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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2:18-28(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by Mark Yang   08/15/2019   Mark

Message


마가복음 제 7 강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말씀 : 마가복음 2:18-28
요절 : 마가복음 2:22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지난 강의에서 우리는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을 배웠습니다. 예수님은 악명 높은 죄인인 세리 레위를 부르시고 그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실 뿐만 아니라 열두 제자 중의 한 사람으로 삼으셨습니다. 이 사건은 당시의 전통과 가치관을 뒤엎는 혁명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릇된 전통과 관습, 가치관을 타파하시고 진리에 기초하여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 나가시는 혁명가이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금식과 안식일 문제로 예수님과 바리새인과의 사이에 충돌이 일어납니다. 이 충돌은 복음과 율법주의와의 충돌로서 불가피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충돌을 통해 형식주의와 권위주의를 깨시고 복음의 생명력을 드러내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내 속에 있는 형식적이고 권위적인 요소를 깨고 새 포도주 되신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는 새 부대로 빚어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신랑 되신 예수님 (18-20)
예수님과 바리새인들과의 충돌은 예수님께서 믿음으로 나아 온 중풍병자에게 죄사함을 선포함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참람하다고 생각하며 분개했습니다. 두 번째 충돌은 예수님께서 세리 레위를 제자로 부르시고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심으로 발생했습니다. 세 번째 충돌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금식을 하지 않은 데서 일어났습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규례를 좇아 열심히 금식을 하고 있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연일 먹고 마시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 생활은 양무리를 섬기느라 제 때에 끼니를 찾아 먹기가 힘들고 원치 않게 금식할 때가 많았습니다 (막3:20). 그러나 최근에는 레위의 초청으로 풍성하게 잘 먹었습니다. 또한 레위의 변화로 인하여 세리 족속들이 큰 은혜를 받고 너도나도 계속해서 초청을 하는 바람에 제자들은 연일 초대를 받아 가게 되었습니다. 항상 식욕이 왕성한 제자들은 조금도 염치 차리지 않고 정신없이 먹었습니다. 그들은 식사를 초대받아 갈 때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백 번 잘했다고 생각했습니다. 한쪽에서는 배고픈 것을 참고 심각한 얼굴을 하고 열심히 금식하고 있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허리띠를 풀어놓고 열심히 먹고 있었습니다. 이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따져 물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18) 당시 금식은 경건의 표시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비난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은 경건치 못하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은 1년에 한 번 속죄 일에만 회개의 표시로 금식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 날은 죄를 고백하고 죄로 인해 슬퍼하며 금식을 함으로써 자기 몸을 괴롭게 하였습니다 (레23:27). 그러나 유대인들은 국가적인 재난을 당할 때마다 금식 일을 첨가시켜 바벨론 포로 이후에는 1년에 4번 하였고, 예수님 당시에는 1주일에 이틀씩 하였습니다 (눅18:12). 금식은 경건의 척도가 되어 금식을 잘하면 경건하고 그렇지 않으면 경건치 못한 자로 낙인찍혔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이것이 형식화된 것이 큰 문제였습니다. 사람들은 금식할 때 슬픈 기색을 띠고 얼굴을 흉하게 하여 자신이 경건한 자임을 나타내었습니다 (마6:16). 그리고 금식한 다음 날은 이를 보충하기 위해 더 많이 먹었습니다. 오늘날도 자신이 몇 일 금식했다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자들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과 같이 40일을 금식하려다 죽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규례대로 금식하지 않는다고 비판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신랑과 혼인집 손님들의 비유를 들어 제자들이 왜 금식할 필요가 없는가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19,2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나니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여기서 볼 때 예수님은 금식 무용론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금식하는 데에는 때가 있음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또한 자신을 신랑, 그를 따르는 자들을 혼인집 손님들로 비유하심으로 신앙 생활의 성격이 어떠함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신앙생활이란 형식과 규례에 얽매인 생활이 아닙니다. 또 인상을 쓰며 짜여진 규율에 따라 수도를 해야 하는 금욕 생활도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신앙생활이라고 하면 중세기의 수도사와 같이 생활해야 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중세기의 수도사들은 결혼도 하지 않고 수도원에서 짜여진 규율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들은 일부러 가난한 생활을 하고 고행을 많이 했습니다.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수도 생활로 생각하고 심각하고 근엄해지고자 애를 씁니다. 웃는 것은 경건치 못하다고 생각하고 할 수 있는 데로 웃지 않고자 노력합니다. 그리고 조그만 일에도 잘 웃는 형제 자매들을 보면 허파에 바람이 들어간 실없는 자들이라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이란 혼인 잔치와 같이 근본적으로 기쁘고 즐거운 생활입니다. 유대 혼인 잔치는 1주일 동안 하였는데 이 기간 동안에는 모든 슬픈 행사는 금지되었습니다. 비록 금식 기간이 닥치더라도 절대로 금식할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혼인집 손님들은 단순한 하객이 아닌 신랑의 친구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신랑과 함께 기뻐하고 춤을 추며 즐거워했습니다. 이처럼 신앙생활이란 기쁨이 넘치는 생활입니다. 이 기쁨의 원천은 신랑 되신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순수하게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과 교제할 때 우리의 마음에는 세상에서 맛볼 수 없는 참된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혼인 잔치는 봄날과 같습니다. 봄날은 밝고 화창하며 생동감이 넘칩니다. 이와 같이 신앙생활도 밝고 생동감이 넘치는 생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자들에게는 어둡고 슬프고 부정적인 요소가 없어야 됩니다. 우리의 말이나 생활이 밝고 희망차고 기쁨과 감사가 넘쳐야 합니다. 우리가 근본적으로 그런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미 나의 모든 죄짐과 슬픔과 운명과 인생의 모든 고뇌를 십자가에서 담당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데 심령에 기쁨이 없고 어딘지 모르게 슬픈 우수의 그림자가 깃든 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자들을 보면 괜히 마음이 울적해지고 울고 싶어집니다. 이런 분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그 마음 중심에 신랑 되신 예수님을 모시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예수님을 중심에 모시기 위해 금식해야 됩니다. 예수님은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지만 신랑을 빼앗기는 날에는 금식해야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역사적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를 의미합니다. 또한 영적인 의미로는 우리의 죄로 인해 예수님과의 교제가 끊어졌을 때나 여러 가지 사업적인 생각과 세상일로 인해 예수님을 내 마음 중심에 모시고 있지 않을 때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바로 이 때 금식해야 합니다. 금식은 육신의 욕구를 자제함으로써 영적 소원을 불러 일으켜 좀 더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의 요구를 자제하고 새벽기도나 일용할 양식이나 소감과 같은 영적 투쟁을 통해서 예수님을 마음 중심에 모실 때 심령에 하늘 나라의 기쁨과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Ⅱ. 새 포도주 되신 예수님 (21,22)
예수님은 계속해서 생베 조각과 새 포도주 비유로 그들의 근본 문제가 무엇인가를 지적해 주셨습니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습니다.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더 못쓰게 되기 때문입니다(21). 또한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습니다.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둘 다 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22). 이 비유에서 볼 때 생베 조각과 낡은 옷, 새 포도주와 낡은 가죽 부대는 근본적으로 합할 수가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생베 조각과 새 포도주는 예수님과 예수님의 교훈, 즉 복음을 가리키고, 낡은 옷과 낡은 가죽 부대는 장로들의 유전과 같은 유대교의 전통을 가리킵니다. 이는 복음은 유대주의와 근본적으로 합할 수 없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생베 조각과 새 포도주로 비유하신 것은 복음은 질적으로 새롭고 힘이 있고 신선하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복음은 율법이나 유대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복음은 인간이 만든 철학이나 사상이나 종교와도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복음은 그 자체에 생명력이 있고 늘 신선합니다. 어떤 점에서 그렇습니까?
첫째로, 복음은 죄인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서 새 사람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인간이 만든 철학이나 사상은 사람의 인격 형성이나 가치관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지만 인간을 근본적으로 변하여 새 사람되게 하지는 못합니다. 불교나 유교와 같은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철학이나 사상이나 종교가 인간의 근본 문제인 죄와 죽음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죄와 죽음 문제를 해결해 주기 때문에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하여 새 사람되게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16절에서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였습니다. 복음은 어떤 몹쓸 죄인도 새 사람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복음은 무기력한 중풍병자를 일어나 걷게 하여 자립적이고 개척적인 인생을 살게 합니다. 복음은 이기적인 세리를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자가 되게 합니다. 복음은 끼가 있는 사마리아 여인을 형제들을 낳고 키우는 믿음의 어미로 변화시킵니다.
둘째로, 복음은 낡은 전통과 가치관을 파괴시키고 새 역사를 창조하는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생베 조각이 낡은 옷을 당기고 새 포도주가 낡은 가죽부대를 터뜨린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복음은 낡은 전통과 가치관을 파괴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영적 질서가 서고 진리에 기초한 올바른 인생관과 가치관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기존의 그릇된 질서와 가치관이 파괴되어야 합니다. 새 건물을 짓기 위해서는 기존의 낡은 건물을 파괴시켜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함이라”(마10:34,35)는 역설적인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전통과 기존 제도와 질서를 고수하고 그곳에 안주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이에 도전하여 개혁을 일으킵니다. 이 때문에 충돌이 불가피하게 일어나게 됩니다. 이런 충돌을 통하여 기존의 그릇된 질서와 가치관이 타파되고 진리에 기초한 새로운 영적 질서와 가치관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보이지 않는 가운데서 일어나는 혁명입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런 영적 혁명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런 영적 혁명을 통해서 개인이 변화되고 가정이 변화되고 캠퍼스가 변화되고 사회가 변화됩니다. 사도행전의 역사를 보면 복음이 들어가는 곳마다 낡은 가치관이 파괴되고 새 역사가 창조되는 놀라운 혁명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사도 바울이 음란과 강포로 충만한 항구 도시 고린도에 1년6개월 동안 머물면서 복음을 전했을 때 수많은 사람이 회개하고 새 사람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이 에베소의 두란노 서원에서 2년 동안 매일 말씀을 강론했을 때 마술사들이 회개하고 회개의 표시로 은 오만 어치나 되는 마술 책을 불사르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행19:19).
마르틴 루터가 복음의 능력을 믿고 교회의 전통과 교권주의로 인해 경직되고 부패한 카톨릭 교회에 도전하였을 때 종교 개혁의 새 역사가 창조되었습니다. 또한 개신교가 30년간의 종교 전쟁으로 인해 영적으로 피폐해지고 도덕적으로 타락하게 되었을 때 스페너와 프랑케와 같은 복음적인 종들을 통해 경건주의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한국 교회사를 보면 복음이 처음에 이 땅에 들어왔을 때 미신이 타파되고 생활이 개혁되는 혁명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 때 샤마니즘과 유불교의 낡은 전통과 가치관에 매여 있던 백성들은 심하게 반발했습니다. 이로 인해 예수 믿는 자들은 문중에서 축출되기도 하고 순교를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이런 반발을 뚫고 놀라운 개혁의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 나라는 인구의 25%인 천만 신도를 자랑하는 기독교 강국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복음이 들어가는 곳에는 그 어디나 낡은 전통과 가치관이 파괴되고 새 역사가 창조됩니다. 우리는 현재 보이지 않는 가운데 조용한 혁명의 역사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는 복음으로 생명을 살리는 영적 혁명입니다. 우리는 이 거룩한 혁명에 부르심을 받은 복음의 혁명 대원들입니다.
예수님은 새 포도주가 되십니다. 새 포도주는 신선하여 사람들에게 기쁨을 줍니다. 또 팽창하는 힘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죄인들에게 죄사함의 기쁨을 주고 새 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활기 차고 생명력이 넘치며 새 역사를 창조하는 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새 포도주 되신 예수님을 영접하려면 어떤 마음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예수님은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22b). 우리가 새 포도주 되신 예수님을 영접하려면 새 부대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새 부대가 될 수 있습니까?
첫째로, 끊임없이 배우고자 하는 겸손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위험한 것은 낡은 가죽부대와 같이 굳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굳어 버리는 가장 큰 원인은 교만과 안일입니다. 교만은 다 안다고 생각하고 더 이상 배우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이 겸손하게 배우지 않을 때 자연히 성장하지 못하게 되고 성장하지 못하면 낡은 가죽 부대와 같이 쓸모 없게 되어 버립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성장해야 됩니다. 성장하기 위해서는 겸손하게 허리를 동이고 끊임없이 연구하고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또 안일을 사랑하는 마음도 낡은 가죽 부대가 되게 하는 큰 요인입니다. 안일이란 개척을 싫어하고 안주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또한 십자가를 지기 싫어하고 편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입니다. 사람이 개척 정신을 잃고 안일해 질 때 쓸모 없게 되어 버립니다. 우리는 좀 고생스럽지만 개척 정신을 가지고 끊임없이 개척해야 됩니다. 그때 우리는 낡은 가죽 부대가 되지 않고 새 부대가 될 수 있습니다.
둘째로, 복음 중심으로 끊임없이 개혁되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처음 신앙생활을 할 때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양들을 사랑하고 말씀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해 나갈수록 점점 진리에 대한 열정이 사라지고 매너리즘에 빠져 형식적이 되어 버리기 쉽습니다. 또 내용이 없고 형식적이 될 때 권위주의가 생겨 아랫사람들에게 권위를 부리게 됩니다. 또한 모임이 제도화가 될 때 본래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낡은 가죽 부대가 됩니다. 그러므로 낡은 가죽부대가 되지 않고 새 부대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나 모임이 복음 중심으로 끊임없이 개혁되어져야 합니다. 개혁하는 데는 아픔이 있고 희생이 따릅니다. 그러나 아픔과 희생을 통해서 껍질을 벗고 새로워질 수 있고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Ⅲ. 안식일의 주인 되신 예수님 (23-28)
23절부터는 안식일 문제로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사이에 충돌이 있게 됩니다.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 일행이 밀밭 사이로 지나갈 때였습니다. 훈련받느라 늘 배가 고픈 제자들은 반사적으로 밀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런데 몰래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던 바리새인들이 현장범을 잡았다는 듯이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나타나 날카롭게 비난했습니다. “보시오. 저희가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율법은 가난하고 배고픈 사람을 생각하여 이삭에 낫을 대어서는 안되지만 이삭을 손으로 잘라먹는 것은 허용하였습니다 (신23:25). 그런데 문제는 안식일에 이 일을 한 데 있습니다. 유대 랍비들은 안식일을 잘 지키기 위해 1261개조라는 까다롭고 복잡한 세부 규칙을 만들었습니다. 안식일에는 병고치는 것을 금지하였는데 이로 인해 피가 나면 싸매기는 해도 약은 못 발랐습니다. 또 안식일에는 추수, 타작, 키질은 물론 음식 준비를 해서도 안되었습니다. 이러한 규례들은 사람의 행동을 규제하고 얽어매어 본래의 정신에서 멀어지게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에 의하면 이삭을 자르는 것은 추수요, 손으로 비비는 것은 타작이요, 입으로 껍질을 부는 것은 키질로서 이는 모두 안식일법에 저촉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눈에 비췬 제자들의 모습은 무식하고 교양도 없고 법도 지키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무법자들로 보였습니다. 그들은 배고픈 제자들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했고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이해와 사랑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정신을 상실하고 율법적이고 비판적이 되었습니다. 율법의 정신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습니다 (벧전4:8). 형제를 사랑할 때 판단하기보다 이해하고 섬기고자 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지극히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들의 배고픈 심정을 이해하시고 다윗의 예를 들어 변호해 주셨습니다. 사무엘상 21장에 보면 다윗이 사울의 시기로 아무 죄없이 쫓겨다닐 때였습니다. 다윗과 그와 함께 한 자들은 먹을 것이 없어 몇 일 동안 굶다가 마침 놉에 있는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제사장 외에는 아무도 먹을 수 없는 거룩한 떡 밖에는 없었습니다. 아히멜렉은 다윗과 그 일행의 배고픈 심정을 이해하고 그 떡을 주었습니다. 다윗은 진설병을 먹음으로 분명히 법을 어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로 인해 다윗을 판단하거나 정죄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윗은 중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했기 때문에 배고플 때 규례를 어긴 것은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두 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제자들을 다윗과 같이 귀히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부족하지만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좇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을 지극히 사랑하시고 그들의 허물과 실수를 용납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들 또 말썽을 피워서 나를 곤란하게 만드는구나. 배고픈 것을 그렇게 참지 못하느냐”하며 책망하여 기를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편이 되사 적극적으로 변호해 주심으로 기를 살려 주셨습니다. 그들은 이 예수님 안에서 마음놓고 실수하며 영적인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법보다도 사람의 생명을 중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엿새 동안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후 제 7일에 안식을 제정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복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쉬고자 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복을 위해 창설하신 것입니다. 인간에게 안식일이 없다면 쉼이 없는 피곤의 연속일 것입니다. 안식일은 육체와 정신의 안정과 영혼의 영적 원기를 회복하는 날로서 인간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법이 사람을 위해 있지 않고 사람이 법을 위해 존재할 때 법은 사람을 해치는 괴물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계속해서 놀라운 선포를 하셨습니다.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이 안식일을 창설하시고 주관하시는 창조주이심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므로 안식일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지켜져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중심에 모시고 예수님을 사랑할 때 안식일을 잘 지킬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신랑이 되시고 새 포도주가 되십니다.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 되시는 창조주가 되십니다. 이 예수님을 중심에 모시고 예수님을 사랑함으로 심령에 기쁨과 감사와 은혜가 넘치는 신앙 생활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