따뜻이 영접해 주셨습니다. 중풍병자는 결코 사랑스럽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가 믿음으로 나아왔을 때 예수님은 그를 사랑스럽게 보시고 따뜻이 영접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믿음으로 나아오는 자는 기뻐하시고 따뜻이 영접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예수님은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죄사함을 선포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배웁니다.

첫째, 그를 근본적으로 못쓰게 만든 것은 죄라는 것입니다. 중풍병자를 못쓰게 만든 것은 중풍병인 것처럼 보입니다. 중풍병만 나으면 모든 인생 문제가 다 해결되고 행복한 인생을 살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조건 개선에 불과하고 근본적인 문제 해결은 되지못합니다. 과거 우리 나라는 가난이 원수라고 생각하고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많은 몸부림을 쳤습니다. 가난을 벗어나 잘 먹고 잘 살기만 하면 행복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잘 살게 되자 가난할 때보다 훨씬 죄를 많이 짓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죄 때문에 과거 가난할 때보다 더 비참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을 근본적으로 못쓰게 만드는 것은 죄입니다. 중풍병자를 못쓰게 만든 것은 중풍병이 아니라 그의 내면에 역사하는 죄였습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보실 때 죄사함을 받아야 할 죄인으로 보셨습니다. 그러면 그는 어떤 점에서 죄인입니까?
첫째로, 무기력한 것입니다. 중풍병은 여러 가지 원인으로 뇌혈관이 터져서 팔다리 등 신체의 일부가 마비되는 병입니다. 팔다리가 마비되기 때문에 힘이 없어 손발을 놀릴 수 없게 됩니다. 심하면 언어 장애가 오고 또 스스로 대소변도 할 수 없게 됩니다. 정신은 멀쩡하여 산책도 하고 싶고 탁구도 치고 싶고 박력있는 힘찬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손발이 마비되어 어쩔 수 없이 무기력한 삶을 살게 됩니다. 무기력한 삶을 사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입니다.

창1:28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손발을 놀려 열심히 일하는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개척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는 사명인의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손발을 놀려 사명을 열심히 감당할 때 참된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게 됩니다. 사람이 의미 있는 일을 열심히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큰 축복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매사에 의욕을 잃고 일하기를 싫어하고 무기력하게 누워지낸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 큰 죄입니다.

둘째로, 의존적인 것입니다. 중풍병자는 중풍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남을 의존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남의 도움을 받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이로 인해 그 내면에 생기는 의존심(dependant spirit)이 문제입니다. 재활 의학 전문의이신 김상규 목자님의 말에 의하면 중풍병자의 의존도를 보고 병의 경하고 중함을 평가한다고 합니다. 의존심이 많은 사람은 남이 도와주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자는 자기가 능히 할 수 있는 일도 하지 않고 남의 도움을 바랍니다.
인간은 자립적인 존재로 지음 받았습니다. 자립이란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전능하신 하나님만 의지하고 자립할 때 능력 있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같은 불완전한 사람을 의지할 때 중풍병자와 같이 쓸모 없게 되어 버립니다. 이런 자는 하나님 앞에서 큰 죄인입니다.

셋째로, 감사치 않는 것입니다. 중풍병자는 남의 도움을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조금도 감사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오히려 도와주지 않으면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감정적이 되어 신경질을 부립니다. 모든 원인을 남에게 돌리고 환경 탓, 부모 탓, 목자 탓, 팔자 탓, 하나님 탓을 합니다. 또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슬픈 생각, 부정적인 생각, 운명적인 생각을 하며 자학합니다.

로마서 1:21절을 보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아니하고 감사치도 않는 것은 죄의 뿌리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살전5:18절에서는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어떤 형편 가운데 처하든지 적극적으로 감사 조건을 찾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때 심령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됩니다.

우리는 박력있고 자립적이고 능력있는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내 원대로 잘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환경도 바꾸어 보고 조건도 개선해 봅니다. 또 보약도 먹어 봅니다. 그러나 그때 뿐 조금 지나면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을 무기력하게 하고 의존적이 되게 하고 불평하게 하는 것은 바로 죄 때문입니다. 죄 문제만 해결되면 어떤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도 감사할 수 있고 자립적이고 능력있는 힘찬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저는 얼마 전 신문에서 나병과 실명을 극복한 양재평 씨에 관한 기사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이목구비가 수려하고 남달리 총명하여 장래가 촉망되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중학교 1학년인 15세 때 판검사의 꿈을 안고 열심히 공부하던 중 나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그의 꿈이 깨어짐은 물론, 모든 사람들로부터 버림받고 저주스러운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다 그는 나균의 시신경 침투로 26세 때에는 실명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환자들만이 사는 여천 애양원에서 예수님을 만나 죄사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그는 나병은 「저주받은 천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임을 굳게 믿고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는 문둥병으로 인한 구부러진 손가락 때문에 점자를 해독할 수 없어 동료들이 들려주는 성경을 외우는 일에 몰두하여 지금은 신약 성경 27권을 모두 외우게 되었습니다. 또 장님으로서 신학교에 입학하여 수석 졸업과 함께 전도사 시험에 합격하여 지금은 전도사로서 헌신적으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내면의 죄 문제가 해결되면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도 감사할 수 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위대한 사명인의 인생을 살 수 있게 됩니다.

둘째, 예수님은 인간의 근본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사죄의 권세자가 되십니다.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이는 실로 놀라운 사죄의 선포입니다. 이는 사형 선고를 받은 죄수에게 무죄를 선고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나아 온 중풍병자에게 무죄를 선고하심으로 그를 얽어매고 있던 죄의 사슬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인생을 살아 나가면서 알게 모르게 많은 죄를 짓습니다. 그리고 죄의식에 시달리며 고통합니다. 사람들은 죄의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남몰래 많은 노력을 경주합니다. 선을 행함으로 지은 죄를 상쇄해 보고자 애를 쓰기도 하고 또 “세월이 약이겠죠” 하며 어떤 일에 몰두하여 애써 죄를 잊어버리고자 합니다. 그러나 한번 지은 죄는 마음판에 새겨져서 결코 잊혀지지 않습니다. 잊어버리는 듯하다가 비슷한 상황이 전개되면 과거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나 그를 미치도록 괴롭힙니다. 결국 인간은 죄로 인해 불행한 인생을 살고 나중에는 죄의 삯으로 영원한 멸망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 죄는 우리 인간의 힘이나 노력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는 오직 사죄의 권세자 되시는 예수님만이 해결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일방적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심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위해 십자가에서 보배 피를 흘리셨습니다.
한 인간과 사회와 국가의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가 올바르게 진단하고 올바르게 치료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진단이 올바르지 못할 때 치료도 올바를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근본 문제를 죄 문제로 보시고, 그에게 죄사함을 선포하심으로 그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진단과 치료는 가장 정확하고 사람을 근본적으로 살립니다. 사람에게는 빵 문제, 질병 문제, 도덕 문제, 사회 구조악 문제 등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보다 가장 시급하게 해결되어야 할 문제는 인간의 죄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이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때 그 영혼이 영원한 파멸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사죄의 권세자가 되십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죄사함을 선포하시자 그곳에 앉아 있던 어떤 서기관들이 졸고 있다가 이 말씀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들은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하며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신성모독 죄를 범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신성모독 죄는 돌에 맞아 죽는 무서운 죄였습니다 (레24:15,16).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죄를 사할 수 없다는 그들의 견해는 맞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바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신 줄 알지 못했습니다.

서기관들은 감히 겉으로 드러내지는 못하고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영으로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곧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중심을 감찰하시는 신적 지식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마음 속의 믿음도 보시고 불신도 보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 앞에서는 마음의 생각을 숨길 수 없습니다.

중풍병자에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은 둘 다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 알게 하시기 위해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그러자 그는 무기력의 상, 의존심의 상, 불평과 원망의 상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당당히 걸어갔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죄의 역사가 중풍병자가 일어나 걷게 되는 외적인 역사로 나타났습니다. 이와 같이 사죄의 은혜를 받을 때 팔다리에 힘이 생기고 자립적이고 능력있는 힘찬 인생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사죄의 역사는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하여 새사람 되게 합니다. 사람이 새롭게 될 때 환경도 새로와지고 모든 것이 새롭게 됩니다. 그때 늘 불평하던 자가 범사에 감사하게 되고, 무기력하고 의존적인 자가 박력있고 자립적인 인생을 살게 됩니다.

중풍병자가 사죄의 은혜를 받고 일어나 걷는 역사로 인해 사람들은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12b). 사죄의 권세자 예수님을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