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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20-마가복음 8:27-38(주는 그리스도)

by Mark Yang   08/15/2019   Mark

Message


마가복음 제 20 강


주는 그리스도


말씀 : 마가복음 8:27-38
요절 : 마가복음 8:29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예수님은 복음 역사를 시작하실 때부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제자 양성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교육은 크게 1학기와 2학기로 나누어 집니다. 제 1학기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아는 예수님의 인격에 관한 교육이라면, 제 2학기는 예수님이 하실 일이 무엇인가를 아는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교육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1학기를 결산하고 2학기를 시작하는 헬몬산 여름수양회를 가지셨습니다. 본문에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중요한 복음진리가 나타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첫째,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둘째, 예수님을 따르는 자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베드로의 신앙고백 (27-29)

2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과 제자들이 가이사랴 빌립보 여러 마을을 향하여 가는 도중이었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헬몬산 기슭에 아늑하게 자리잡은 한적하고 조용한 곳입니다. 헬몬산은 해발 약 3천m가 되는 장엄한 산으로서 흰 빵떡 모자를 쓴 것같이 그 꼭대기는 사시사철 흰 눈으로 덮여 있습니다. 여기서 눈이 녹은 물이 흘려내려 요단강을 거쳐 갈릴리 호수로 흘러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한적한 북방으로 올라가고 계시는 이유는 무리를 떠나 제자 양성에 주력하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1학기 교육을 결산하고, 2학기 교육을 시작하고자 하셨습니다.시기적으로 보면 예수님께서 갈릴리 사역을 끝내시고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시고자 할 때였습니다.
예수님은 길을 가시다가 갑자기 제자들에게 두가지 질문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두 질문은 모두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묻는 예수님의 인격에 관한 질문입니다. 사람들은 야망의 세월의 진짜 주인공 이명박 회장, 그는 누구인가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가 누구인지 몰라도 나의 생명에는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누구신지 아는 것은 나의 영적 생명과 관련되어 있으므로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17:3절은 말합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여기서 아는 것은 단순히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그 분과 인격적인 교제를 통해 체험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포도나무와 가지와의 관계처럼 뗄레야 뗄 수 없는 생명의 관계입니다 (요15:5).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에 대한 대답이 무엇입니까? 28절을 보십시오. “여짜와 가로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암흑기에 회개의 세례를 전파한 세례 요한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우상숭배가 성행한 아합 시대에 단독으로 바알 선지자 450인에게 도전하여 많은 사람을 하나님께로 돌이킨 엘리야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또 막연하게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도 하는 소수 유력설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마치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듯이 자신들이 체험한 예수님을 나름대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예수님을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위대한 분으로 봅니다. 예수님을 4대 성인 중 한사람으로 보는 것은 가장 고전적 견해입니다. 에리히 프롬과 같은 휴머니스트들은 예수님을 가장 위대한 휴머니스트로 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교육가로 보기도 하고 또 슈퍼 스타로 보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U.F.O를 타고 내려온 외계인으로 보는 설도 있습니다. 특히 요즘 대학가에는 예수님을 민중해방을 위해 헌신한 직업 혁명가로 보는 견해가 유력합니다. 어찌되었든 예수님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신 인간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의 인성만을 본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소크라테스나 공자처럼 존경의 대상은 될 수 있을지언정 몸과 마음을 바칠 경배의 대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의 견해는 예수님의 본질을 놓쳐 버린 피상적인 견해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은 이에 만족하지 않으시고 이번에는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질문은 일반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것과는 무관한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답을 요구하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수제자 베드로가 재빨리 대답하였습니다. 29b을 보십시오.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이 대답은 간결하지만 핵심을 찌르는 정확한 답이었습니다. 그러면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는 말씀이 주는 뜻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야 곧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늪에 빠진 사람은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늪에서 헤어나올 수 없습니다. 오히려 나오려고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더 깊이 빠져 들어갑니다. 그에게는 밧줄을 던져 줄 구원자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헤어 나올 수 없는 죄와 죽음의 깊은 늪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고귀한 하나님의 형상을 잃고 우상숭배, 탐욕, 정욕, 불의, 시기 등의 온갖 죄의 세력에 지배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해 아래서 수고하고 피땀 흘리며 아둥바둥 살다가 결국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허무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죽음 이후에는 죄에 대하여 무섭고도 철저하게 심판 받는 둘째 사망을 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계21:8). 죄의 세력은 거룩하게 살고자 하는 우리의 양심을 파괴시키고, 원치않게 우리를 더럽고 추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빠져 나올 수 없는 죄의 수렁으로 몰고 갑니다. 이 죄의 수렁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 치면 칠수록 더 깊이 죄의 늪으로 빠져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외쳤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7:24). 인간에게는 이 죄의 늪에서 우리를 구원해 줄 구원자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사 아담이 범죄한 그 즉시 메시야를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시대 시대마다 선지자들을 통해 메시야에 대한 약속을 견고케 하시고, 이 약속을 기초로 인류구속 역사를 이루어 오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차자 마침내 약속된 메시야를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셨습니다 (요3:16). 예수님은 성경에서 약속한 바로 그 메시야가 되십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죄와 죽음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나 참 자유를 얻고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참 경배의 대상이 되십니다. 그리스도란 기름 부음 받은 자란 뜻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왕과 제사장, 선지자들이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왕이 되시고 제사장이 되시고 선지자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영적인 왕으로서 우리의 마음을 공의와 사랑으로 다스려 주십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을 평강의 왕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사9:6). 또한 예수님은 대제사장이 되셔서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해 주시고 상처난 마음들을 싸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온전한 대제사장이 되시고,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십니다 (히7:26-28).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드러내시고 장차 올 일에 대해 예언하심으로 선지자 직분도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이시요, 완전한 하나님으로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가 되십니다 (딤전 2:5). 이 예수님은 인생들의 참 경배의 대상이 되십니다.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이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나의 구주요, 참 경배의 대상으로 영접한다는 신앙고백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마음으로 믿는게 중요하지 꼭 고백해야 하느냐고 반문합니다. 그러나 로마서 10:9절은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할 때 구원을 얻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을 고백하는 것은 구원과 관계되는 중요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신앙고백을 기초로 우리 영혼을 책임져 주시고 더 깊은 영적 세계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베드로가 무리들과 달리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배우고 따르는 제자생활을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신자들 가운데는 10년 이상을 신앙생활을 했지만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모르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이는 말씀을 구체적으로 공부함으로써 실생활 가운데서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배우고 따르는 제자생활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기뻐하시고 이 일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경계하셨습니다(30). 이는 아직 복음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복음 역사가 방해를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Ⅱ.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 (31-38)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기초로 그리스도로서 하실 일을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31절을 보십시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 예수님께서는 ‘must’라고 하심으로 이것이 그리스도로서 반드시 겪어야 할 과정임을 강조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는 왜 고난을 받으신 후 부활하셔야 했습니까?
이는 인간의 죄 문제와 죽음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죄는 그 자체로도 비참한 것이지만 그 댓가로 반드시 죽음을 요구합니다. 죄는 무서운 것이어서 피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습니다 (히9:22). 인간은 죄로 인해 피흘리며 죽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은혜와 긍휼이 풍성하셔서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구약에서는 어린 양을 대신 피흘리게 하심으로 인간의 죄를 속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이고 영원한 것이 되지 못했습니다. 또한 그 효과도 일시적이서 죄를 지을 때마다 번거롭게 제사를 지내야 했습니다. 그것은 장차 올 참된 것에 대한 그림자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은 마침내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보내사 십자가에서 희생하심으로 우리 죄를 위한 영원한 속죄제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로써 우리의 모든 허물과 죄가 일시에 깨끗이 사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일찌기 이사야 선지자는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 당하실 수난에 대해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53:5,6). 예수님은 바로 나의 죄 때문에 많은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교만 때문에 갖은 수모와 멸시와 조롱을 당하셨고, 나의 반발심 때문에 십자가에 대못으로 박히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정욕과 이기심과 욕심 때문에 보배로운 피와 물을 쏟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의 죄짐을 한 몸에 짊어지시고, 그 몸으로 우리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셨습니다 (벧전 2:24). 예수님은 나의 죄 때문에 고난의 주, 슬픔의 주가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고난을 받으심으로 우리가 누릴 수 있게 된 은혜가 무엇입니까? 이사야 선지자는 말합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53:5). 우리는 범죄함으로 하나님과 불화 상태에 처하게 되고, 이로 인해 늘 죄의식과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마음에는 참된 평강이 없고 늘 알 수 없는 불안과 공포로 인해 악령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롬 5:1).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잔잔히 흐르는 평화! 이것은 어느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하늘 나라의 평화요, 우리의 마음 속 깊이 묻히인 보배와 같습니다.
또 사람에게는 누구나 마음에 상처가 있습니다. 어쩌다가 어릴 때 호기심으로 범한 죄가 마음의 상처가 되어 일생동안 괴로움을 당합니다. 또 파괴된 가정에서 자라나 제대로 사랑을 받지 못한 것이 마음에 깊은 상처가 되어 이로 인해 탈선하기도 합니다. 실연으로 인한 상처, 무시당한 상처, 가난으로 인한 상처 등 세상에는 수많은 상처가 있습니다. 이러한 상처들은 세월이 간다고 잊혀지거나 어떤 일에 몰두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월이 흐를수록 상처는 더욱 커져서 우리를 괴롭히고 미치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내 대신 채찍에 맞으심으로 이러한 상처들은 깨끗이 나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한대씩 한대씩 채찍에 맞으실 때마다 나의 상처는 아물고 치료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대신 십자가에서 무서운 고통을 당하심으로 말미암아 내 마음의 모든 상처와 고통은 깨끗이 나음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에게 새 생명을 주심으로 새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고난을 당하시고 죽임을 당하신 것으로만 끝난 것이 아닙니다. 만약 예수님의 고난으로 메시야 사역이 끝이 났다면 그의 죽으심은 비극 중의 비극으로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야기가 되고 말 것입니다. 또한 선이 악에게 굴복당하고 하나님은 무능력자로 발견될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신 것도 헛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망권세를 파하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가 살아나셨다!” 이는 인류 역사상 가장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사망권세를 파하시고 인류의 구세주로 확증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영광의 주, 승리의 주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으신 후에 부활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즉 고난을 통한 영광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영광의 메시야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고난의 메시야가 되어야 한다는 성서적 메시야관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32절을 보십시오. 베드로는 거의 반사적으로 예수님을 붙들고 잠시 옆으로 모시고 갔습니다. 그리고 이런 어리석은 말씀은 입에 담지도 말라고 책망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더위를 드신 줄 알고 얼른 포카리스웨트를 사다 드렸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모든 희망을 걸고 가족과 직장도 버리며 주님을 좇았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행하시는 능력의 역사를 보고 예수님이야말로 로마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회복할 메시야임을 믿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메시야 왕국을 건설하실 때 자신은 반드시 국무총리가 될 것을 믿었습니다. 그는 남몰래 총리 취임 연설문을 준비해 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정반대로 많은 고난을 받고 버린 바 되고 죽임을 당하신다니 실로 충격적인 말씀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이런 일이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된다 생각하고 억센 팔로 예수님을 붙들고 책망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베드로를 어떻게 대하셨습니까? 33절을 보십시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조금전까지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칭찬받던 베드로를 예수님은 사단이라고 준엄하게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단이 사랑하는 수제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고 있음을 간파하시고 사단을 대적하신 것입니다. 사단은 언제나 십자가 없이 쉽게 무슨 일을 하도록 유혹합니다. 신앙생활도 힘들게 할 필요가 없이 좀 편하게 하라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No cross, no crown” 십자가가 없이는 영광이 없습니다.

3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예수님을 따르는 자가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이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가 가져야 할 기본 자세에 대해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자기 부인하면 자기 존재를 부인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반발합니다. 그러나 자기 부인이란 자기 인격이나 개성을 말살시키라는 뜻이 아닙니다. 자기 부인이란 자기 생각이나 자기 계획, 자기 꿈이나 이상보다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자기 부인에 있어서도 우리에게 좋은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앞두고 기도하셨습니다.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막14:36). 예수님은 고난의 잔을 회피할 수도 있었지만 자기를 부인하시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기는 어렵지만 자기를 부인할 때 우리는 더 큰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고 영적 세계의 비밀을 깨닫게 됩니다.

둘째,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자기 십자가는 예수님을 따르는데 반드시 감당해야 할 사명의 십자가입니다. 말씀 전파의 사명, 양 치는 사명, 세계선교의 사명은 신자라면 누구나 감당해야 할 사명입니다. 사람들은 십자가를 목에 걸고 다니거나 벽에 걸어놓고 감상하기는 좋아하지만 십자가를 지는 것은 부담스러워 합니다. 그러나 사명의 십자가는 결코 부담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안지고자 하니까 부담스럽지, 지고자 하면 가볍고 은혜가 있습니다. 사람은 사명인의 존재로 지음 받았습니다 (창1:28). 그러므로 사명의 십자가를 질 때만이 인생을 인생답게 살 수 있습니다. 사명의 십자가는 예수님을 잘 배울 수 있는 축복이요, 은혜입니다.
사람이 사명의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먹고 살기 위해 지는 삶의 십자가를 져야 됩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단지 먹고 살기 위해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투쟁한다면 얼마나 허무하고 비참한 일입니까? 이런 십자가는 무의미하고 우리에게 아무런 생명과 기쁨을 주지 못합니다. 인생의 참된 열매가 없습니다. 삶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후회와 고통과 슬픔과 번민을 주며 우리를 파멸에 이르게 합니다. 그러나 사명의 십자가는 좀 고생스럽기는 하지만 의미가 있고 생명이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사명의 십자가는 실로 은총의 십자가요 영광의 십자가입니다.

35-38절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십자가의 길을 확신있게 갈 수 있도록 부연 설명해 주십니다. 35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의 목숨은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소중하고 고귀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생명에 대한 강한 애착이 있습니다. 세상을 거꾸로 매달려 살아도 어찌든지 살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안 죽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에는 다 죽게 됩니다. 자기를 위해 사는 자는 결국 영적 생명까지 잃게 됩니다. 그러나 한 번 밖에 없는 고귀한 목숨을 주와 복음 역사를 위해 살 때 구원을 얻게 됩니다.

38절을 보십시오. 세상은 음란하고 죄가 많아 십자가의 길을 용납지 않고 조롱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부끄러워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부끄러워 하게 되면 장차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영광의 주, 심판의 주로서 오실 때 부끄러움을 당하게 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나는 너를 본 적이 없노라.” 하시면 정말 끝장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와 복음을 위해 살 때 주님은 우리를 결코 실망시키지 않으십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십니다. 생명의 구주요 참 경배의 대상이 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시간 나에게도 조용히 물으십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다른 사람들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우리는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신앙고백해야 겠습니다. 나의 구주요 참 경배의 대상이 되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