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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4:35-41(광풍을 잠잠케 하신 예수님)

by Mark Yang   08/15/2019   Mark

Message


마가복음 제 12 강


광풍을 잠잠케 하신 예수님


말씀 : 마가복음 4:35-41
요절 : 마가복음 4: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 지더라.”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광풍을 잠잠케 하신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은 자연 세계도 지배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또한 제자들에게는 광풍 훈련을 시키사 그들이 어떤 역경도 극복할 수 있는 믿음의 용사로 키우셨습니다.
우리는 인생 항해 중에 크고 작은 광풍을 만납니다. 광풍은 전혀 예기치 않게 옵니다. 우리는 광풍을 만나면 두려워하고 절망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볼 때 광풍은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광풍을 이기는 믿음의 용사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 예수님 (35-39)
예수님은 복음 역사의 초기부터 열 두 제자를 택하시고 그들을 훈련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를 택하신 목적 중의 하나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심이었습니다 (막3:14). 그러나 예수님은 대부분의 시간을 무리들을 위해 사용하셨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많이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심은 주로 제자들에게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틈나는 대로 훈련하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주로 집에서 잠깐 쉬실 때나 식사하실 때, 또 길 가실 때나 여행 중에 제자들을 가르치셨습니다. 또한 일생 생활 중에 겪는 여러 사건을 통해서 제자들을 교육하셨습니다.
35절을 보십시오. 그날 저물 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른 아침부터 해질 무렵까지 하루 종일 무리들에게 여러 가지 비유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예수님은 제자들이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하기 때문에 몹시 지쳐 있음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쉼이 필요함을 아시고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제안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제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즉시 알아차렸습니다. 그것은 짧은 휴가였습니다. 제자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며 흥분된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갑시다! 갑시다! 갑시다!” 저 멀리 산들이 그들의 기쁨을 이해라도 한 듯이 메아리를 쳤습니다. “갑시다. 갑시다. 갑시다. 갑시다……” 제자들은 즉시 예수님께서 배에 올라앉아 말씀을 가르치신 그대로 모시고 갔습니다. 그들 중에는 어부 출신들이 있었기 때문에 익숙하게 배를 저어 갔습니다. 배는 순풍에 돛을 단 듯 갈릴리 호수 위를 미끄러지듯이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시원한 바람이 제자들의 뺨을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 밤은 유난히도 밝은 달빛이 갈릴리 호수 위를 비추어 아름다운 빛을 발하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예수님과 함께 M.T를 가는 제자들은 매우 행복했습니다. 그들의 입에서는 자연스럽게 노래가 흘러나왔습니다. 빌립이 산타루치아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창공에 빛난 별 물 위에 어리어 바람은 고요히 불어 오누나, 내 배는 살같이 바다를 지난다 산타루치아 산타루치아” 곧 이어서 안드레가 찬송가를 불렀습니다.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저 큰 바다보다 깊다. 너 곧 닻줄을 끌러 깊은 데로 저 한가운데 가보라“ 그러자 모두 합창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고요한 갈릴리 호수 위에 합창은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루며 힘차게 울려 퍼졌습니다. 이는 실로 행복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행복은 광풍으로 인해 순식간에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호수 한가운데 들어섰을 때 갑자기 하늘이 캄캄해지고 천둥번개가 치더니 광풍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갈릴리 호수는 지중해보다 약 200M가 낮고 주위는 높은 산들이 있는 고원으로 둘러 싸여 있습니다. 산에서 흘러내려 호수로 들어가는 강들은 깊은 협곡을 따라 들어와 갈릴리 호수 위의 덥고 습기찬 공기와 부딪치게 되면 갑작스럽고 격렬하게 광풍이 일어나게 됩니다. 갈릴리 호수는 평소에는 거울과 같이 맑고 잔잔합니다. 그러다가 가끔 갑자기 광풍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것은 전혀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갈릴리 호수의 특징입니다. 광풍이 일어나자 제자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기술과 경험과 지식을 총동원하여 필사적으로 광풍과 싸우며 배를 조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 중 몇 사람은 수없이 파도와 싸워 온 노련한 어부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광풍 앞에서는 그들의 노련한 기술과 경험과 지식이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광풍이 무섭게 휘몰아 칠 때 배는 추풍낙엽과 같이 춤을 추었습니다. 노도와 같은 물결이 일어나 뱃전에 부딪칠 때 배는 금방이라도 뒤집힐 듯 심하게 요동하였습니다. 배에는 물이 들어와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마침내 배를 조종할 힘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물에 빠져 죽을 큰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지난날 사람들로부터 들었던 슬픈 이야기들이 바로 자신들에게도 닥쳤음을 느끼는 순간 죽음의 공포로 전율했습니다.
호수 이편에서 저편으로 건너가는 것은 인생 항로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평소에는 순풍에 돛을 단 듯 별 문제없이 평탄한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인생은 즐거운 것이야”라고 말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전혀 예기치 않게 광풍을 만나게 됩니다. 암에 걸려 사형 선고를 받기도 하고 중풍과 같은 질병의 광풍을 만나기도 합니다. 또 순간적인 실수로 교통사고나 화재와 같은 재난의 광풍을 만나기도 합니다. 또 부도가 나서 하루 아침에 사업이 망하는 파산의 광풍을 만나기도 합니다. 또 라지브 간디와 같이 꽃다발을 받다가 폭사하는 죽음의 광풍을 만나기도 합니다. 이러한 광풍들은 전혀 예기치 못하게 갑작스럽게 일어납니다. 이런 광풍들은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무서운 것입니다. 광풍 앞에서는 인간의 지식이나 기술이나 경험 또한 돈이나 지위나 권세와 같은 것들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광풍은 우리를 두렵게 하고 슬프게 하고 절망하게 합니다. 믿음이 없는 자에게는 이런 광풍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광풍을 만나면 절망하고 엎드러집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자에게는 광풍이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광풍을 통해서 인간의 한계를 절실히 깨닫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을 수 있습니다. 또한 세상의 헛된 소망을 훌훌 털어 버리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산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광풍은 우리를 믿음의 세계로 인도하고 영적인 사람으로 빚어 만들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잔잔하던 갈릴리 호수에 광풍이 일어나자 평화롭던 제자들의 마음에도 광풍이 일어났습니다. 두려움의 광풍, 의심의 광풍, 절망의 광풍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노도와 같은 파도로 인하여 심한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들의 얼굴은 죽음의 공포로 사색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한계 상황에 부딪혀 절망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예수님이 우리를 돌아보지 않으시고 주무시기만 하시는가 예수님의 사랑을 의심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사랑을 의심하였을 때 팔다리에 힘이 빠지고 투쟁 의욕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역경 가운데 처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할 때 역경을 이길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8:37)
제자들이 광풍으로 인해 심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사색이 되어 있을 때 예수님은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38a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예수님은 하루 종일 말씀을 가르치시고 양들을 돌보시느라 얼마나 피곤하셨는지 배를 타시자마자 깊은 잠에 빠지셨습니다. 이는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한 후에 맛볼 수 있는 깊은 안식이었습니다. 이 안식은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함으로 누리는 안식입니다. 예수님은 얼마나 깊이 잠드셨는지 광풍이 대작하여 물결이 배를 때리고 배에 물이 들어와 잠기게 될 지경에서도 조금도 요동치 않으시고 폭풍우를 자장가 삼아 평안히 주무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는 평화의 순간이었습니다.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이렇게 단잠을 잘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오늘날 현대인의 특징 중의 하나는 불면증입니다. 불확실성의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불안하여서 잠을 잘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할 때 하나님의 품 안에서 참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 단잠을 주십니다 (시127:2).
제자들은 자기들의 노력으로 최선을 다하다가 한계 상황에 부딪쳤습니다. 이때 그들은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들은 예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에 대해서 너무 무관심하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주님께 매달려 기도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절망 중에 부르짖어 도움을 구할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십니다. 예수님은 환난 중에 우리의 진정한 도움자가 되시고 유일한 피난처가 되십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 주님께 부르짖을 때 주님께서 반드시 그 기도를 응답해 주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가 간구하였을 때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3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그러자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졌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배웁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말씀으로 자연 세계를 지배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성난 파도를 향하여 “잠잠하라! 고요하라!” 명령하시자 그들은 즉시 그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성난 바람과 파도를 잠잠케 하실 수 있는 권세가 있었습니다. 이 말씀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바로 그 분의 말씀이었습니다. 태초에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온 땅에 뒤덮여 있을 때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자 순식간에 흑암의 세력이 물러가고 온 세상을 밝히는 찬란한 빛이 생겨났습니다 (창1:2,3). 이와 같이 예수님은 본래 말씀 한마디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창조주가 되십니다 (요1:3). 예수님의 말씀에는 창조의 권능이 있었고 또한 창조된 세계를 그 뜻대로 주관하시는 권능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광풍을 잠잠케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둘째로, 예수님께서 광풍을 꾸짖으실 때 그 이면에 역사하는 사단의 세력을 꾸짖으셨습니다. ‘잠잠하라’라는 동사는 귀신에게서 그 능력을 빼앗을 때 사용하는 전문용어입니다. 마가복음 1:24,2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계실 때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귀신을 꾸짖어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귀신은 큰 소리를 지르며 그 사람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잠잠하라”는 동사를 사용하신 것은 광풍 이면에 귀신의 세력이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사단은 예수님이 피곤하여 주무시고 있는 사이에 광풍을 일으켜 인류 구속 역사를 파괴시키고자 했습니다. 배 안에는 구속 역사의 주인공인 예수님과 제자들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제자들이 바다에 빠져 죽으면 인류 구속 역사는 무위로 끝나고 맙니다. 그러나 사단이 결코 예수님이 타신 배를 파선시킬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말씀 한마디로 노도와 같은 사단의 세력을 파하셨습니다.
사단은 매우 간교하여 우리를 잘 속입니다. 우리는 광풍이 일어나는 것을 볼 때 성난 바람이 문제의 원인인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나타나는 증상만 보고 속기 쉽습니다. 물론 성난 바람이 실제적인 문제가 됩니다. 그러나 실상은 성난 바람을 일으켜서 제자들을 두렵게 만들게 하는 장본인은 바로 사단이었습니다. 우리는 실제 문제들 위에 역사하는 사단의 역사를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사단과 대적해서 싸워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사단의 궤계를 파하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Ⅱ. 제자들을 꾸짖으신 예수님 (40,41)
예수님은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광풍을 잠잠케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제는 제자들을 꾸짖으셨습니다. 40절을 보십시오.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첫째로, 예수님은 제자들이 두려움을 이기는 믿음을 갖도록 훈련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들 정말 수고했다. 내가 너무 곤하여 깜박 잠이 들었었구나.” 이렇게 위로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반대로 제자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책망하신 이유는 그들이 단잠을 주무시고 계시는 예수님을 깨웠기 때문이 아니라 두려움에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또 그들이 두려워하는 이유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광풍이 일어났을 때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이 두려움의 종이 되었을 때 손발이 마비되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두려움은 믿음의 반대입니다. 두려움은 믿음으로만이 이길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광풍 가운데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평안하고 담대해 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으면 미풍만 불어도 마음에는 광풍이 일어나게 됩니다. 제자들은 평화롭게 주무시는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타고 있었으나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두려움에 사로잡혀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두려움에 떠는 자는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이러한 두려움은 사단이 우리의 마음에 심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입니다 (딤후1:7). 예수님은 제자들이 두려움을 이기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책망하심으로 그들 마음에 믿음을 심으셨습니다.
우리는 복음 역사를 섬기면서 여러 가지 두려운 일들을 많이 만납니다. 이때 우리가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면 움추러 들고 뒤로 물러가게 됩니다. 매사에 소극적이 되고 부정적이 되어 자신을 잃게 됩니다. 그러면 목소리가 기어 들어가고 어깨가 축 늘어져서 젊은이로서의 기백을 잃고 쓸모 없게 되어 버립니다. 이때 우리는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하시는 주님의 책망하는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제자들이 믿음의 능력을 갖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고 말씀하실 때 예수님은 그들이 믿음의 능력을 갖기를 원하셨습니다. 믿음은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능력을 갖기를 원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막11:22,23) 히브리서 11장에는 믿음의 영웅들에 대한 기록이 나옵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평범하고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보잘 것 없는 자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은 불의가 가득찬 세상에서 믿음으로 사느라 많은 조롱과 핍박을 받고 사회적으로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불이익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영웅들은 믿음으로 세상의 악을 이기고 승리했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모든 연약함을 극복하고 절망을 극복하고 불가능한 상황을 극복하고 새 역사를 창조했습니다. 우리는 일이 잘 안 되면 상황을 탓하고 인간 조건을 탓하기 쉽습니다. 캠퍼스 분위기가 너무 힘들다. 양들이 너무 완악하다. 나는 목자로서 재능이 없다. 목자 체질이 아니다. 이렇게 탓을 하고 불의한 생각을 하면 더욱 힘들게 보이고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이는 결코 상황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믿음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광풍을 탓하고 죽는 소리를 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고 책망하심으로 그들이 믿음의 능력을 덧입고 광풍을 이기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능력을 덧입을 때 불가능하게 보이던 상황은 완전히 달라지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 나라가 처한 현실, 캠퍼스의 상황은 복음 역사를 가장 잘 이룰 수 있는 상황으로 바꾸어지게 됩니다. 이때 우리는 담대히 외칠 수 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4:13)
셋째는, 광풍 훈련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광풍과 싸우며 절망 중에 빠져 있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당장에 그들을 도와 주시지 않으시고 광풍 가운데 내버려두셨습니다. 이는 광풍을 통해 그들의 믿음이 단련되고 이론적인 믿음에서 실제적인 믿음을 소유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가리켜 광풍 훈련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믿는 자들에게 죄사함의 은혜에서부터 하나님 나라의 영광에 이르기까지 모든 좋은 것을 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사는 날 동안 환난을 면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이는 환난은 우리의 믿음을 성장시키고 성화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환난은 우리를 겸손케 하고 순수케하고 진실케 합니다. 환난은 우리의 내면을 강하게 하고 믿음의 능력, 기도의 능력을 체험케 합니다. 환난은 우리를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 만듭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시편 기자와 같이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시119:71). 그러므로 우리는 광풍을 만날 때 하나님께 원망하기보다 감사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광풍은 우리를 하나님의 쓰실 만한 사람으로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광풍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들을 광풍 가운데 내버려두시고 훈련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연약한 가운데 머물러 있기를 원치 않으시고 광풍을 이기는 믿음의 용사가 되도록 훈련하셨습니다. 이것이 고차원적인 사랑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광풍 가운데서도 요동치 않는 믿음의 용사가 될 수 있습니까? 우리는 광풍 중에서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광풍을 바라보면 두렵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생사 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때 우리의 심령은 고요해지고 찬송과 감사로 가득차게 됩니다.
41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은 예수님의 책망을 듣고 심히 두려워하며 서로 말하였습니다.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그들은 예수님께 대하여 깊은 경외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광풍 훈련을 통하여 제자들의 영적인 눈이 떠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야말로 이 땅에 오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광풍 훈련을 통하여 우리를 믿음의 용사로 키우시는 주님의 크신 사랑을 인하여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