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제 14 강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말씀 : 마가복음 5:21-43
요절 : 마가복음 5: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
오늘 본문에는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예수님께 나아와 고침을 받는 사건과 죽은 야이로의 딸이 살아나는 사건이 나옵니다. 이 두 사건은 어두운 밤과 같은 인간의 내면에 메시야의 구원의 빛이 환하게 비추이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사건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믿음의 사람을 기뻐하시고 축복하신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또한 예수님은 어떤 고질병도 고쳐 주시고 죽은 자도 살려 주시는 생명의 구주이심을 배웁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 심령 속에 역사하는 모든 불신과 두려움을 몰아내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예수님께 간구한 회당장 야이로 (21-24)
지난 강의에서 예수님은 거라사 지방에 가셔서 군대 귀신들린 한 영혼을 고치시기 위해 돼지 2천 마리를 희생시켰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거라사 지방에서 다시 바다 이편으로 돌아오셔야 하셨습니다. 그들이 도착하자마자 큰 무리가 대환영을 하며 예수님께로 모여들었습니다(21). 그들은 대부분 병들고 영육간에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자들이었습니다. 선한 목자 예수님은 언제든지 이들을 도와 줄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리들을 돕기 위해 바닷가에 서 계셨을 때 무리 가운데서 황급히 달려 나온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회당장 야이로였습니다. 유대 사회는 회당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회당장은 회당 건물을 유지하고 보존할 뿐만 아니라 안식일마다 예배를 섬기고 모든 행정적인 업무를 맡아 감당했습니다. 가벼운 재판을 하는 업무도 수행했습니다. 회당장은 평신도들이 감당하였는데 백성들로부터 존경받는 명예로운 직분이었습니다. 야이로는 회당장으로서 근엄하고 위엄있게 보이기 위해서 턱수염도 기르고 품위있는 긴 예복을 입었을 것입니다. 야이로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나날이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예기치 않게 야이로의 가정에 어두움의 그림자가 뒤덮혔습니다. 그것은 금이야 옥이야 키우던 사랑스러운 딸이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시름시름 죽어 가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의 딸은 12살 난 외동딸이었습니다 (눅8:42). 그의 딸은 막 피어나는 꽃봉오리와 같이 아름답게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보기에도 귀여운데 아버지 야이로에게는 이 딸이 얼마나 귀여웠겠습니까? 고된 하루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면 딸이 ‘아빠’하고 부를 때 모든 피로가 싹 가시고 무한한 삶의 행복을 느꼈을 것입니다. 딸은 그에게 기쁨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딸이 열이 40도를 오르내리며 죽어 가는 것이었습니다. 용하다는 의사를 다 불러 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죽음의 사자가 시시각각 어린 딸에게 다가올 때 그는 절망의 늪으로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으로 딸을 위해 큰 일을 했습니다.
첫째로, 그는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야이로는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는 소문을 듣자마자 회당장 웃옷을 입을 겨를도 없이 예수님께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려 많이 간구했습니다.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예수님, 제발 와 주세요, 와 주세요” 그가 이렇게 예수님께 나아와 간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회당장으로서의 위신과 체면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위신과 체면을 매우 중요시 여깁니다. 어떤 아버지는 자식에게 “자존심이 꺾이는 날 자살하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자존심 때문에 죽으면 죽었지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야이로는 모든 자존심을 다 버리고 예수님께 나아와 겸손하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는 겸손의 사람이었습니다.
또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인간적인 생각 때문에 예수님에 대해서 비판적이고 적대적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이단시하고 죽이고자 음모를 꾸미고 있었습니다 (막3:6). 이런 시대 분위기 가운데서 공개적으로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은 그들에게 미움을 사서 그 사회에서 매장될지도 모르는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야이로는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다만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야이로는 예수님을 절대적으로 믿고 신뢰하고 존경하고 사랑했습니다. 그에게는 예수님이 오셔서 딸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기만 하면 나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둘째로, 그에게는 딸에 대한 상한 목자의 심정이 충만했습니다. 아버지가 딸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 시대의 가장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가 아버지 문제입니다. 인생 반생기를 들어 보면 아버지 문제로 큰 고통을 당하여 아버지를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것에 놀라게 됩니다. 또 미국이나 소련이나 멕시코에서는 무책임하게 이혼하여 자식들에게 깊은 상처를 주는 아버지들이 많습니다. 한 아브라함의 편지에 의하면 소련에는 파괴된 가정이 70%나 되어 대부분의 학생들이 아버지 없이 어머니하고만 살고 있다고 합니다. 이는 아버지들이 자기만을 생각하는 이기심 때문입니다. 그러나 야이로는 자기보다 딸만을 생각했습니다. 그는 어찌하든지 딸을 구원하고자 하는 목자의 심정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는 좋은 아버지였습니다. 우리는 양들에게 좋은 아버지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딸에 대한 애타는 목자의 심정은 그로 하여금 체면과 자의식과 모든 어려움을 뛰어넘어 주님께 나아가 간절히 기도하게 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양에 대한 아버지의 심정이 있을 때 죄로 인해 시름시름 죽어 가는 한 영혼을 위해 주님께 나아가 애타게 간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믿음의 간구를 들으시고 피곤한 가운데서도 그와 함께 가셨습니다.
Ⅱ.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댄 여인 (25-34)
예수님이 야이로의 집으로 가시자 큰 무리가 예수님을 에워싸 밀며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무리 중에는 열두 해 동안 혈루증으로 고통하는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혈루증은 일종의 부인병으로서 부정한 병입니다 (레15:25-27). 1,2년도 아니고 12년 동안 병을 앓았다니 참으로 긴 세월입니다. 10년이면 세계가 변하고 모든 것이 변합니다. 그러나 이 여인의 병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여인의 상태는 점점 나빠져서 절망적인 상태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26절을 보십시오.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도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여인은 당시 유명하다고 하는 의사는 다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의술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의사들은 최선을 다했으나 불치의 병을 고칠 수 없었습니다. 여인은 치료하는 과정에서 많은 괴로움만 받고 돈만 허비하였습니다. 그리고 병은 더 중하여졌습니다. 이로 인해 여인이 겪은 육체적, 정신적 고통이 얼마나 컸을까요? 여인에게는 아름다와지고자 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또한 가정을 갖고 가족 계획하여 아들 딸 둘만 낳아 키우며 남편과 함께 오손도손 살고자 하는 꿈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병 때문에 아름다움을 잃고 가정에 대한 꿈을 잃었습니다. 또한 재산도 잃고 인생에 대한 희망도 잃고 모든 것을 잃어 버렸습니다. 여인은 사람들에 대한 깊은 불신과 부정한 자라는 죄의식과 고독을 씹으면서 저주스러운 인생을 살아야 했습니다.
이런 중에 여인은 예수님께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더러운 문둥병자도 깨끗케 해 주시고 중풍병자도 일어나 걷게 하시고 한 손 마른 자도 목숨의 위협을 무릅쓰시고 고쳐 주신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일어나 걸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시름시름 죽어 가던 여인에게 삶의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사람들에 대한 실망이 컸던 만큼 예수님에 대한 희망도 컸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여인의 마음에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이는 정말 큰 믿음이었습니다. 이 믿음은 예수님의 능력과 사랑을 조금도 의심치 않는 절대적인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자의식으로 인해 야이로와 같이 사람들 앞에 나아와 간구할 수 없었습니다. 여인은 떨리는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무리 가운데로 섞여 들어가 뒤로 가서 아무도 몰래 예수님의 옷에 살짝 손을 대었습니다 (Just one touch). 그러자 그토록 오랫동안 여인을 괴롭혀 왔던 혈루 근원이 곧 말라 병이 낫게 된 것을 몸에 깨닫게 되었습니다. 와! 여인은 새 생명을 얻은 기쁨과 감격으로 ‘Praise the Lord’하고 외치며 예수님 앞에 나아가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몰래 행했기 때문에 조용히 물러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인이 이렇게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은 마음으로 예수님을 믿고 믿음으로 옷자락을 만졌기 때문입니다. 무리들 가운데는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는 자가 많이 있었습니다. 손을 대는 정도가 아니라 몸을 비벼대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행동은 크지만 마음에 믿음이 없기 때문에 아무런 역사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반면 여인은 행동은 작고 보잘 것 없지만 마음의 믿음의 역사는 크기 때문에 큰 능력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겉으로는 큰 소리를 치며 믿음이 좋은 것처럼 행동하지만 마음으로는 늘 의심하고 불신하고 인간적인 생각을 하기 때문에 아무런 능력의 역사를 체험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말씀 한마디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를 통해서 그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마음으로 믿고 의심치 아니할 때 어떤 고질병도 치료받을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11:22,23절은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여인이 예수님께 나아가고자 할 때 여러 가지 장애물이 많이 있었습니다. 12년 동안 쌓인 운명주의, 아무리 해도 안 될 것은 안된다는 패배주의, 절망적인 생각, 부정한 몸으로 무리 가운데 섞여 들어 갔다가 발각이 되면 돌에 맞아죽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 예수님께 나아간다고 해서 고질병이 고침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심 등 여러 가지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란 이러한 모든 장애물을 극복하고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여인에게는 태산을 바다에 던지는 겨자씨 만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여인은 고침을 받은 후 아무도 모르게 살짝 빠져 나오려고 했습니다. 여인의 작전은 치고 빠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앞에서는 도망갈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과거와 믿음으로 손댄 것 등 모든 것을 다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서 능력이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돌이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며 주위를 둘러 보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혹시 과로와 더위로 인하여 헛소리를 하시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인을 기어이 찾고야 말겠다는 듯이 주위를 둘러 보셨습니다. 여인은 더 이상 자신을 숨길 수 없음을 알고 두려워 떨며 예수님 앞에 나아와 모든 사실을 고했습니다. 여인은 자의식과 수치심을 무릅쓰고 자신의 추한 과거와 또한 자신에게 이루신 놀라운 믿음의 역사를 증거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불안에 떠는 여인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34절을 보십시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 할지어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여인으로 하여금 모든 것을 고백토록 한 이유가 무엇인가를 알게 됩니다.
첫째로, 마음에 평강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여인은 믿음으로 행했기만 몰래 행했기 때문에 마음이 불안했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마음에 있는 모든 불안을 제거해 주시고 참 평강을 주셨습니다.
둘째로, 믿음을 온전케 하고자 하심이었습니다. 여인은 육신의 병으로부터 구원은 얻었지만 영혼의 구원은 받지 못했습니다. 로마서 10:9절은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으로 하여금 마음의 믿음을 입으로 고백하도록 함으로써 그 믿음을 온전케 하시고 영혼의 구원을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성을 맺고자 하심이었습니다. 만일 여인이 몰래 병 고침 받는 것으로 끝난다면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성이 맺어지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 인격적인 바른 관계성을 맺은 것입니다.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성을 맺지 않을 때 여인의 믿음은 샤머니즘적으로 되거나 신비적으로 되기 쉽습니다. 오늘날은 병 고침을 받거나 성격을 고치거나 가정이 평안하거나 사업이 잘되기를 바라는 것 등 문제 해결만을 위한 신앙을 가진 자들이 많습니다. 이런 자들은 샤머니즘적 신앙을 가진 자들입니다. 예수님과 인격적인 바른 관계성을 맺을 때 믿음이 성장하게 되고 문제도 자연히 해결됩니다. 믿음이란 예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을 ‘딸아’라고 부르심으로 여인에게 따뜻한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믿음을 크게 기뻐하시고 그 믿음을 축복하셨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Ⅲ. 야이로에게 부활의 믿음을 심으신 예수님 (34-43)
예수님은 여인으로 하여금 자기 속에 이루신 믿음의 역사를 고백토록 하심으로 여인의 믿음을 온전케 하실 뿐만 아니라 무리들과 야이로에게 믿음을 심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아직 여인과 말씀하고 계실 때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절망적인 소식을 알려 주었습니다.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35). 그들의 말은 딸이 죽었으니 예수님을 더 괴롭게 하지 말고 빨리 가서 장례식을 치를 준비나 해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소식은 딸이 죽지 않을까 불안과 초조로 마음 졸이던 그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였습니다. 딸이 살았을 때는 나을 희망이 있었지만 이제 죽었으니 모든 것이 끝났다는 절망감과 허탈감이 몰려 왔을 것입니다. 몰래 새치기한 여인에게 대한 원망과 여인의 긴 life testimony를 들으시느라고 지체하신 예수님에 대한 원망이 생겨났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야이로의 마음 가운데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엄습했을 것입니다. 36절에서 예수님이 야이로에게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하신 것을 보면 야이로의 마음에 두려움이 생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두려움은 죽음으로 인해 온 것입니다. 또한 이 두려움은 사단이 심어 준 것입니다. 사단은 사람들의 말을 통하여 야이로의 마음에 두려움을 심었습니다. 회당장의 집에서 온 사람들의 말은 야이로를 위하고 예수님을 위하는 말 같지만 실상은 야이로의 마음에 두려움을 심었습니다. 이는 간교한 사단의 역사였습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도 사단은 간교하게 사랑하는 부모님이나 존경하는 교수님이나 선배나 친구를 통해 우리의 마음에 두려움을 심습니다. “너 믿음으로 사는 것도 좋지만 네가 원하는 것도 하지 못하고 세상에서 낙오하면 어떻게 할래. 빨리 속 좀 차려” 라고 속삭입니다. 또 “너 UBF에 계속 남아 있으면 언젠가는 결국 선교사로 갈지 모르니까 말씀 공부는 하지만 너무 깊이 빠지지 않는 것이 좋아:”라고 속삭입니다. 이렇게 속삭이는 소리를 들으면 믿음으로 사는 것이 어리석은 것 같고 또 소련에 선교사로 가서 순교할 것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된다. 마음에 두려움이 생기게 되면 갑자기 심령이 어두워지고 마음이 딱딱해 집니다. 그리고 불신이 생기고 반발심과 대적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또한 목자님에게 원망과 불평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이렇게 될 때 점점 믿음을 잃고 결국에는 믿음의 길을 떠나게 됩니다. 두려움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파괴시키고 우리를 멸망의 길로 인도합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면 무기력해지고 소심해지고 자기 중심적이 되어 쓸모 없게 되어 버립니다. 두려움은 우리의 가장 큰 원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입니다 (딤후1:7). 하나님은 두려워하는 자를 가장 싫어하십니다. 계21:8절에 보면 두려워하는 자는 지옥행 제 1호입니다.
민수기 13장에 보면 이스라엘 12지파 두령들이 가나안 땅을 정탐한 후 보고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10두령들은 장대한 아낙 자손을 보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이렇게 보고했습니다. “우리가 가나안 땅에 가보니 그곳은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더이다. 그러나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그곳에 사는 백성들은 신장이 장대하고 아낙 자손은 대장부로서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더이다.” (민13:27-29,32,33) 불신에 찬 보고를 들은 백성들은 절망에 빠져 밤새도록 통곡을 하며 그들의 목자인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습니다. 하나님은 두려워하는 그들에게 어느 때까지 이들이 나를 멸시하겠느냐고 무섭게 진노하셨습니다.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진노하사 모두 광야에서 엎드러지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용사 여호수아와 갈렙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두려워하며 동요하는 백성들을 안돈 시키며 말했습니다. “우리가 곧 올라가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민13:30, 14:9). 하나님은 믿음의 용사 여호수아와 갈렙을 심히 기뻐하시고 귀히 쓰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 받으려면 반드시 마음 속에 사단이 심어 주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야이로는 두려움으로 인해 절망하고 믿음을 상실할 신앙적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그를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3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예수님은 야이로의 마음에 두려움이 심기우기 전에 재빨리 믿음을 심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단의 역사를 간파하시고 사단과 싸우셨습니다. 예수님은 두려움과 불신과 회의를 심는 사람들의 말을 무시하고 믿음과 확신과 용기를 심으셨습니다.
그러면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는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이는 그가 처음 가졌던 믿음을 잃지 말고 끝가지 지키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불신과 두려움을 심는 사람들의 말에 요동치 말고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굳게 의지하고 전폭적으로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도 파하시고 사람을 살리실 수 있는 부활이요 생명의 주가 되심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야이로에게 믿음을 심으신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데리시고 집으로 가셨습니다. 야이로의 집에는 훤화하는 소리와 울며 통곡하는 소리로 가득 찼습니다. 그들은 죽음 앞에 절망하며 슬퍼했습니다. 이는 부활의 소망이 없는 현장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죽었을 때 예수님이 없는 곳과 예수님이 계신 곳은 완전히 다릅니다. 예수님이 없는 곳은 절망과 허무와 슬픔과 체념이 지배하지만, 예수님이 계신 곳은 잠시 이별하는 슬픔은 있지만, 하늘 나라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과 더 좋은 곳으로 가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기 때문에 감사와 찬송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39)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자는 것으로 보셨습니다. 예수님께는 죽음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에는 항상 빛과 생명으로 충만합니다.
예수님께서 아이가 잔다고 말씀하시자 사람들은 비웃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불신하는 자들을 다 내어 보내시고 세 제자들과 아이의 부모만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리고 죽은 아이의 손을 잡고 “달리다쿰”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는 아이를 깨우듯이 “애야 그만 자고 일어나라”고 하셨습니다. 죽은 아이는 생명의 주의 음성을 듣고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아 잘 잤다. 아빠 나 배고파. 먹을 것 좀 줘”하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고 이 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도록 많이 경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소녀를 살리심으로 부활이요 생명의 주가 되심을 선포하셨습니다 (요한11:25,26).
우리는 야이로에게서 배울 것이 있습니다. 야이로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곧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을 굳게 붙들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두려움에 빠져 요동하지 않았습니다. 슬픈 감정을 이기지 못해 울며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의지하고 전폭적으로 신뢰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깊이 귀를 기울이고 말씀을 굳게 붙들었습니다. 그는 순간 순간 사단이 심어 주는 불신과 두려움을 믿음으로 물리쳤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믿음의 중심을 지켰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를 기뻐하시고 그 믿음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단순히 믿고 믿음으로 옷에 손을 댄 여인을 기뻐하시고 축복하셨습니다. 또한 단순히 믿고 믿음으로 중심을 지킨 야이로를 기뻐하시고 죽은 딸을 살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믿는 믿음(Just believing faith)을 기뻐하십니다. 사람들은 단순한 것은 어리석게 보고 복잡하게 살고자 노력합니다. 그러나 복잡하게 살다가 두려움에 빠져 정신이 이상하게 된 자들이 많습니다. 단순한 믿음은 결코 어리석은 것이 아닙니다. 단순한 믿음은 두려움을 이기고 불신을 이기고 복잡한 이 시대를 이길 수 있습니다. 단순한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고 새 역사를 창조할 수 있습니다. 한 분 한 분이 여인과 야이로와 같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단순한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