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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4:1-20(말씀과 하나님의 나라(Ⅰ))

by Mark Yang   08/15/2019   Mark

Message


마가복음 제 10 강


말씀과 하나님의 나라(Ⅰ)


말씀 : 마가복음 4:1-20
요절 : 마가복음 4:20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예수님의 첫 번째 메시지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이었고 (막1:15), 마지막 메시지도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행1:3). 예수님은 복음 사역을 감당하시면서 쉬임없이 말씀을 가르치셨는데 그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눅4:43,9:11). 4장에 나오는 비유들의 주제도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를 볼 때 예수님의 복음 사역의 목적은 지상에서의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었습니다. 세상은 아담의 범죄 이후 낙원을 상실하고 사단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사단의 지배 아래 있는 세상은 온갖 불의와 폭력, 부정 부패가 가득하게 되었고, 사람들은 이런 세상에 살면서 참된 평강을 상실하고 온갖 질병과 귀신들려 울부짖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고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를 심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전파하신 하나님의 나라에는 하나님의 뜻을 행한 사람들이 장차 들어가게 될 미래적인 하나님의 나라와 (마7:21), 현재 이 땅에서 인간의 마음 속에 이루어지는 현재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눅17:21). 본문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적인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오늘 말씀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사람이 어떻게 많은 열매를 맺는 풍성한 인생을 살 수 있는가 하는 비결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Ⅰ. 씨 뿌리는 자의 비유 (1-9)
1절은 예수님께서 바닷가에서 말씀을 가르치시는 아름다운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날씨가 더워지기 시작하는 어느 봄날 예수님께서 집에서 말씀을 가르치시다가 더워서 시원한 바닷가로 나가셨습니다. 그러자 큰 무리가 모여들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배에 올라 바다에 떠 앉으시고 뱃머리를 강단 삼아 말씀을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아름답고 잔잔한 갈릴리 바다에 많은 물소리와 같은 예수님의 낭랑한 음성이 조용히 파고를 일며 울려 펴졌습니다. 무리들은 바다 곁 육지에 앉아서 숨을 죽이며 말씀을 듣고 있었고, 갈매기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자 끼욱끼욱하며 예수님 주위로 모여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물고기들까지도 생명의 말씀을 듣고자 호수 위로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이 장면은 마치 한 폭의 그림과 같이 아름답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집에서나 들에서나 바닷가에서나 그 어디에서나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쉬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만이 인생들에게 생명을 주고 모든 인생 문제를 해결해 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저희에게 여러 가지를 비유로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무나 심오한 것이어서 인간의 언어로 설명하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리들이 알아듣기 쉽게 비유로 가르치셨습니다(33). 비유(parable)는 우화(allegory)와 다릅니다. 우화는 그 자체에 상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만, 비유는 숨은 뜻을 잘 드러내기 위해 사용하는 단순한 이야기입니다.비유의 특징은 듣는 자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어서 진리를 알고자 하는 자에게는 비밀을 깨닫게 해 줍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언제나 심오하고 참신하고 생명력이 넘쳤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먼저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가르치시기 전에 먼저 “들으라”(listen!)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이 말씀에 깊이 귀를 기울이도록 그들의 주의를 환기시키셨습니다. 이는 말씀을 듣는 자세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무리들 가운데는 아무 문제의식 없이 건성으로 듣는 사람, 여러 가지 현실 문제로 인해 마음이 분산되어 있는 사람, 시국 문제로 열이 받쳐 있는 사람, 처음부터 졸기로 작정하고 말씀을 듣는 사람 등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말씀을 받고자 하는 간절한 심정을 가지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주의를 환기시키셨습니다.
씨를 뿌리는 자가 씨를 뿌렸습니다. 씨들은 각각 네 종류의 밭에 떨어졌습니다. 더러는 길가에 떨어졌습니다. 여기서 길가는 밭과 밭 사이의 작은 길을 말합니다. 이 씨는 딱딱한 땅을 뚫고 들어갈 수가 없어서 이리저리 굴러 다녔습니다. 이 때 먹이를 찾아 헤매던 배고픈 참새가 이게 왠 떡이냐 하며 날름 쪼아먹었습니다.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졌습니다. 이 씨는 뿌리를 내리고 곧 탐스러운 싹을 내었습니다. 잎이 광합성 작용을 하는 데는 적당한 수분, 적당한 온도,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에다 반드시 빛 에너지가 있어야 합니다. 태양은 지구상에 있는 모든 식물들에게 빛 에너지를 무한정 공급해 줌으로써 광합성 작용을 하게 하여 연간 5,000억 톤이라는 엄청난 양의 유기물을 생산해 냅니다. 그 중 인류의 식량으로 소비되는 양은 100억 톤도 안됩니다. 태양은 식물이 광합성 작용을 하는데 없어서는 안되는 필수 불가결한 요소입니다. 그런데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진 씨는 돌 때문에 뿌리를 깊이 내릴 수 없어서 충분한 수분 공급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안타깝게도 강렬한 태양을 견디지 못하고 시들시들 마르다가 타져서 죽어 버렸습니다. 더러는 가시 떨기에 떨어졌습니다. 이 밭은 부드럽고 영양분도 풍부한 옥토였습니다. 돌도 없어 뿌리를 깊이 내려 마음껏 수분을 빨아올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가시 떨기가 함께 자라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가시는 생명력이 강하고 자라는 속도가 빨라 왕성히 자랍니다. 이 씨는 잘 자라는 듯하다가 가시에게 수분과 영양분을 다 빼앗기고 또 가시 떨기의 왕성한 성장의 기운에 막혀 비실비실하다가 결국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이 씨는 싹을 내고 뿌리를 깊이 내리고 수분을 마음껏 빨아 올렸습니다. 그리고 햇빛을 충분히 받아 왕성한 광합성 작용을 하며 무럭무럭 성장했습니다. 때로는 비바람이 몰아쳤으나 그 때마다 넘어지기는 커녕 오히려 더 깊이 뿌리를 내리고 성장했습니다. 때가 되자 꽃을 피우고 탐스러운 열매를 맺어 30배, 60배, 100배의 풍성한 결실을 맺었습니다.
이상의 비유에서 볼 때 씨가 어디에 떨어졌는가가 매우 중요함을 배우게 됩니다. 열매를 맺고 못 맺는 것은 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밭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씨는 그 자체에 생명력이 있어서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씨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환경이 잘 마련되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 자체는 생명력이 있어서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능성이 현실로 되기 위해서는 말씀을 듣는 우리의 마음 밭이 좋아야 합니다.
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말씀을 마치신 후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를 볼 때 들을 수 있는 귀가 있고 귀는 있으나 들을 수 없는 귀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소리를 듣는 것과 뜻을 듣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외국어를 듣기는 하지만 들을 귀가 없는 자는 그 뜻을 전혀 알아듣지 못합니다. 또 아름다운 음악을 듣지만 들을 귀가 없는 자는 자장가 소리로 들려 졸게 됩니다. 그러나 들을 귀가 있는 자는 음악을 듣고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영적인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는 영적인 귀가 있으면 말씀을 통해 하나 둘 영적인 진리를 깨닫고 성장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귀가 없으면 말씀을 들어도 지루하기만 하여 하품만 하고 몸을 비비틀게 됩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이 들은 바 말씀을 가볍게 넘기지 않고 깊이 생각함으로써 그 뜻을 깨닫도록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Ⅱ. 비유를 말씀하시는 목적 (10-12)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자 무리들이 한마디씩 하며 흩어졌습니다. “오늘 재미있는 이야기 잘 들었다. 예수님은 언제나 재미있게 말씀하신다 말이야.” “거 너무 당연한 이야기잖아. 오늘 메시지는 너무 싱거워서 건질 것이 없는데” 그러나 그 중에는 말씀의 깊은 뜻을 알고자 하는 영적 소원을 가진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열두 제자들과 그와 함께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홀로 계실 때에 나아와 비유의 뜻을 물었습니다. 이처럼 소원을 가지고 뜻을 알고자 묻는 것이 중요합니다. 묻지 않을 때 아무 것도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피상적으로 아는 것을 다 아는 것으로 생각하고 묻지 않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아무 것도 모르면서 자존심 때문에 아는 것처럼 행세를 하고 묻지 않습니다. 이런 자는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고 성장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말씀 공부를 할 때 문제의식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가 물어야 합니다. 묻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묻는 자들을 심히 기뻐하시고 말씀하셨습니다. 11,1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비밀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비밀은 귀한 것이고 또 감추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계입니다. 이는 불의와 미움이 없는 진리의 세계요 은혜의 세계요 사랑의 세계입니다. 또한 이 세계는 어두움과 죽음이 조금도 없는 빛의 세계요 생명의 세계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지극히 값진 진주와 같이 너무나 보배롭고 귀하여 이를 발견한 자는 자신의 모든 소유를 팔고 젊음과 전인생을 투자하여 이를 사고자 합니다 (마13:46).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너희에게는 주어졌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어떤 자들입니까? 그들은 영적인 소원을 가지고 말씀의 숨은 뜻을 알고자 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갈급한 자들로서 탐구심이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무엇인가 안다는 자만심을 경계하고 항상 자신의 부족함을 인식하고 이를 채우고자 끊임없이 노력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는 말씀 앞에 겸손합니다. 이런 자는 영적 세계의 비밀을 깨닫고 날로 날로 성장하게 됩니다. 이런 자의 눈은 영롱하게 빛나며 생명력이 약동합니다.
이런 자에게 주어지는 영적 축복이 무엇입니까? 말씀은 우리의 영적 무지를 깨우쳐 줍니다. 우리는 말씀 공부를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며, 성령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또한 말씀은 거울과 같아서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비참한 죄인인가를 비쳐 줍니다. 이때 우리는 자신의 죄를 애통하며 회개하게 됩니다. 죄를 진실되게 회개할 때 사죄의 은혜를 덧입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고 새 인생을 살 수 있게 됩니다. 그 때 내적, 외적으로 자연히 많은 열매를 맺는 풍성한 삶을 살게 됩니다. 이 과정은 말씀을 듣고 깨닫고 돌이키고 죄사함을 받는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같은 말씀을 공부하더라도 아무런 깨달음도 없고 맹숭맹숭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인생에 대해 아무런 문제 의식이 없고 영적인 소원도 없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성경 말씀을 단순히 지식인으로서 알아야 할 상식이나 교양 정도로 생각합니다. 이런 자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숨기워졌습니다 (마11:25). 이런 자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것은 마치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는 것과 같이 무가치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자들을 외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들은 스스로 외인이 된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마음이 완악하여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합니다. 이런 자들은 회개할 수도 없고 죄사함의 은총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영적 소원을 가지고 겸손하게 주님께 나아와 묻기를 원하십니다. 이런 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보화가 주어집니다.
Ⅲ. 비유의 뜻 (13-20)
예수님은 비유의 뜻을 묻는 자들에게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냐?”하시며 가볍게 책망하신 후 비유의 뜻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모든 비유의 기본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이 비유가 씨를 뿌리는 것에서 시작하여 성장하고 열매 맺는 것으로 끝나는데 이는 모든 역사의 기본이 되기 때문입니다. 뿌리는 자는 말씀의 종들을 가리키고, 씨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씨가 떨어진 밭은 말씀을 듣는 자의 마음을 가리킵니다.
첫째, 길가와 같은 마음밭 (15)
15절을 보십시오. “말씀이 길 가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사단이 즉시 와서 저희에게 뿌리운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길가와 같은 마음 밭을 가진 자는 말씀을 듣기는 들어도 한 말씀도 영접치 않는 자를 말합니다. 이런 자들은 말씀을 들을 때 말씀 자체에 귀를 기울이기 보다 다른 생각을 합니다. 메신저의 옷차림에 관심을 갖기도 하고 넥타이 색깔에 관심을 갖기도 합니다. 또는 메시지 스타일에 관심을 갖습니다. 길가의 특징은 딱딱하다는 것입니다. 길가와 같은 마음 밭을 가진 자는 말씀이 심령에 역사할 수 없도록 마음이 딱딱합니다. 어떤 사람은 기독교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 때문에 마음이 딱딱합니다. 또한 어떤 사람은 자기 생각이 강하여 말씀에 대한 비판적인 마음으로 마음이 딱딱합니다. 이런 자는 말씀 앞에 교만하고 반발심이 강합니다.
이렇게 말씀을 영접하지 않을 때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사단이 호시탐탐 노리다가 말씀을 빼앗아 가 버립니다. 사단은 우리가 말씀을 받고 회개하고 죄사함 받고 구원받는 것을 싫어하고 이를 필사적으로 방해합니다. 우리가 문제가 있을 때 적극적으로 말씀을 붙들고 투쟁하면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힘과 지혜를 덧입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개가 문제가 생기면 말씀 공부를 회피하고 목자님을 요리조리 피합니다. 이는 사단이 말씀을 받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입니다.
길가와 같은 마음 밭은 회개의 포크레인으로 갈아엎어서 순수하고 진실되고 단순하고 겸손한 마음 밭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말씀의 씨가 심기워져서 자랄 수 있습니다.
둘째, 돌밭과 같은 마음 밭 (16,17)
16,17절을 보십시오. “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간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돌밭과 같은 마음 밭을 가진 자의 좋은 점은 스폰지가 물을 흡수하듯 말씀을 즉시 기쁨으로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는 1:1 말씀 공부도 열심히 하고 소감도 꼬박꼬박 잘 씁니다. 주일 예배도 빠지지 않고 참석하여 열심히 말씀을 듣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영접하고 할렐루야 아멘을 연발합니다. 이런 자는 누가 보나 좋은 마음 밭을 가진 자같이 보입니다. 목자는 천신만고 끝에 좋은 양을 만났다고 기뻐하고 자랑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부러운 눈초리로 바라봅니다. 그러나 이런 자들은 자세히 살펴보면 감정적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말씀을 깊이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좋으니까 받아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그 내면이 흙이 얇은 돌밭과 같이 얇고 피상적입니다. 신앙이 감정에 치우쳐서 냄비와 같이 쉽게 데워졌다가 쉽게 식어집니다. 감정적인 자는 말씀에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말씀에 뿌리를 내리려면 우리의 지성과 감성과 의지가 다 동원되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이란 지성과 감성과 의지가 조화되어야 올바른 신앙생활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말씀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자들은 성령의 참된 역사가 없고 속사람이 변화되지 않은 사람입니다. 한 마디로 복음 신앙이 없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는 믿음의 뿌리가 없기 때문에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게 되면 곧 넘어지게 됩니다. 신앙생활로 인해 손해가 생기거나 불이익이 올 경우 미련 없이 도망가 버립니다.
우리가 말씀을 공부하고 말씀대로 살게 되면 반드시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게 됩니다. 롯과 같이 세상과 양다리 걸치며 적당히 살면 핍박을 면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분명한 복음 신앙을 가지고 살면 반드시 핍박을 받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딤후 3:12절에서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 핍박은 우리에게 고통을 주고 아무 의미가 없는 것 같지만 실상은 신앙 성장에 매우 유익합니다. 예수님은 환난이나 핍박을 해가 돋는 것에 비유하셨습니다. 햇빛이 식물 성장에 매우 유익합니다. 햇빛이 식물 성장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것과 같이, 환난이나 핍박도 신앙 성장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것입니다. 환난이나 핍박은 우리가 알게 모르게 붙들고 있는 세상의 헛된 소망을 털어 버리게 하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산소망을 갖게 합니다. 환난이나 핍박은 믿음의 뿌리를 깊이 내리게 하고 내면을 강하게 하여 거목으로 자라게 합니다. 온실의 나무는 연약하고 크게 자랄 수 없습니다. 거목으로 자라나려면 반드시 비바람을 맞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환난이나 핍박이 문제가 아니라 뿌리가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말씀에 뿌리를 내려야 함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8:31절에서 자기를 믿는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내 말에 거한다’는 것은 말씀에 깊이 뿌리를 내리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골2:6,7절에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라”고 권면했습니다. 말씀에 뿌리를 내린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까? 이는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성을 맺고 개인 신앙을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개인 신앙이 없고 그룹 신앙을 가진 자는 어려움이 생기면 이를 견딜 수 있는 내적 힘이 없기 때문에 넘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성을 맺고 구원의 은혜와 부르심이 분명한 자는 어떤 어려움이 닥쳐오더라도 넘어지지 않고 오히려 더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됩니다. 말씀에 뿌리를 내린 자는 말씀에 기초한 분명한 인생관과 가치관이 있고 역사관, 세계관이 있습니다. 이런 자는 말씀의 눈으로 모든 것을 봅니다.
말씀에 뿌리를 내리는 것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소홀히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는 실상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돌밭과 같은 마음 밭은 마음 깊은 곳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하는 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뿌리를 내리려면 돌을 드러내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어떤 분은 자기 이상과 욕심의 돌이 있습니다. 결혼에 대한 이상과 욕심 때문에 믿음이 자라지 않습니다. 어떤 분은 강한 자존심의 돌 때문에 믿음의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층층이 돌이 있어 돌을 들어내기가 어렵습니다. 이러한 돌들은 회개의 망치로 깨뜨려서 들어내야만이 비로소 말씀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날 수 있습니다.
셋째, 가시 떨기와 같은 마음 밭 (18,19)
18,19절을 보십시오. “또 어떤 이는 가시 떨기에 뿌리우는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되는 자요” 가시 떨기와 같은 마음 밭을 가진 자는 말씀을 받고 싹을 냅니다. 또 뿌리도 내립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성장도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가시 떨기도 함께 자라나 그 기운에 막혀 결국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가시에는 세 종류의 가시가 있습니다.
첫째는, 세상 염려의 가시입니다. 세상 염려는 결핍에서 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현재 먹고 살면서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합니다. 또 이렇게 믿음으로 살다가 실패하는 것이 아닌가? 세상에서 낙오하지나 않을까 염려합니다. 조금 열심히 일해 놓고 요절하지나 않을까? 배가 조금만 아파도 혹시 위암이 아닌가 염려합니다. 또 내가 싫어하는 사람과 결혼하게 되면 어떻게 되나 염려합니다. 또 결혼하면 오르는 전세값에 대한 염려, 아기에 대한 염려 등 염려가 더 많이 생깁니다. 또 어떤 분은 대상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막연히 염려를 합니다. 이런 분들은 염려를 하지 않으면 불안하기 때문에 염려의 공장장이 되어 염려를 창조하여서 염려를 합니다. 세상 염려의 가시에 찔리게 되면 얼굴이 어둡고 주근깨가 생기게 됩니다. 심령에 기쁨을 상실하고 비실비실하게 됩니다. 세상 염려는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을 믿지 못하는 불신에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가 불신을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책임져 주실 것을 믿고 전폭적으로 그를 신뢰하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때 세상 염려의 가시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재리의 유혹의 가시입니다. 재리의 유혹은 재물에 대한 욕심을 말합니다. 즉 재물의 기만성에 빠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재물만 있으면 행복해 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돈을 사랑하고 재물에 대한 욕심을 갖습니다. 그러나 이는 큰 착각입니다. 욕망이란 끝없는 심연과 같아서 아무리 채우고 채워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이러한 재물에 대한 유혹은 고생하고 싶지 않고 세상을 즐기고 싶은 마음 즉,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생겨납니다. 사람이 재물에 대한 욕심이 생기면 십자가, 희생, 헌신이란 단어가 부담스럽게 됩니다. 그리고 어리석은 부자와 같이 하나님께 인색하게 되고 몰래 자기 것을 꾸리게 됩니다. 그러다가 자기도 모르게 시험과 올무에 빠져 믿음에서 떨어지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부하려 하는 자들에게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근원이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찔렀도다” 우리는 재물이 있을 때 주와 복음을 위하여 더욱 희생적인 생활을 해야 됩니다. 물질을 자기를 위해 쓰기보다 생명을 살리는 주의 선한 사업에 써야 합니다.
셋째로, 욕심의 가시입니다. 기타 욕심은 명예욕, 권세욕, 정욕, 식욕, 수면욕이 있습니다. 우리 젊은이들에게는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인간적인 야심과 정욕의 가시에 찔리기 쉽습니다. 특히 정욕의 가시에 찔리게 되면 인격이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고 내면이 황폐하게 되어 정신병자와 같이 되어 못쓰게 됩니다. 이러한 욕심의 가시는 죄의 근원이 되므로 마음에 생기는 즉시 뽑아야 됩니다 (약1:15).
넷째, 좋은 마음 밭 (20)
20절을 보십시오.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좋은 마음 밭을 가진 자는 말씀을 듣고 받아 30배, 60배, 100배의 풍성한 결실을 맺습니다. 말씀을 듣고 받는다는 것은 말씀에 순종하고 말씀을 좇아 산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는 말씀을 지극히 사랑하여 말씀을 가까이 하기에 힘쓰고 말씀에 기초하여 생각하고 말씀의 영양분을 받기에 힘씁니다. 또한 이런 자는 말씀 앞에 겸비하여 말씀을 기초로 회개하기에 힘쓰고 사죄의 은혜를 덧입습니다. 이런 자의 생활에는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과 생활의 성결이 있습니다. 말씀이 그 속에서 세력을 얻어 모든 죄악된 생각과 인본적인 생각을 물리칩니다. 이로 인해 인격이 변화되고 생활이 변화됩니다. 이런 자의 삶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이 늘 푸르고 밝고 힘차며 생동감이 넘칩니다. 이런 자는 결국 말씀으로 인하여 내적 외적으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열매를 맺고 풍성한 삶을 살게 됩니다.
결론: 우리 인생은 열매를 맺어야 할 절대적인 사명이 있습니다 (창1:28). 인생은 열매를 맺을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 은혜가 되고 자신에게는 기쁨이 됩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외부에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듣는 내 마음 자세에 달려 있습니다. 4가지 마음 밭은 운명적으로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좋은 마음 밭으로 가꿀 수 있습니다. 이 시간 내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원인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고 좋은 마음 밭으로 가꾸어서 30배, 60배, 100배의 풍성한 열매를 맺는 복된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