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제 9 강
예수님의 진정한 가족
말씀 : 마가복음 3:20-35
요절 : 마가복음 3:35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오늘 본문에는 두 가지 사건이 나옵니다. 첫째는, 성령의 역사를 훼방하는 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경고의 말씀이요, 둘째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을 진정한 가족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왕성하게 일어날수록 적대 세력이 중대하고 진리와 불의, 빛과 어두움이 분명히 나누어졌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면 반드시 이에 대항하는 사단의 역사 곧 핍박과 비난, 중상 모략과 같은 적대 세력이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이때 우리가 확신해야 할 것은 진리가 반드시 불의를 이긴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훼방하는 사람들의 핍박과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확신 있게 복음 역사를 섬겨야 하겠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 예수님의 진정한 가족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성령을 훼방하는 죄 (20-30)
(i) 어떤 자가 정상인가 (20,21)
20절 말씀은 사명인 예수님의 바쁜 모습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께서 산에서 열두 제자를 뽑으신 후 가버나움에 있는 한 집에 들어가시자 무리가 다시 모여들었습니다. 이로 인해 예수님과 제자들은 식사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무리들 가운데는 병으로 인해 고통하는 자, 축제 때 정욕의 죄를 짓고 더러운 귀신들려 울부짖는 자, 백골단에 의해 쇠 파이프를 맞고 온몸에 멍이든 자, 영적으로 갈급한 자 등 영육 간에 응급 환자들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자를 고쳐 주시고, 더러운 귀신들을 쫓아 내주시고, 상처를 싸매 주시고, 영적으로 갈급한 자들에게는 생명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돌보는 것이 너무 시급하여 식사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먹고 쉬는 것을 매우 중히 여깁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우선 먹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먹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먹어야 사명을 힘있게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명과 먹는 것 중 어느 것을 더 중하게 여기는가 하는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야의 사역을 감당하시기 전 금식하셨지만, 복음 역사를 감당하시면서 금식했다는 기사는 없습니다. 오히려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열심히 먹고 마시며 또 열심히 복음 역사를 섬기셨습니다. 이로 인해 예수님은 바리새인들로부터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라는 비난을 듣기도 하셨습니다 (눅7:34). 예수님의 철학은 열심히 먹고 열심히 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때로 사명을 열심히 감당하시느라 금식할 때가 많았습니다. 이는 사명을 먹는 것보다 더 중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식사할 겨를도 없을 만큼 열심히 사명을 감당하시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그러나 이를 삐딱하게 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예수의 친속들이 듣고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예수님의 모친과 동생들은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걱정이 되어 예수님을 붙잡아 집에 데리고 가고자 온 것입니다. 이를 볼 때 당시에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 비췬 예수님의 모습은 정상인이 아닌 미친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장남으로서 가족도 돌보지 않고 돈도 벌지 않고 30살이 넘도록 장가갈 생각도 하지 않고 어부와 세리와 같은 이상한 사람들을 모아 놓고 공동생활을 하는 것을 볼 때 미쳤음에 틀림없어 보였습니다. 더군다나 미친 사람들은 식사를 잘하지 않는데 예수님도 식사를 제대로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정상인이라고 말하는 기준은 평범하고 소시민적인 것입니다. 그들은 위대한 일은 용납하지 못합니다. 대부분의 부모님들은 자식이 위대한 자가 되기를 바라면서도 실제로 위대한 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면 미쳤다고 생각하고 핍박합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세상에는 미친 사람들이 많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돈에 미친 자들입니다. 권력에 미친 자들이 있습니다. 정욕에 미친 자들도 있습니다. 또 당구나 바둑이나 컴퓨터 오락에 미쳐서 침식을 잊고 그 일에 몰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 미친 자들입니다. 미쳐도 올바로 미쳐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6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극적인 장면을 간증하면서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이때 옆에서 이를 듣고 있던 베스도가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우리는 사람들이 네가 미쳤다고 하면 내가 정말 미친 것이 아닌가 회의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 차린 말을 하나이다 ‥‥‥ 당신 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라.” (행26:25,29)하며 확신 있게 말했습니다. 오늘날에는 안경을 낀 사람들이 많습니다. 안경을 낀 사람들은 자신들이 정상적인 문화인이고 안경을 끼지 않은 사람들은 비정상적인 야만인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안경을 안 낀 사람이 정상이고 안경을 낀 사람이 눈이 나쁜 병신인 것입니다. 애꾸눈 사회에서는 두 눈 가진 자가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가치관이 전도된 시대에서는 물질적이고 육신적이고 인본적인 사람이 정상이고 영적이고 복음적이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미친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영적이고 복음적이고 말씀을 좇아 사는 사람이 정상인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정상적인 사람은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본받지 않고 예수님을 본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믿음으로 사는 것이 가장 정상적이라는 것을 확신해야 겠습니다.
(ii) 사단보다 더 강하신 예수님 (22-27)
22절을 보십시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예수님에 대해 더 지독한 비난의 말을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능력의 역사를 보며 예수님이 더러운 귀신이 들려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난했습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눈 멀고 벙어리 된 자를 고쳐 주시자 이에 대해 비난했습니다 (마12:22). 그들은 사실은 부인할 수 없고 능력의 원천을 사단에게 돌림으로써 사람들에게 회의와 불신을 심고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방해코자 한 것입니다. 이는 독소를 퍼뜨리는 악의에 찬 비난이었습니다.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는 서기관들이 이런 분별없는 비난을 한 것은 시기심에 영적 눈이 멀고 양심이 마비되었기 때문입니다 (막15:10). 그들은 본성이 마귀의 자식들이기 때문에 거짓을 스스럼없이 말했습니다 (요8:44). 오늘날에도 시기심에 눈이 멀어 사람이 변화되는 성령의 역사를 보고도 복음적인 단체를 이단이니 삼단이니 하며 악의에 찬 비난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비난들이 얼마나 사단적인 것인가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비난할 때 예수님은 이를 어떻게 대처하셨습니까? 대개 이런 때는 감정적이 되어 싸우기 쉽습니다. 그러면 문제 해결은 커녕 더 문제에 말려들게 됩니다. 예수님은 감정적으로 이들과 싸우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비난이 얼마나 이치에 맞지 않는 억지인가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만일 나라나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설 수 없고 망하게 됩니다. 나라나, 모임이나, 집안의 멸망의 가장 큰 원인은 내분입니다. 적은 외부의 적보다도 내부의 적이 더 무섭습니다. 사단의 왕국도 스스로 분쟁하면 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단이 사단을 쫓아낼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그의 하신 일이 성령의 역사임을 비유를 들어 설명해 주셨습니다. 강한 자가 한 집을 점령하고 있을 때 그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는 그 집의 세간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강한 자를 결박하기 위해서는 강한 자보다 더 강해야 합니다. 이 비유에서 강한 자는 사단, 집 세간은 사단에게 고통을 받는 인간, 강한 자를 결박한 더 강한 자는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볼 때 인간은 연약하고 사단은 강하고 예수님은 더 강함을 알 수 있습니다. 사단은 연약한 인간의 마음 속에 거하여 자기의 소유로 삼고 마음대로 지배합니다. 우리의 이성을 지배하고 감정을 지배하고 의지를 지배합니다. 사단의 지배 아래 있는 인간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진리를 거스리고 육신의 본능을 좇아 살아갑니다. 사단은 인간으로 하여금 죄의 종노릇하게 하며 자유를 억압합니다. 인간은 사단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고자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결코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는 사단이 인간보다 훨씬 강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상태는 마치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의 노예로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무리 바로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고 싶어도 강한 바로의 세력으로 인해 도저히 벗어날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바로의 세력을 꺾을 수 있는 하나님의 강한 손이 필요했습니다 (출6:1). 이는 마치 쿠웨이트를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강한 이라크보다 더 강한 다국적군이 필요했던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사단의 권세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힘의 문제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사단의 권세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권세를 덧입을 때만이 사단의 권세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문제에 빠졌을 때 말씀 공부와 기도를 하지 않고 내 힘과 의지와 경험으로 문제를 해결해 보고자 애를 쓰다가 실패할 때가 많습니다. 이는 사단의 세력이 얼마나 강한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단의 권세는 절대로 우리 인간의 힘으로 이길 수 없습니다. 정말 겸손하게 주님을 의지하고 말씀을 붙들고 간절히 기도해야 내 속에 역사하는 사단의 권세를 물리칠 수 있습니다. 양들을 도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는 속담에도 아무리 열심히 심방하고 전화하고 카운슬링을 해도 양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권세만이 양들의 마음에 역사하는 강한 사단의 권세를 물리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마귀의 권세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히2:14,15). 이를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망 권세를 파하시고 부활하셨습니다.
(iii) 용서받지 못할 죄 (28-30)
예수님은 악의에 찬 비난을 하는 서기관들에게 무서운 경고를 하셨습니다. 28,29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무릇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 이 말씀에서 볼 때 용서 받을 수 있는 죄가 있고,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수없이 죄를 많이 짓습니다. 거짓말한 죄, 남을 미워하고 시기한 죄, 남을 해치고 죽인 죄, 강간죄, 음란한 죄, 감사치 않고 원망하고 불평한 죄, 무기력하게 누워서 인생을 낭비한 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목자의 사랑을 의심한 죄,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자신을 학대한 죄, 은혜를 배반한 죄, 우상 숭배의 죄 등 우리가 지은 죄는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인간은 실로 죄 중에 태어나서 죄 가운데서 살다가 죄로 인해 죽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무거운 죄짐을 지고 고통하며 탄식하며 살다가 영원한 파멸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 죄는 씻을 수도 없고 지울 수도 없고 태울 수도 없어서 그림자와 같이 늘 우리를 따라 다니며 괴롭힙니다. 그런데 성경은 자신이 죄인임을 인식하고 자비와 긍휼이 필요함을 깨닫고 죄를 진실되게 고백하는 자는 예수님의 보배피로 말미암아 어떤 죄도 용서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예수님)을 힘입어 죄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행13:38).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요한1서1:9).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히9:14). 김대두와 같이 도끼로 17명을 죽인 흉악범도 그 죄를 진실되게 회개했을 때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이와 같이 복음에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용서의 사랑이 있습니다. 이 용서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받고 새 생명을 얻고 새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용서받지 못할 죄가 있습니다. 이는 성령을 훼방하는 죄입니다.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성령의 역사를 고의적으로 거스리는 죄입니다. 성령의 역사를 보고도 고의로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진리를 왜곡하여 독소를 퍼뜨림으로 성령의 역사를 훼방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6:4-6절과 히10:26,27절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한 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한 욕을 보임이라.”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 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히10:26,27). 우리 가운데 어떤 분은 하나님의 은혜를 배반하고 도망갔다가 다시 회개하고 돌아온 후 자기가 혹시 용서받지 못할 죄를 범한 것이 아닌가 두려워하고 고민하는 분이 있습니다. 이런 분은 한마디로 그런 죄를 범하지 않은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고민하고 있는 양심, 구원에 대한 열망, 버림받는데 대한 두려움, 내세에 대한 관심,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소원, 이 모든 것들은 용서받지 못할 죄를 범한 자의 마음에서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또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이 공의의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인생을 살아야 됩니다.
Ⅱ. 예수님의 진정한 가족 (31-35)
예수님께서 성령을 훼방하는 자에 대해 무서운 경고의 말씀을 하시고 계실 때 예수님의 모친과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불러내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데려 가고자 온 것입니다. 예수님의 친 형제들이라도 거듭나서 영적인 눈을 뜨지 못했을 때는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이해하지 못하고 제지시키고자 했습니다. 이에 무리가 예수님을 둘러앉았다가 가족들이 밖에서 찾고 있음을 알려 주었습니다.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32). 무리들은 예수님이 당연히 모든 것을 제쳐 두고 가족들을 맞이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부모와 형제는 어떤 것보다도 우선한다고 생각헸습니다. 무리들이 생각하는 가족관은 혈연 중심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관계로 서로 인연을 맺고 살아갑니다. 지연이나 학연으로 관계를 맺기도 하고 직장 동료나 군대의 전우로서 관계를 맺기도 합니다. 해마다 3월이 되면 캠퍼스에는 동문회가 많이 열립니다. 심지어는 학원 동창회도 있습니다. 또 친척들끼리 모이는 종친회가 있습니다. 인간관계 중 가장 강한 인간관계는 역시 가족 관계입니다. 가족은 40년, 50년이 지나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나라는 특히 유교의 영향으로 가족 관계가 강합니다. 그래서 회사를 차리면 가족들이 주요 간부직을 다 차지합니다. 또한 회사를 승계할 때도 아들에게 물려줍니다. 심지어 김일성은 나라까지도 아들 김정일에게 물려주고자 합니다. 신앙생활 하는 데도 가족이 미치는 영향력은 대단합니다. 성경 공부를 하고 싶어도 부모가 강력히 반대하면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가장 심각하게 부딪히는 문제 중의 하나가 부모님과의 갈등 문제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면 부모님들 중에는 하나님이냐? 부모님이냐?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강요하는 부모님들이 많습니다. 이것은 부모님을 하나님처럼 받들어 섬기도록 가르친 유교의 영향력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들의 이러한 가족관을 완전히 뒤집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제자들을 가리켜 말씀하셨습니다 (마12:49).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예수님의 가족관은 혈과 육으로 맺어진 인간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맺어진 영적 관계입니다. 예수님의 가족관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덧입고 거듭난 자들이 하나님을 한 아버지로 모시는 것입니다 (요1:12). 그러므로 신자들은 모두 하나님을 한 아버지로 모신 형제들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피를 나누었기 때문에 그 어떤 관계보다도 가장 진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족관을 통해 몇 가지 중요한 진리를 배웁니다.
첫째로, 예수님의 가족관에서는 세계성과 영원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족관은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중심한 것이기 때문에 모든 계층과 종족과 나라를 초월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남녀노소, 신분 고하, 계층, 종족, 민족을 막론하고 누구든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는 영남과 호남, 남과 북과 같은 지역 감정이나 민족 분쟁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가족관을 영접할 때 지역 감정과 민족 분쟁을 타파할 수 있고 편협한 마음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가족은 영원합니다. 혈육으로 맺어진 가족은 언젠가는 죽음으로 헤어져야 합니다. 죽음이 아니더라도 여러 가지 이해관계로 인해 남보다 더 좋지 않은 관계로 지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육신의 가족은 영원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영적인 가족은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토록 살 것이기 때문에 영원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영적 가치관입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가족보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영적인 가족들을 더 귀히 여기셨습니다. 그 사람이 인간적인가 영적인가 하는 것은 육신의 가족을 더 사랑하는가? 아니면 영적인 가족을 더 사랑하는가에 달여 있습니다. 영적인 사람은 육신의 가족보다 영적인 가족을 더 귀히 여기고 사랑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가족으로 삼으시고 귀히 여기시고 보호하시고 사랑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육신의 부모와 형제들을 무가치하게 여기고 관계성을 끊은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히는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도 어머님의 장래를 생각하셨고 가정 복음화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요19:26,27). 이로 인해 예수님의 생전에는 예수님이 하시던 일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야고보가 후에는 변화되어 초대 교회 예루살렘 총회장이 되었습니다 (요7:5, 행15:13). 그러므로 우리는 믿지 않는 부모님이나 형제들이 있으면 그들이 예수님을 생명의 구주로 영접하고 믿음으로 사는 예수님의 가족이 될 수 있도록 가정 복음화를 위하여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효도요 사랑입니다. 우리를 죄와 사단의 권세로부터 구원하시고 사랑 받는 그의 가족으로 삼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