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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17-마가복음 7:1-23(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

by Mark Yang   08/15/2019   Mark

Message


마가복음 제 17 강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


말씀 : 마가복음 7:1-23
요절 : 마가복음 7:23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사람은 누구나 깨끗하고 순결한 인생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이와는 정반대로 우리의 마음은 부정하고 더럽고 추한 것으로 가득차 있어 냄새가 날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시궁창 같이 끊임없이 죄의 소욕이 솟구쳐서 우리를 부정하게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마음을 정결케 하고 순결한 인생을 살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은 진정으로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무엇이며, 우리의 마음을 정결케 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줍니다.

Ⅰ. 외식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1-13)

본문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제자들을 비판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책잡아 고소하기 위해 예루살렘의 산헤드린 당국으로부터 파송된 조사반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눈에 불을 켜고 예수님의 일거수 일투족을 살펴보았으나 예수님에게서 아무 흠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제자 중 몇 사람이 손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왜 손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었을까요? 그들은 훈련을 받고 또 복음 역사를 힘써 섬기느라 항상 배가 고팠기 때문에 손 씻을 겨를이 없었습니다. 또 손을 씻게 되면, 손 씻을 동안 다른 사람이 맛있는 것을 다 먹어 버리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은 것은 예수님을 닮아서 형식과 규례에 얽매이지 않고 참 자유함을 누렸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 안에서 진정한 자유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식사 전에 손을 씻는 문제는 단순히 위생상의 문제가 아니라 종교상의 문제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장로들의 유전이 있었습니다. 율법에는 문자로 기록된 성문법과 모세 이후 장로들을 통해 구전으로 전해 내려온 구전법이 있었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자들은 나이도 많고 학식과 신앙심이 깊은 랍비들 곧 장로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시대 시대마다 율법을 기초로 실생활에서 지켜야 할 생활 규범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다가 바벨론 포로 이후부터 성문화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유명한 탈무드입니다.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율법 이상으로 중요시하여 성문법이 물이라면 구전법은 포도주와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장로들의 유전은 알게 모르게 그들의 의식 세계를 지배하고 모든 생활을 구속하였습니다. 그들은 아무리 배가 고파도 옷을 팔뚝까지 걷어 올려 손목까지 부지런히 씻지 않으면 먹지 아니했습니다. 또한 시장에서 돌아와서는 샤워를 하지 않으면 음식을 먹지 아니했습니다. 손뿐만 아니라 잔과 주발과 놋그릇까지도 트리오나 유한락스로 윤기가 나기까지 씻었습니다. 이것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생활화된 종교의식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를 잘 지키면 믿음이 좋은 줄로 생각하고 그렇지 못한 자들을 부정한 자로 판단하고 정죄 하였습니다. 처음에 그들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백성이 되고자 하는 선한 의도에서 시작했으나 이것이 점점 형식화되어 사람을 구속하는 올가미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는 당시 유대인의 종교가 얼마나 저급한 상태로 타락했는가를 보여 줍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믿음으로 살았기 때문에 이런 형식화된 종교의식에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손도 씻지 않고 음식을 손으로 마구 집어먹었습니다.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그들의 경건치 못한 행동을 날카롭게 비난했습니다.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준행치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그들은 자신들은 의롭고 경건한 자요, 제자들은 부정한 자로 생각하고 제자들을 판단하고 정죄했습니다. 그들은 제자들을 비난함으로써 예수님을 무너뜨리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말씀을 기초로 그들의 외식을 심하게 책망하셨습니다.

6,7절을 보십시오.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예수님은 그들의 문제가 외식하는 것임을 지적하였습니다. 외식이란 본래 연극 용어로서 배우가 본래의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가면을 쓰거나 다른 모습으로 변신하여 작중 인물의 역할을 하는 것을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후에는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의 의미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겉으로는 장로들의 유전을 좇아 부지런히 손을 씻고 목욕을 하기 때문에 믿음이 좋은 것처럼 보였으나 내면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여러 번 그들의 외식을 심하게 책망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마23:2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마23:27,28) 그들이 이렇게 된 근본 원인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그들은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습니다(6). 그들은 입술로는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존경하였으나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었습니다. 그들은 입술로 신앙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입만 천국에 갈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회당에 나와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는 믿음이 좋은 척 신앙적인 말을 하였으나 집에 돌아가서는 아내에게 불평불만을 늘어놓고 인간적인 말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회당에서는 훌륭한 신자였으나 집에서는 불신자와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이중적이 된 이유는 하나님 앞에서 살지 않고 사람 앞에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을 더 구했습니다 (요5:44). 사람의 인정과 칭찬에 얽매여 양심을 속이고 하나님을 만홀이 여겼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는 생활을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진실되게 회개하지 아니할 때 자신도 모르게 이중 생활을 하게 되고 외식하는 자가 되어 버립니다.

신앙생활이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서정흥 목자님과 같이 말을 잘 못하고 겉으로는 부족할지라도 마음으로 주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원하십니다. 몸은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하지만 마음은 세상으로 향해 있을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아니하십니다. 그 때 마음은 기쁨과 생명력을 잃고 피곤과 짜증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열려 있고, 하나님을 향해 있고 , 하나님을 경외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마음을 하나님께 드릴 때 우리의 마음은 기쁨과 감사와 찬양으로 충만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의 마음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 혹시 마음을 형제나 자매님에게 도적을 맞고 몸만 왔다 갔다 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둘째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전통과 규례를 중히 여겼습니다(7).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갖기보다 사람들이 만든 교회의 전통이나 의식에 더 관심을 가졌습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 카톨릭 교회는 성경보다 교회의 전통과 사람들이 만든 교회 법을 더 중히 여겼습니다. 이로 인해 교회는 부패해질대로 부패해져서 심히 악취를 풍기게 되었습니다. 이때 마틴 루터는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성경’(Sola Scripture)이라는 모토를 내걸고 종교개혁을 일으켰습니다. 또한 청교도 박해 시절에는 교회의 규정을 어기면 벌금을 물었지만,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것은 간과되었습니다. 그러나 청교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에 기초하여 생활함으로 좋은 영적 열매를 맺고 큰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모름지기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여기고 인간의 전통이나 의식을 중히 여길 때, 말하자면 신앙이 인본주의로 될 때, 교회는 맛 잃은 소금과 같이 생명력을 잃고 세상에 악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에 기초한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사람의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버린 구체적인 예를 들어 말씀해 주셨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출20:12),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출21:17). 이 말씀들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주신 거룩하고 신성한 말씀이므로 아무나 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앞세워 자신들의 유익을 채우고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였습니다. 당시에 고르반이라는 유전이 있었는데 이것은 유대인의 한 서약의 형식으로서 부모에게 드려 부양할 물질을 하나님께 드려 헌물로 하였다는 뜻입니다. ‘고르반!’ 하게 되면 그 물질은 종교적 목적 외에는 그 어떤 목적으로도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부모는 법적으로 그에 대하여 어떤 요구도 할 수 없었습니다. 본래 이것은 하나님을 그 어떤 것보다 높이고 절대적으로 섬기는데서 출발하였으나 이를 악용하여 부모 부양을 거부한 것입니다. 이로써 그들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였습니다. 그들은 이 같은 일을 많이 행했습니다. 우리도 부모님과의 갈등 때문에 집에서 나와 외국에 가고 싶을 때, 창12:1절 “너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척하면서 선교사로 가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어떤 경우에서도 인간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하여 이용되거나 악용될 수 없고 또 폐하여 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어떤 것보다도 우선되어야 하며, 우리가 경외심을 가지고 순종해야 합니다.

Ⅱ.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 (14-23)

예수님은 무리들이 가식에 찬 종교 지도자들의 악영향을 받지 않도록 다시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15,16). 이 말씀을 하신 후 무리를 떠나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제자들은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가볍게 책망하신 후 인내심을 가지고 조근조근 설명해 주셨습니다. 무엇이든지 밖에서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할 수 없습니다. 이는 음식이 마음으로 들어가지 않고 배에 들어가 뒤로 나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몸의 신진 대사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몸에 더러운 것이 들어가면 백혈구가 싸워서 정화시키거나 안되면 설사를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비록 몸에 더러운 음식이 들어간다 할지라도 사람을 더럽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식물은 하나님께서 선하게 창조하신 것으로써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습니다 (딤전4:3,4).

20절을 보십시오. “또 가라사대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그리고 예수님은 21-23절에서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무엇인가를 열거하셨습니다.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홀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여기에 열거된 12가지 악들은 모두 인륜에 관한 계명으로서 십계명의 6-10계명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살인, 홀기는 눈, 훼방, 악독, 교만, 광패는 6계명에 속한 것입니다. 홀기는 눈은 사악한 눈으로 시기심을 말하고, 훼방은 남을 헐뜯고 남의 일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악독은 악에 대한 일반적인 용어이며, 교만은 다른 사람보다 자신을 높여서 타인을 경멸하는 것입니다. 광패는 도덕적, 영적 무감각을 의미하는 어리석음을 말합니다. 음란, 간음, 음탕은 7계명에 속합니다. 음란은 여러 종류의 부정한 성적 행위를 말하고, 간음은 결혼한 사람의 부정한 성적 관계를 의미하며, 음탕은 무제한적이고 공공연한 비도덕적인 행위를 뜻합니다. 도적은 8계명이요, 속임은 9계명에 속하며, 탐욕은 10계명에 속합니다. 이 모든 악들은 모두 마음에서 나오는 도덕적 불결로서, 손을 씻지 않는 의식적 불결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중요한 진리를 배웁니다.
첫째,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의 근원은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그 내면이 거룩하고 아름답고 진실되고 순결하게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하얀 백지와 같이 깨끗하고 순결하였습니다. 인간은 깨끗하고 순결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며 무한한 기쁨과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말씀에 불순종하게 되자 마음이 부패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에 교만, 의심, 불신, 시기, 정욕, 탐욕 등 온갖 병균이 서식하게 되어 추하고 더럽게 되어 버렸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점점 멀어져서 선을 사모하고 의를 행하기를 좋아하기보다 악을 사모하고 불의를 행하기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6:5절은 이러한 인간 본성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이는 인간의 마음의 생각하는 모든 경향이 항상 악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지고의 선이신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하나님을 부담스럽게 생각하고 하나님 없이 살고자 했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하였습니다. 그 결과 노아 시대는 음란과 강포와 부패가 온 땅에 충만하여 마침내는 하나님께서 홍수로 멸하시지 않으면 안될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창6:3,11-13). 다윗은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 하는 자가 얼마나 부패 한가를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인간의 본성은 동물과 같이 되어서 자연스럽게 추하고 더러운 것을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원하는대로 가만히 두게 되면 고상하고 영적인 생각을 하기보다 자연스럽게 온갖 추하고 더러운 생각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렘17:9). 인간의 마음이 이렇게 부패하게 된 근본 원인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치도 아니하여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롬1:21).

둘째, 사람의 마음을 깨끗케 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 뿐입니다. 사람에게는 육신과 마음이 원하는대로 살고자 하는 죄의 소욕이 있는 반면, 의롭고 진실되고 순결한 인생을 살고자 하는 거룩한 소원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거룩한 소원과 육신대로 살고자 하는 죄의 소욕간의 갈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죄의 소욕이 거룩한 소원보다 강하여 늘 거룩한 소원이 죄의 소욕에 KO패를 당한다는 것입니다 (롬7:18,22,23). 그래서 원치 않게 죄를 짓습니다. 죄를 짓게 되면 양심의 고통을 받고 죄를 씻음 받고자 노력하게 됩니다. 죄를 짓게 되면 자신이 추하고 더럽게 보여 목욕탕에 가서 몸을 씻어 봅니다. 그러나 몸은 깨끗해지지만 마음은 여전히 추하고 더럽습니다. 또한 자선사업과 같은 선한 일을 하여 죄를 상쇄해 보고자하고 또 고행을 함으로써 죄에 대한 대가를 치루고자 합니다. 또 어떤 일에 몰두함으로써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노력으로도 우리의 마음은 결코 깨끗케 되지 않습니다. 이는 우리의 죄가 너무 지독하여서 피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히9:22). 그래서 구약 시대에는 물건을 정결케 할 때나, 또 부정한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는 반드시 짐승의 피를 뿌렸습니다. 그러나 짐승의 피는 그 효과가 일시적이고 온전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순결한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하나님의 제단에 자신이 피를 뿌림으로 온전하고도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히9:12). 히브리서 저자는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만이 죄로 인해 추하고 더러워진 마음을 흰 눈같이 정결케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보배로우신 피만이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우리를 구속할 수 있습니다 (벧전1:18,19).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셋째, 마음이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케 된 후에는 굳게 지켜야 합니다. 신앙생활이란 세상 정욕과 욕심과 유혹으로부터 마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잠언 기자는 4:23절에서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솔로몬과 같이 아무리 많은 업적을 쌓고 위대한 일을 할지라도 마음을 지키지 못할 때 패망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마음을 지킬 수 있습니까?
첫째로, 우리의 마음을 진리의 말씀으로 채워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빈 항아리와 같아서 무엇인가로 채워져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육신적이고 인간적인 생각으로 채우게 되면 죄의식과 번민이 생겨 악령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게 되면 추한 생각들이 물러가고 의와 거룩함과 진실함과 하늘나라의 희망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시119:9).

둘째로, 생각을 복음화 해야 됩니다. 마음은 지정의가 움직이는 근원입니다. 특히 생각하는 곳입니다. 마음의 생각은 보이지 않고, 또 생각하는 것은 자유라고 해서 함부로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생각을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그 결과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로마서 8:6절은 말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 육신의 생각을 하게 되면 순간은 좋을지 모르나 그 후에는 무서운 죄의식으로 고통하게 됩니다. 우리는 젊기 때문에 정욕적인 생각에 마음을 빼앗기기 쉽습니다. 이런 생각은 우리의 젊음을 소모시키고 인생을 파멸로 이끕니다. 그러나 영적인 생각을 하게 되면 심령에 알 수 없는 기쁨과 생명과 평강이 깃들게 됩니다. 그러므로 순간 순간 인간적인 생각, 육신적인 생각을 물리치고 영적인 생각을 할 수 있도록 생각을 복음화하는 훈련을 쌓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고 승리의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의 더러운 마음을 정결케 할 수 있도록 새롭고 산 길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