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제 16 강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말씀 : 마가복음 6:30-44
요절 : 마가복음 6:37a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오늘 본문은 4복음서가 다같이 전하는 기적으로서 그리스도의 창조의 능력을 나타내는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은 그 영광을 드러내셨고 제자들을 양무리들의 목자로 훈련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믿음으로 한계 상황을 뛰어넘는 믿음의 사람이요, 양무리들을 책임지고 먹일 수 있는 영적 지도자가 되도록 훈련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방황하는 이 시대의 양무리들을 먹일 수 있는 영적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무리를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 (30-34)
오늘 본문은 제자들이 전도 여행을 성공리에 끝내고 예수님께 돌아와 선교보고 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의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30). 제자들은 그 동안 예수님과 함께 거하며 배우는 학생이요 사랑 받는 양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받으며 만년 양으로서 지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택하신 목적대로 자립적인 말씀의 종이요 사단의 세력과 싸울 수 있는 능력 있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키우시기 위해 전도 여행을 내보내셨습니다 (6:7-13). 제자들은 자립적으로 전도 여행을 하는 것이 설레임과 함께 몹시 두렵고 떨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단순히 순종하여 믿음으로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고 승리의 기쁨이 충만하여 예수님께 돌아와 선교보고 대회를 가졌습니다. 그들은 신이 나서 자기들의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보고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침을 튀기면서 큰소리로 보고했습니다. “주여, 내가 주의 이름으로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고 명한즉 귀신이 벌벌 떨면서 항복하더이다. 정말 신기하던 데요.” 평소에 내가 과연 능력 있는 말씀의 종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의심만 하던 도마도 이때만큼은 확신에 차서 보고했습니다. “주님! 제가 메시지를 전하니까 시커먼 죄인이 눈물을 흘리며 회개했어요.” 그들은 무엇보다도 자신들에게서 위대한 사도가 될 가능성을 발견하고 힘을 얻었습니다. 이렇게 성령의 능력을 체험한 것을 보고하는 것은 큰 은혜가 됩니다.
보고 대회가 끝난 후 예수님은 제자들이 영적으로 긴장하여 전도 여행을 하였으므로 휴식이 필요함을 아시고 제자들에게 방향을 주셨습니다.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간 쉬어라” 이는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은 쉬는 것과는 거리가 먼 분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육신을 가진 인간의 연약함을 잘 이해하시고 쉬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고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가 되십니다 (시23:2). 우리가 열심히 주님의 일을 하고 난 후에 잠깐 동안 쉴 때 진정한 쉼을 누릴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오랜만에 휴가를 얻어 사랑하는 예수님을 모시고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으로 신나게 노를 저어 갔습니다. 그들은 이때만큼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자부심과 긍지를 느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건너편 잔디밭에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족구도 하면서 쉴 희망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무리들로 인해 산산이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무리들은 예수님 일행이 배를 타고 어디론가 가는 것을 보자 약속이나 한 듯이 배가 가는 방향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달리다가 신발이 벗어지자 신발을 벗어 들고 맨발로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몇 사람이 달리기 시작하더니 점점 불어나서 나중에는 모든 고을로부터 구름 떼같이 모여들어 큰 무리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무리들은 얼마나 빨리 달렸는지 예수님 일행보다 먼저 도착했습니다. 그들이 왜 이렇게 극성스럽게 예수님을 좇아가는 것입니까? 이는 예수님에게서 생명의 말씀과 참된 목자의 사랑을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먼저 도착한 후 반갑게 예수님 일행을 맞이했습니다. “목자님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지요” 벼룩도 낯짝이 있다는데 이들은 낯짝도 없는 자들인 것 같습니다. 아무리 양이라고 하지만 목자의 형편은 전혀 생각지 않는 질이 좋지 않은 양인 것 같습니다. 이를 본 제자들은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과 함께 지겨운 생각이 들어 뱃머리를 돌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에게는 무리들이 찰거머리같이 달라붙어 자기들을 괴롭히는 괴물처럼 보였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은 전혀 달랐습니다. 3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예수님은 이들을 조금도 부담스럽게 여기지 아니하시고 아버지가 아들을 영접하듯 따뜻이 영접하셨습니다. 누가복음 9:1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그들을 환영하셨다(He welcomed them)고 하였습니다. 모처럼의 휴식을 방해하는 이들을 덤덤히 맞이할 수는 있으나 환영한다는 것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나아오는 자는 누구든지 내쫓지 아니하시고 아버지가 탕자를 영접하듯이 뜨겁게 영접해 주십니다 (요6;37). 예수님께서 무리들을 따뜻이 영접하실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무리들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동정과 자비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어떤 점에서 불쌍히 여기셨습니까?
첫째로, 그들이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정치적인 자유가 없다거나 경제적으로 가난하기 때문에 불쌍히 여긴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목자가 없기 때문에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양은 목자가 때를 따라 먹을 것을 주고 섬세한 관심을 가지고 돌봐 주어야 합니다. 연약한 자는 강하게 하고, 병든 자는 고쳐 주고, 상한 자는 싸매 주고, 쫓긴 자는 돌아오게 하고, 잃은 자는 찾아야 합니다 (겔34:3,4). 또한 목자는 양들을 이리와 같은 사나운 짐승으로부터 보호하고 올바른 길로 인도하고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 주어야 합니다. 양은 목자가 없을 때 방황하게 되고 사나운 짐승들에게 찢겨 죽게 됩니다.
사람은 여러 면에서 양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생들을 양에다 비유하고 있습니다. 양에게 목자가 필요하듯 사람에게도 목자가 필요합니다. 사람들에게는 물질 문제, 질병 문제, 민주화 문제 등 여러 가지 많은 문제가 있는 것 같지만 정말 문제는 목자가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사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행했던 것은 그들을 돌봐 주고 인도하는 목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나타나 그들의 목자가 되었을 때 그들은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무리들을 돌봐 줄 목자가 없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정치 지도자인 헤롯은 음란하고 불의했으며, 종교 지도자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위선적이고 권위만 부렸습니다.
오늘날 대학생들의 문제도 이들의 고뇌와 갈등을 깊이 이해하고 이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할 목자가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학생들을 바라보는 눈길은 좋지 않습니다. 비싼 등록금 내고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데모를 하여서 문제만 일으키는 골치 아픈 존재로 봅니다. 대학생들은 어딜 가나 없으면 아쉽고 있으면 귀찮은 존재로 생각합니다. 노동자들을 불쌍히 보기는 하지만 대학생들을 불쌍히 여기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대학생들처럼 불쌍한 자들은 없습니다. 우리 나라는 고등학교 때까지는 입시 공부하느라 인생에 대해서 생각해 볼 겨를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대학에 들어가면 그 많은 자유를 감당치 못해 죄를 짓고 방황하게 됩니다. 또 대학교 분위기가 인생을 논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분위기가 아니라 화염병을 들고 싸우는 전투 분위기요 쾌락을 좇는 음란한 분위기입니다. 오히려 인생을 논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자들은 병신 취급을 당합니다. 이런 혼란한 틈을 타서 갖가지 이단 사상이 난무하여 어린양들을 노략질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들을 돌봐 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교수가 이들을 돌봐 줍니까? 부모가 이들을 돌봐 줍니까? 오늘날 대학생들은 목자가 없기 때문에 불쌍합니다. 대학생들은 겉으로 볼 때 지성과 낭만이 있어서 부족함이 없이 보입니다. 특히 미국이나 독일 같은 선진국 대학생들은 더욱 부족함이 없이 보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내면을 파고 들어가 보면 얼마나 죄 문제로 고통하고 있는가를 알게 됩니다. 세계 선교보고 대회 때 각국에서 온 이방 양들의 인생 반생기를 들어보면 그들이 얼마나 죄 가운데 시달리며 자기들을 구원해 줄 목자를 애타게 찾고 있는가를 보게 됩니다. 세계는 영적으로 황폐하여 목자를 애타게 찾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같이 고생하며 유리 방황하는 무리들을 보실 때 너무 불쌍하여 심령에 눈물이 고였습니다. 그리고 친히 그들의 목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둘째로, 그들이 영적으로 무지하기 때문에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대개 불쌍히 여기게 되면 동정을 하고 담요를 덮어 주다가 상대방을 병들게 만들고 못쓰게 만들어 버립니다. 사람을 돕는데 있어서 인간적인 동정은 금물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여러 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를 볼 때 예수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신 것은 그들이 영적으로 무지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에 태어나 살고 있으면서 인생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인지, 왜 살고 있으며,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저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에 먹고살기 위해, 또는 좀 더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세상일에 얽매여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은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하고 높은 지위와 권세를 가지고 화려한 인생 경력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영적으로 무지하기 때문에 불쌍한 자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영적인 눈을 뜨고 거듭나서 그 심령에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오늘날은 과학의 발달로 그 어느 시대보다도 물질과 지식의 풍요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반면 인간의 도덕성과 영성은 그 어느 시대보다도 타락하여 황폐해져 가고 있습니다. 신학적인 지식은 넘쳐흐르지만 정말 인간의 잠든 영혼을 깨우쳐 주는 하나님의 말씀은 가뭄 상태에 있습니다. 이 시대는 일찍이 아모스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영적 기갈로 비틀거리고 있습니다 (암8:11-13).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을 때만이 죽어가던 영혼이 소생되고 진정한 기쁨과 만족이 있게 됩니다.
Ⅱ.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 (35-44)
(ⅰ) 지도자로서의 자세를 가르치신 예수님 (35-37a)
35절을 보십시오. 때가 저물어 갔습니다. 해가 서산으로 기울어 황혼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강의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하시더니 새로운 주제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끝으로, 마지막으로, 요약해 보면 하면서 계속해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많은 물소리와 같은 예수님의 음성은 조금도 피곤하거나 지친 기색도 없이 낭랑하게 빈들에 울려 퍼졌습니다. 제자들은 그 동안 쉬는 것을 포기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참았습니다. 너무 배가 고파서 뱃속이 쓰리고 아프기까지 했으나 그래도 명색이 양들의 목자라 꾹 참았습니다. 그러나 날이 점점 어두워지자 그들은 긴급 소회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한 목소리로 통일하여 예수님께 제안을 했습니다. “이곳은 빈들이요 때도 저물어 가니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35,36). 그들은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하였습니다. 상황은 빈들이요 때가 저물어 가고 무리는 많고 자신들이 가진 돈은 없고 육신은 지치고 피곤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그들을 빨리 마을로 보내어 스스로 숙식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제안은 합리적이어서 누가 보나 타당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상황이 이러니 이렇게 제안을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상황에 매여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는 상황에 얽매여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어떤 불가능한 상황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새 역사를 창조하고자 하는 적극적이고도 진취적인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상황을 탓하며 무리들을 돌려보내고자 하는 제자들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37a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you give them something to eat) 이는 제자들에게는 청천 벽력과 같은 명령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현재 제자들이 아무 것도 가진 것도 없고 육신적으로도 피곤하고 지친 것을 잘 아셨습니다. 상황은 그들이 도저히 먹일 수 없다는 것을 잘 아셨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이런 명령을 하신 것은 무슨 뜻이 있습니까?
첫째로, 지도자로서의 책임감을 갖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제자들은 현재 자신들도 먹을 것이 필요하고 쉼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형편이 어떠하든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영적 지도자로서 양무리를 먹여야 할 책임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도자는 무엇보다 책임감이 있어야 합니다. 지도자는 “나는 최선을 다했고 상황이 이러니 어쩔 수 없다”고 말함으로 책임을 회피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한 가정의 가장이 나는 최선을 다했고 먹고살기 힘드니 각자 알아서 먹고살라고 말한다면 무책임한 가장으로 지탄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가장은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처자식을 먹여 살려야 할 책임이 있듯이, 영적 지도자는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배고픈 양무리를 먹여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책임감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내가 이 양을 먹이지 않으면 안된다. 내가 이 캠퍼스를 먹이지 않으면 안된다. 내가 세계 187개국을 먹이지 않으면 안된다는 책임감을 가질 때 힘든 상황을 극복하고 먹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안 먹여도 다른 사람이 돌봐 주겠지, 아니면 양이 스스로 알아서 하겠지, 세계 선교는 내가 안해도 다른 사람이 하겠지, 세계 선교보고 대회 준비나 여름 수양회 준비도 내가 안해도 목자들이 많으니까 다른 사람이 하겠지 하는 식의 무책임한 생각을 할 때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됩니다. 무책임한 자는 어딜 가나 환영받지 못하며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상황을 핑계하지 않고 양무리에 대한 책임감을 가진 지도자가 될 수 있도록 훈련하셨습니다.
둘째로, 목자의 심정을 갖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내가 양무리를 먹여야 한다는 책임감만으로는 양무리를 먹이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양무리를 먹이는 데에는 목자의 심정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때로 내가 왜 양무리를 먹여야 되는가 하는 질문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야 당연히 목자니까 먹여야지”하는 평범한 대답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질문은 어머니가 왜 아이에게 젖을 먹여야 하는가 하는 질문과 같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어머니는 자신이 해산의 수고를 하여 낳은 자식이기 때문에 젖을 먹이고자 하는 애정이 갑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 상관도 없는 자를 피싱하여 문제의식이 없는 자는 문제의식을 심고 또 도망가는 자는 잡아다가 왜 말씀을 먹여야 되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얼마 전에 Helen Keller를 도운 Anne Sulivan 여사에 관한 영화를 보았습니다. Helen Keller는 생후 6개월 때에 심한 열병을 앓아 눈이 멀고 귀가 먹고 말을 못하는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가족들은 그에 대한 동정심으로 인해 그가 원하는 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었습니다. 이로 인해 아이는 못쓰게 되고 길들이지 않은 야생마와 같이 되었습니다. 애니 설리반은 가정 교사로 들어와서 Helen Keller를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못된 버릇을 바로 잡고 또 모든 사물에는 이름이 있고 그 이름에는 뜻이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자 했습니다. 여기에는 조금의 동정도 하지 않고 옳고 그름을 가르쳐야 하는 필사적인 노력이 요구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장애물은 부모의 동정심이었습니다. 한번은 Helen의 아버지가 설리반에게 당신이 이 아이와 무슨 상관이 있길래 그렇게 필사적으로 돕고자 하는가 하고 말하였습니다. 설리반은 이 말에 내가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길래 돕고자 하는가 자문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설리반은 가정 교사로서 돈만 받고 부모가 요구하는 것만 해 주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설리반의 마음에는 Helen에 대한 빚진 자의 심정이 있었습니다. 자신도 불우한 형편에서 자라나 도움을 받고 성장했기 때문에 장애자에 대한 빚진 자의 심정이 있었습니다. 이 빚진 자의 심정은 바로 목자의 심정이었습니다. 이 목자의 심정이 마침내는 Helen의 마음의 눈을 뜨게 하는 기적을 낳았습니다.
우리가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 자를 말씀과 기도와 사랑으로 도와주고자 하는 이유는 바로 빚진 자의 심정 때문입니다. 내가 과거 죄 가운데서 방황하다가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었는데 주님께서 목자님들을 통하여 저를 인도하여 주시고,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심으로 나의 모든 허물과 죄악을 담당하여 주시고, 거듭나 새 인생을 살게 해 주시고, 또한 진리의 말씀과 희생적인 사랑으로 양육하여 주신 은혜를 생각할 때 빚진 자의 심정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진 이 은혜의 빚, 사랑의 빚을 예수님이 위하여 피흘려 죽으신 양들에게 갚아야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빚진 자의 심정이 충만하였기 때문에 많은 양무리들을 먹일 수 있었습니다 (롬1:14).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이 말씀 속에는 예수님께서 친히 양무리를 먹이고자 하시는 목자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을 보시자마자 이미 이들을 먹이고자 작정하셨습니다 (요한6:6).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주라”고 명령하신 것은 그들이 이 예수님의 마음을 알고 믿음으로 동참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영적으로 굶주린 세상 만백성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친히 먹이고자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믿음으로 동참하기를 원하십니다.
(ⅱ) 오병이어를 축사하신 예수님 (37b-44)
예수님께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이백 데나리온은 여덟 달 어치의 일군 품삯으로서 오늘날로 계산하면 약 500만원에 해당됩니다. 이는 가난한 제자들에게는 거금의 돈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이런 거액의 돈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대답은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없는 200데나리온을 생각하다가 부정적이 되고 운명적이 되고 반발적이 되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200데나리온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돈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학사님들은 시간이 있어야 양을 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능력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세계 선교를 하려면 어학의 재능이 있어야 되고 외국에 나갈 수 있는 길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런 것들이 없기 때문에 못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고 심정이 없기 때문에 못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고 심정이 있을 때 우리는 돈도 벌 수 있고 양을 칠 수 있는 시간을 만들 수도 있고 어학도 정복할 수 있고 없는 길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창조주의 무한한 능력과 지혜를 가지신 보화 창고가 되십니다. 그런데 이 보화 창고에서 보화를 꺼내려면 믿음과 기도의 열쇠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없는 200 데나리온만 생각하고 절망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무슨 방향을 주셨습니까? 38절을 보십시오.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라” 이 말씀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고자 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포기치 않고 믿음으로 도전하도록 하셨습니다. 할 수 없다고 포기하는 것과 불가능한 상황 가운데서도 포기치 않고 도전하는 것은 엄청난 차이입니다. 양을 치기 힘들다고 포기해 버릴 때 그 사람은 평생 동안 양을 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양을 치기 힘들지만 믿음으로 계속해서 도전할 때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축복하사 나중에는 감당하기 힘들만큼 많은 양을 주십니다. 세계 선교도 할 수 없다고 포기해 버리면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어떤 가능성을 붙들고 계속해서 도전하면 할 수 있게 됩니다. 떡 몇 개는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하실 수 있는 어떤 가능성입니다. 우리는 이 어떤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찾아야 합니다.
둘째로, 믿음의 행동을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없는 200데나리온을 생각만 하고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머리로 생각만 하는 것과 구체적으로 손발을 놀려 행동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양을 칠 때도 과거 힘든 양의 형편을 생각만 하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가서 보면 상황이 전혀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믿음이란 이론이 아닙니다. 이론적인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산 믿음은 실제적인 행동을 수반합니다 (약2:14).
셋째로, 믿음으로 예수님께 들고 나오도록 하셨습니다. 떡 몇 개가 있는가 찾아보라는 것은 찾아서 혼자 먹으라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예수님께 들고 나오라는 것입니다. 보잘 것 없는 것이라고 해서 쑥스러워서 예수님께 들고 나오지 아니할 때 아무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보잘 것 없지만 믿음으로 들고나올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가 떡 몇 개를 주님께 드리는 것은 우리의 믿음과 기도와 진심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들이 오병이어를 찾아 믿음으로 주님께 드렸을 때 주님께서는 이를 기뻐 받으시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를 기초로 오천 명의 무리를 먹이셨습니다. 무리들이 다 배불리 먹고 열 두 바구니가 남았습니다. 이것은 이성을 초월한 놀라운 능력의 역사였습니다.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은 무에서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예수님은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분이십니다 (엡3:20). 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