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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2:13-17(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by Mark Yang   08/15/2019   Mark

Message


마가복음 제 6 강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말씀 : 마가복음 2:13-17
요절 : 마가복음 2:17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
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사람들은 남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하는 삶이 의미 있고 가치 있고 행복한 삶인 줄 압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치 않게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인생을 살아갑니다. 이는 그 내면이 죄로 인해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병든 내면이 치료받기만 하면 건강한 삶,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죄로 인해 내면이 깊이 병들어 쓸모 없게 된 세리 레위와, 그를 용납하시고 치료해 주시는 영적 의사이신 예수님이 나옵니다. 세리 레위는 중풍병자와 대조적인 죄인입니다. 그는 어떤 점에서 죄인이며, 예수님께서 그의 병든 내면을 어떻게 치료해 주셨습니까? 이 시간 우리 주님의 크신 긍휼이 한 분 한 분의 심령에 부은 바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세리 레위를 부르신 예수님 (13,14)
지난 사건에서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일어나 걷게 하심으로 이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나타내셨습니다. 그 후 예수님은 다시 바닷가로 나가셨습니다. 그러자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께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모이면 집이나 들이나 산이나 바닷가나 그 어디나 현장에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선한 목자가 되사 그들을 쉴 만한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고 생명의 꼴을 먹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 나아가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하고 생명의 양식을 얻게 됩니다 (요한6:35).
그 후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힘없이 세관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보고 못 볼 것을 본 양 인상을 쓰며 지나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자세히 주목하시고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로써 예수님과 세리 레위와의 극적인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만남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한 몹쓸 죄인과의 만남이었습니다. 이 만남으로 레위의 인생은 180도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만나기 전 레위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레위는 세리였습니다. 당시 세리는 로마 정부의 세금 징집 업무를 청부 맡은 자들이었는데 유대인들이 이를 담당했습니다. 그들은 정한 세 외에 더 징수하여 사리사욕을 채웠습니다. 세리는 원수 나라 로마의 하수인 노릇을 하며 고통하는 백성들을 착취했기 때문에 백성들로부터 멸시와 증오의 대상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세리를 매국노와 이방인과 같이 여기고 소외시켰습니다. 세리와 죄인, 세리와 창기는 동일시되었으며 그들은 공인된 죄인들이었습니다 (막2:16,마21:32,눅15:1,2). 세리는 한마디로 악명 높은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면 세리는 어떤 점에서 죄인입니까? 세리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세리는 이기적이었습니다. 이기적이라는 것은 남을 전혀 생각지 않고 자기만을 생각하고 자기 유익만을 추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세리들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남의 행복을 파괴했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나라도 팔고 동족도 팔고 양심도 팔고 윤리와 도덕도 팔고 명예심도 팔았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자기만을 위해 살았습니다. 사람이 먹고살기 힘든 세상에서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같이 생각됩니다. 내가 나를 위해 살지 않으면 누가 나를 위해 살겠는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만 손해보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또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은 너무 순진하고 어리석은 일같이 생각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떤 경우에든 자기 유익을 추구하며 이기적으로 사는 것은 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또 이웃을 위하여 살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사람이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또 이웃을 위해서 살 때 삶의 보람을 느끼고 참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영어의 기쁨이라는 단어인 JOY는 첫째 예수님, 둘째 상대방, 셋째 나 자신(Jesus first, Others second, Yourself third)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이는 이런 질서 속에서 기쁨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리의 인생 철학은 첫째도 자기요, 둘째도 자기요, 셋째도 자기였습니다. 자기만을 위해 사는 이기적인 삶은 본래의 인생 목적에서 빗나간 삶입니다.
둘째로, 세리는 탐욕의 노예였습니다. 세리는 결코 남에게 줄 줄 몰랐으며, 모든 것을 자기에게로 긁어모았습니다. 그들은 자기에게로 긁어모아야 행복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정반대입니다. 행복이란 긁어모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주는 데 있습니다. 긁어모으고자 하게 되면 마음이 늘 불안하고 심령이 오그라지게 됩니다. 욕심은 죄를 잉태하는 근원이 됩니다. 그래서 야고보 선생님은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고 하였습니다. 또 사도 바울은 탐심은 우상 숭배라고 하였습니다 (골3:5).
셋째로, 세리는 잔인하고 무자비하였습니다. 그들은 남의 고통을 전혀 돌아보지 않고 잔인하게 세금을 징수했습니다. 그래서 유대 격언에는 “산중에는 사나운 사자가 있고 거리에는 잔인한 세리가 있다”는 말까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긍휼이라는 단어가 없었습니다. 사람은 형편이 딱한 사람을 볼 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 마땅히 가져야 할 자세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5:7). 그러나 세리들은 남을 긍휼히 여기지 않고 잔인하고 무자비하였기 때문에 자신들도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했습니다.
중풍병자는 남에게 부담을 주는 소극적인 죄인이라면, 세리는 자기의 유익을 위해 남에게 해를 끼치는 적극적인 죄인이었습니다. 중풍병자는 생각으로 죄를 지었지만, 세리는 행동으로 죄를 지었습니다. 레위는 이런 세리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어쩌다가 이런 악명 높은 세리가 되었을까요? 그가 원해서 세리가 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도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존경받는 고상한 인생을 살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을 위해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삶을 살며 보람되고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도 학창 시절에는 “자유의 불을 밝히고 정의의 길을 달리고 진리의 샘을 파리라”는 청운의 푸른 꿈에 불탔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상은 이상이고 현실은 현실이었습니다. 현실은 진리를 위해 사는 사명인의 삶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현실은 권세와 타이틀과 돈을 필요로 합니다. 세상은 돈이 없으면 될 일도 안되고 반면 돈이 있으면 안 될 일도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레위가 살던 시대는 일제 식민지 시대와 같이 먹고사는 생존 문제로 위협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가 현실을 직시했을 때 성서 한국, 세계 선교, 역사 창조, 사명, 비전과 같은 단어들이 다 사치스럽게 생각되었습니다. 그는 어떤 모양으로든지 돈을 벌어야 된다고 생각하고 돈을 벌기로 굳게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돈을 가장 잘 벌 수 있는 세리직을 택했습니다. 그는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쓰리라 마음먹었습니다.
그가 이런 생각을 한 데에는 남모르는 사연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의 집이 너무 가난하여 국민학교 때 수업료를 내지 못해 선생님으로부터 뺨을 맞은 것이 한이 맺혔는지 모릅니다. 빚 문제로 시달리다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세리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아니면 부자 친척으로부터 무시와 천대를 당하고 가진 자에 대한 복수심이 그를 세리로 만들었는지 모릅니다. 어쨌든 그는 악명 높은 세리가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로마에게 정복당했지만 민족적인 자부심과 선민의 긍지 때문에 결코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죽음도 불사하고 유대인으로서의 중심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레위는 현실의 유익 때문에 선민의 긍지와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양심마저도 버렸습니다. 그는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 무정하고 무자비한 인간이 되었습니다. 그는 세원 조달과 징수 방법을 끊임없이 연구하여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악착같이 돈을 긁어 모았습니다. 돈은 그의 의미요, 가치요, 인생 목적이 되었습니다. 그는 돈만 있으면 행복의 여신이 그에게 미소를 보내리라 굳게 믿었습니다. 그는 돈을 벌어서 그 동안 한 맺혔던 것을 하나 하나 풀어 나갔습니다. 우선 넓은 정원과 테니스 코트와 풀장이 달린 호화 주택을 샀습니다. 그리고 로마에서 직수입한 BMW와 갈릴리 바다 유람선도 구입했습니다. 주말마다 골프를 치고 부페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에게는 이제 부족한 것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의 생활은 당연히 행복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행복한 척 하려고 해도 전혀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행복은 커녕 오히려 무서운 공허와 허무와 절망이 밀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비로소 돈으로 내면의 인생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행복을 살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또한 행복은 소유(have 동사)에 있지 않고 존재(be 동사)에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공허한 내면을 달래기 위해 술을 마시고 히로뽕을 피우기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 그를 견딜 수 없게 만든 것은 고독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아무도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친구가 없었습니다. 사람이 사는 날 동안 희비애락을 나눌 진실한 친구가 한 사람이라도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입니다. 친구와 기쁨을 나누면 그 기쁨은 배가가 되고 슬픔을 나누면 그 슬픔은 반감이 됩니다. 그러나 이런 진실한 친구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또 사람에게는 인정받고 사랑 받고 존경받고자 하는 기본적인 욕구가 있습니다. 물질이 좀 없더라도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사랑 받고 존경을 받을 때 행복을 느끼며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레위는 인정과 사랑과 존경은 커녕 비난과 멸시와 증오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만 보면 문둥이를 대하듯 하였고 안 나오는 침을 뱉었습니다. 그의 아내와 자식들도 돈 탈 때만 아양을 떨고 평소 때는 가까이 오기를 꺼려하였습니다. 심지어는 그의 집 강아지 조차 멸시에 찬 소리로 짖어 대었습니다. 그는 이때까지 지은 죄로 인해 죄의식에 시달리며 밤마다 화염병 세례를 받는 악몽을 꾸며 식은 땀을 흘려야 했습니다. 그는 절망이라는 죽음의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는 비로서 자기만을 위한 이기적인 삶이 그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 넣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의 인생은 빗나간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의 영혼은 절망의 심연에서 자기를 구원해 줄 메시야를 애타게 찾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볼 때 판단하고 정죄하는 눈으로 보았지만 예수님은 목자의 눈으로 그를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인생 목적과 방향을 잃고 표류하고 있음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내면의 고독과 절망에 찬 모습을 보셨습니다.예수님은 그가 병들어서 시름시름 죽어 가고 있음을 보셨습니다. 그를 보시는 예수님의 눈길은 사랑의 눈길이요, 동정의 눈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보시자마자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세리 레위에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사죄의 은혜입니다. “나를 좇으라”는 말씀은 네가 나를 좇기만 하면 과거 어떤 죄를 지었을 지라도 다 용서해 주겠다는 죄사함의 은혜가 담긴 부르심이었습니다. 이 부르심은 그를 멸망에서 구원해 주시는 구원의 음성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과거를 한마디도 묻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그가 예수님을 따르기만 하면 주홍같이 붉은 죄를 용서해 주시고 새 인생을 살도록 하셨습니다.
둘째로, 그의 인생 목적과 방향을 바꾸어 주시는 말씀이었습니다. 레위의 문제는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과 재능을 자기만을 위해 쓴 데 있었습니다. 그가 불행하게 된 것은 인생의 목적과 방향이 잘못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을 위해 살도록 지음 받았기 때문에 이 인생 목적대로 살아야 비로소 참 기쁨과 만족과 행복을 맛볼 수 있습니다.양을 먹이는 목자 생활에는 시간과 물질과 자신의 끔과 이상을 포기해야 하는 많은 희생이 요구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목자 생활을 기쁨으로 감당하는 것은 여기에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레위는 이 행복의 비밀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만을 위해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더 이상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예수님께 목적을 두고 예수님을 위해 살도록 인생의 목적과 방향을 바로 잡아 주신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위해 살게 되었을 때 시름시름 죽어 가던 그의 영혼은 소생하기 시작했습니다.
셋째로, 그가 제자로 삼고자 하신 것입니다. “나를 좇으라”(?κολουθει)는 말씀은 현재 미완료형으로 계속해서 좇으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제자로 초청하시는 말씀입니다. 세리 레위는 누가 보나 제자감이 되지 못합니다. 그는 이기심으로 너무 깊이 병들어 키우기가 힘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세리 레위를 열두 제자 중 하나로 부르신 사건은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공인된 죄인이 있다는 것은 예수님의 권위를 손상시키고 비난의 대상이 되기 쉽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이는 그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를 정죄하고 멀리했지만 예수님은 그를 용납하시고 크신 사랑으로 품어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소망이 없다고 짤라 버렸지만 예수님은 그가 장차 마태복음을 쓸 성서학자요, 세상의 빛이 될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될 가능성을 보셨습니다. “나를 좇으라” 이 부르심은 레위에게 임한 구원의 음성이요 사랑의 음성이요 소망의 음성이었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레위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아무리 부르심의 은혜가 크더라도 이에 대한 인격적인 반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14b절을 보십시오. “일어나 좇으니라” 그는 부르심을 받았을 때 두말하지 않고 일어나 좇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일어나 좇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부르심을 받았을 때 한편으로는 지난날의 죄악된 생활을 청산하고 새로운 인생을 살고 싶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때까지 쌓아 온 모든 것을 잃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또 속박 받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게 마련입니다. 레위는 수입 좋은 직장을 버려야 하는 아쉬움과 함께 앞으로 불투명한 장래로 인해 두려움이 앞설 수도 있었습니다. 또한 자신을 바라볼 때 자기와 같이 죄 많은 자는 도저히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불의를 주장할 수도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와 같이 병든 자를 끝까지 감당하실 수 있을까 도중에서 포기하시지나 않을까 하는 의심에 사로잡힐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만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예수님의 사랑만을 믿고 일어나 좇았습니다. 그에게는 믿음의 용기가 있었습니다. 이는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가 절망적인 상태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기억하고 스스로 돌이켜 있는 모습 그대로 아버지 집으로 돌아온 것과 같습니다.
그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지난날의 생활이 너무 지긋지긋했기 때문입니다. 그보다도 예수님 안에서 참된 사랑과 놀라운 희망과 삶의 의미와 목적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더 이상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진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목자의 인생을 살고자 결단했습니다. 그의 결단은 세리 레위에서 성 마태가 되게 한 위대한 결단이었습니다. 그는 이 결단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잃었지만 가장 고귀한 예수님을 얻었습니다. 과거 레위는 돈 때문에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민족도 잃고 친구도 잃고 인간성도 잃고 양심도 잃고 하나님의 형상도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을 때 이 모든 것을 찾았습니다. 과거 그는 죄 때문에 잃어버린 자였으나 이제 예수님 안에서 찾은 자가 되었습니다.
Ⅱ.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신 예수님 (15-17)
레위가 일어나 예수님을 좇았을 때 그의 마음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에게 전에 맛볼 수 없었던 기쁨과 평강이 차고 넘쳤습니다. 삶의 희열과 희망이 생겼습니다. 과거에는 온통 잿빛으로만 보이던 세상이 밝고 환하게 보였습니다. 모든 것이 새롭고 사랑스럽게 보였습니다. 밥맛이 생기고 힘이 솟구쳤습니다. 그는 샘솟는 기쁨을 억제할 수 없어 예수님을 위하여 거금을 들여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눅5:29). 그리고 이 잔치에 같은 세리 족속들이 자기와 같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많이 초대했습니다. 그의 이 잔치는 부르심에 대한 감사의 표시요, 또한 죄악된 생활을 청산한다는 회개의 표시였습니다. 레위의 집에서 천국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도 초청을 받아 오랜만에 영양 보충을 하였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은 레위의 놀라운 변화를 보고 예수님께 나아 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구원의 희망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영접하시고 함께 식사를 하셨습니다.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이 예수님은 성육신의 은혜와 사랑이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당시 율법 사회에서 공인된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심으로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본래 그 본체가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땅에 오시되 군림하는 자의 모습으로 오시지 않고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문둥이에게는 문둥이의 모습이 되시고, 중풍병자에게는 중풍병자의 모습이 되시고,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사마리아 여인의 모습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세리에게는 세리의 모습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임마누엘 하셔서 그들을 이해와 사랑으로 용납하시고 품어 주시고 섬겨 주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성육신의 은혜와 사랑이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이 사랑에 감격하여 완악한 세리와 죄인들도 마음이 녹아 눈물을 흘리고 목이 메어 음식을 먹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눈물을 닦아 주셨습니다. 이 잔치는 사랑의 잔치였습니다.
사랑의 잔치가 한창 무르익어 갈 때에 냄새를 맡고 찾아 온 종교 경찰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보고 제자들을 비난했습니다.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느냐?” 그들은 경건한 율법주의자들로서 세속 문화에 물들지 않고 율법을 좇아 사는 자들이었습니다. 문제는 이것이 그들의 의가 되어 독선에 빠져 그것으로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적이 되어 세리와 죄인들은 소망이 없다고 정죄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인간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자신이 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가 그 이유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이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 몇 가지 중요한 진리를 배웁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죄인을 구원하러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정죄하거나 심판하러 오시지 않으시고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요3:17). 예수님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셨습니다 (요8:11). 또한 세리장인 삭개오를 부르실 때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눅19:10).
둘째로, 병든 죄인을 치료하시는 영적 의사가 되십니다. 바리새인들의 인간관은 사람이 죄를 범하면 소망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인간관은 죄와 죄인을 구별해서 보시고 죄 문제만 해결해 주면 죄인은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보셨습니다. 의사들은 환자를 볼 때 그가 병들었다고 정죄하거나 짤라버리지 않았습니다. 의사는 병과 병자를 분리해서 보고 병만 고침 받기만 하면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그를 못쓰게 만드는 병을 치료해 주고자 애를 씁니다.병든 자에게 의사가 필요하듯이 죄인에게 구주가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건강한 자라고 생각하는 의인의 구주가 아니요, 자신이 병든 자임을 인식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 온 죄인들의 구주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병든 죄인을 치료하사 살려 주시는 영적 의사가 됩니다. 죄로 병든 내면을 치료한다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병든 내면을 치료해 주심으로 건강한 삶을 살게 해 주십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긍휼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리들과 죄인들을 용납하시고 함께 식사하실 수 있었던 것은 죄인들을 향한 예수님의 크신 긍휼 때문이었습니다. 세리 레위는 죄로 인해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가는 심지와 같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상한 갈대는 아무 쓸모 없기 때문에 꺾어 버리고 꺼져가는 심지는 불어서 꺼 버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상한 갈대도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아니하시고 어찌하든지 살리고자 하셨습니다. 이는 죄인을 향한 크신 긍휼 때문이었습니다. 이 긍휼 때문에 세리 레위가 살아나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자가 세상의 빛이 되었습니다. 죄인들을 향한 예수님이 크신 긍휼을 찬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