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Study View


마가복음 Ⅱ 부:마가복음 9:1-13(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by Mark Yang   08/15/2019   Mark

Message


마가복음 Ⅱ 부 제 1 강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말씀 : 마가복음 9:1-13
요절 : 마가복음 9:7
“마침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마가복음 9장부터는 마가복음 Ⅱ부입니다. Ⅰ부는 예수님의 인격에 관한 내용이라면, Ⅱ부는 예수님의 사역에 관한 내용입니다. Ⅱ부에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는 길에 있었던 사건들과 예루살렘에서의 수난과 죽으심과 부활에 관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들은 공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복음의 깊은 비밀들이 나타나 있습니다. 마가복음 Ⅱ부 공부를 통하여 좀 더 깊은 영적 세계로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높은 산에 올라가 변형되신 사건입니다. 변형되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시며 이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변형되신 예수님 (1-4)

1절을 보십시오.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8장에서 계속되는 말씀으로 십자가의 도리를 부담스럽게 여기고 있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심어 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한다는 것은 가까이는 엿새 후에 있을 예수님의 변형되신 사건을 가리키는 것이요, 멀리는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부활의 사건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고난에 대한 두려움에 빠져 있는 제자들에게 장차 그들이 맛보게 될 승리와 영광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비밀을 가르치신 그때부터 엿새 후였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이곳은 ‘다볼산’이라고도 하고 ‘헬몬산’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높은 산’이라는 말과 본문 전후 배경을 살펴볼 때 ‘헬몬산’이 유력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제자들을 모두 데려가시지 않고 세 제자만 데리고 가셨을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들 가운데서도 세 사람의 수제자들을 훈련시켜 영향력 있는 지도자들로 세우고자 하시는 역사방법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에게 장차 올 부활의 영광을 보여 주심으로써 십자가의 도리를 마음으로부터 영접하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장차 당하실 고난과 죽으심에 대해 말씀하시자 심하게 반발했습니다. 특히 베드로는 사단이라는 책망을 듣고 기가 죽어 인상을 쓰고 다녔습니다. 그들이 십자가의 고난을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이유는 그 후에 올 부활의 영광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장차 있게 될 부활의 영광을 보여 주심으로써 그들이 십자가의 도리를 심령으로 영접할 수 있도록 시청각 교육을 시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높은 산에 올라가셨을 때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까? 2b,3절을 보십시오.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만큼 심히 희어졌더라.” 예수님은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형되셨습니다. 산 위에 올라오기 전까지만 해도 예수님의 모습은 죄인들을 섬기시느라 상할대로 상한 모습이었습니다. 머리 둘 곳도 없이 가난하신 예수님,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사 이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예수님, 샌달을 신고 온 갈릴리를 다니시며 말씀을 가르치시는 예수님, 하루 종일 병든 자들의 병을 짊어지시고 그들의 연약함을 감당하시는 예수님, 거지대장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병들고 귀신들린 문제 많은 양들을 일일이 섬기시느라 그의 모습은 마치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와 같았습니다. 그림에 보면 예수님께서 한 어린 양을 안고 양무리들을 푸른 초장에서 인도하시는 장면은 참으로 낭만적이고 아름답게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 예수님의 모습은 냄새나고 죄악된 인생들을 섬기시느라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어서 우리 인생들이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었습니다 (사53:2).

그러나 예수님은 본래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본래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으로서 권능과 영광으로 옷 입으신 분이십니다. 감히 죄악된 인생들이 그 앞에 설 수 없는 영광스런 분이십니다. ‘흰 옷’은 영광과 권세, 거룩함과 승리의 상징입니다. 이 예수님은 하늘 나라의 영광과 권세를 가지신 영광의 주시요, 사망 권세를 파하시고 승리하신 승리의 주가 되십니다. 변형되신 예수님의 모습은 그리스도 본래의 모습이요, 장차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실 부활의 모습입니다.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서 환상 중에 영광스런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 오른 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계1:13-16). 예수님의 가슴에는 빛나는 금띠가 있습니다. 머리와 털의 희기는 거룩함과 순결을 의미하며, 불꽃 같은 눈은 사물을 꿰뚫어 보는 전능자로서의 통찰력을 의미합니다. 풀무에 연단한 주석 같은 발은 심판주로서의 모습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음성은 나이아가라 폭포수와 같이 위엄이 있고 힘이 있습니다. 그의 입에서는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갤 수 있는 생명의 말씀이 흘러 나오고,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과 같이 영광스런 광채를 발하였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 예수님을 보았을 때 그 영광에 압도되어 발 아래 엎드러져 죽은 자와 같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러한 영광스런 모습을 보여주신 뜻이 무엇일까요? 그동안 제자들의 눈에 비췬 예수님의 모습은 초라한 분이셨습니다. 화려한 까운을 입고 대리석과 금으로 두른 휘황찬란한 성전에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섬김 받는 종교 지도자들에 비하면 예수님은 거지대장에 불과하였습니다. 이 예수님을 따르는 자기들은 더욱 초라해 보였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남의 밀 밭에서 밀 이삭을 잘라 비벼 먹을 때는 꼭 이렇게까지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가 하는 회의와 함께 슬픈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 모든 것을 참을 수 있었던 것은 언젠가 예수님께서 영광 중에 이스라엘을 회복하시면 상황이 바뀔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엉뚱하게도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림을 당하고 죽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를 말리는 베드로를 사단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은 제자생활의 의미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동안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고 또 훈련 받느라 죽도록 고생한 결과가 죽음으로 끝이 난다고 생각하니 너무 비참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반발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 후에 올 부활의 영광을 상상할 수도 없었고, 따라서 십자가의 도리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십자가의 고난 후에 올 부활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 주심으로 십자가의 도리를 마음으로 영접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제자들과 같이 예수님을 생각할 때 머리 둘 곳 없이 가난하신 예수님, 자신의 생애를 온통 희생하신 예수님, 휴가도 없이 일만 하시는 예수님, 무거운 십자가만 지신 예수님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십자가를 지고 고생만 하다가 끝나는 것으로 생각하고 부담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음에 흰 옷 입으신 영광스런 예수님의 모습을 새겨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승리의 주 예수님, 빛나고 높은 보좌에 앉으사 온 세상을 통치하고 계시는 영광의 주 예수님, 장차 큰 권능과 영광으로 재림하사 온 세상을 심판하실 심판의 주 예수님, 이 예수님을 마음에 새길 때 기쁨으로 십자가를 질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주님을 위해 그토록 많은 고난을 받고도 조금도 기가 죽지 않고 오히려 기쁨과 생명력이 넘쳤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십자가의 고난 뒤에 올 영광의 면류관을 바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롬8:18)고 하였습니다. 사도 베드로도 십자가를 부담스럽게 여기고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고난에 대한 자세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는 고난으로 흩어진 성도들에게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련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벧전5:12b,13a)고 권면하였습니다. 변형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본 베드로의 심령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사라지고 영광스런 부활의 모습이 새겨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제자들은 변형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런데 잠시후 그들은 더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저희에게 나타나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거늘” 누가복음 9:31절에 보면 이들의 대화 내용은 예수님께서 장차 예루살렘에서 받으실 고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들의 출현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보통 사람의 죽음과 똑같이 생각했습니다. 죽음은 모든 것의 끝장이요, 패배요, 실패로 생각했습니다. 더구나 젊은 나이에 보기 싫은 종교 지도자들 손에 잡혀 죽임 당하는 것을 가장 억울하고 원통하게 생각했습니다. 이 때문에 베드로는 예수님의 죽음을 결사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으심은 이런 죽음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모세는 율법을 전수한 율법의 대표요, 엘리야는 대표적인 선지자입니다. 구약 성경은 율법과 선지자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들과 말씀하시는 것은 예수님이 구약성경에 약속된 메시야이심을 말해줍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으심은 메시야로서의 죽음이요 모든 인류의 죄의 값을 치루시는 대속의 죽음입니다.

또한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의 공통점은 모두 고난을 통해 영광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가장 어려운 시기에 구속역사를 섬기느라 많은 고난을 겪은 고난의 종들이었습니다. 모세는 노예 백성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고 이들의 노예근성를 감당하느라 실로 많은 고생을 하였습니다. 또한 엘리야는 백성들을 바알숭배의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홀로 바알 선지자 450명과 더불어 싸운 고난의 종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고난은 우리 주 예수님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장차 오실 메시야의 그림자에 불과했습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모든 죄를 한 몸에 짊어지시고 많은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구속역사의 절정이었습니다.예수님께서 고난 받으심으로 오랜 세월동안 준비되고 선지자들이 그토록 갈망하던 인류 구속사업이 완성되었습니다. 이 세분들은 모두 고난을 통해서 영광에 이르렀습니다. 고난이 사람을 망하게 한다면 모세와 엘리야는 너무 고생을 많이 하였으므로 비참한 몰골을 하고 나타나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영광 중에 나타났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부활의 영광에 이르셨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주와 복음역사를 위하여 고난 받는 것이 사람을 얼마나 영화롭게 하는가를 보여 준 증인들이었습니다. 이를 통하여 제자들이 고난에 대한 자세를 바꾸어 적극적으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도록 하였습니다.

Ⅱ.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5-13)

변형되신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로 더불어 말씀하시는 것을 본 베드로는 황홀지경에 빠졌습니다. 구약성경에서 말로만 듣던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 눈 앞에 직접 나타나 보이자 이것이 꿈인가 생시인가 싶었습니다. 베드로는 너무 좋아 예수님을 모시고 이분들과 함께 영원토록 살고 싶었습니다. 그는 즉시 예수님께 멋진 제안을 하였습니다.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그런데 저자는 6절에서 “이는 저희가 심히 무서워하므로 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함이더라.”하고 코멘트 하고 있습니다. 즉 베드로가 너무나 놀란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잠재의식 속에 숨겨져 있던 속생각이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것입니다. 이는 베드로의 영적상태를 잘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동안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많은 고생을 감당했습니다. 양들과 1:1하느라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이 원치않는 금식기도도 많이 했습니다. 어떤 때는 너무 배가 고파서 안식일날 남의 밀이삭을 잘라 먹다가 바리새인들에게 들켜 혼이 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선두자리를 지키기 위해 늘 긴장된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는 더 이상 고생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산 밑으로 내려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산 밑에는 병들고 귀신들린 문제 많은 양들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또 동역하기 힘든 아홉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2학기 들어 갑자기 강해진 예수님의 훈련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사명의 십자가를 지기 싫었습니다. 그는 세상만사를 다 잊어 버리고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지어 사랑하는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살고 싶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초막신앙’이라고 합니다. 초막신앙은 십자가의 고난 없는 영광만을 구하는 신앙입니다.

우리는 이런 베드로를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고난을 싫어하는 본성은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는 좋은 점수를 따서 장학금을 받고 싶어하지만 공부하기는 싫어합니다. 외국어를 유창하게 잘하고 싶어하지만 단어 외우기는 싫어합니다. 많은 양을 낳고 키우는 큰 종이 되기를 소원하지만 1:1 말씀공부와 양들의 죄와 싸우기는 싫어합니다. 큰 말씀의 종이 되기는 원하지만 성경을 읽고 소감 쓰기는 싫어합니다. 위대한 목자가 되기는 원하면서도 훈련 받기는 싫어합니다. 십자가 없이 영광을 구하는 여기에 딜레머가 있습니다. 그러면 초막신앙이 행복할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얼핏 보기에 십자가가 없어 좋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십자가가 없을 때 영광도 없는 무의미한 삶입니다. 결국 부패한 본성을 좇아 살다가 멸망에 이를 수 밖에 없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변형되시고 또 모세와 엘리야로 더불어 말씀하시는 중요한 뜻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위로부터 하나님의 계시가 임하였으나 인간적인 생각만 하고 있던 베드로는 자신도 모르게 헛소리를 하고 말았습니다. 이 때 갑자기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하나님의 엄위한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영광과 위엄을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여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해줍니다.

그러면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들어야 할 이유가 무엇이며, 또 무슨 말씀을 들어야 합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로서 절대권위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이분의 말씀을 듣고 안 듣고는 생사에 관계되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병원에서 인턴은 Chief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처럼 생각하고 귀를 기울이고 절대적으로 순종합니다. 군대에서 장군의 말은 사병에게 있어서 범할 수 없는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더욱 더 그러할 것입니다. 그러면 제자들은 무슨 말씀을 들어야 합니까? 이는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에 관한 말씀입니다. 특히 십자가에 관한 말씀은 듣기 싫지만 반드시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십자가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심하게 반발하였습니다. 아예 귀를 막고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산상수훈이나 임마누엘 같은 말씀은 잘 받아 들였으나 자기 부인이나 자기 십자가와 같은 부담스런 말씀은 잘 받아 들이지 않고 튕겨 버렸습니다. 사람들은 은혜와 축복, 죄 사함 등의 말씀은 “할렐루야 아멘!” 하지만 고난, 십자가, 사명에 관한 말씀은 “노멘!” 합니다. 그러나 몸에 좋은 약이 입에 쓴 것처럼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구원을 주는 십자가의 복음은 듣기에 부담스럽습니다. 그러나 부담스럽다고 해서 듣지 않으면 결국 생명을 잃게 됩니다. 영광의 뒤안 길에는 언제나 쓰라린 고난의 길이 따른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No cross, no crown. No pain, no gain" 이는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될려고 해도 하루에 열시간씩 매일 연습을 해야 합니다. 전문의가 되려고 해도 13년의 기난긴 고난의 길을 가야 합니다. 어떻게 보면 인생자체가 고난의 길입니다. 그런데 이 길을 주와 복음역사를 위하여 사명의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다는 자체가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그러므로 십자가의 복음을 무조건 힘들어 하고 귀를 막을 것이 아니라 이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안일은 사람을 패망케 하지만, 십자가는 사람을 살리며 위대하게 합니다. 또한 열매 맺는 인생을 살게 하며, 무엇보다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한 분 한 분이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름으로 영광스럽고 위대한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8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정신이 나서 문득 둘러보니 그곳에는 아무도 없고 오직 예수님과 자기들 뿐이었습니다.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계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마음에 두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하고 부활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과거와 같이 무조건 반발하지 않고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잘 이해가 되지는 않지만 마음에 두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마음에 의문나는 점을 물었습니다.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당시 서기관들은 성경 학자로서 백성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들은 말라기 선지자의 예언을 근거로 엘리야가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한 후에 메시야가 영광 중에 나타나 통치할 것을 가르쳤습니다. 이는 고난 받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어 넣어주는 민족적 메시야관이었습니다. 이러한 메시야관은 당시에 자연스럽게 유포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에게 성서적 메시야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엘리야가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 어찌 인자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 하였느냐” 예수님은 메시야는 영광을 받기 전에 반드시 고난을 받아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고난을 통한 영광!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엘리야는 세례 요한을 가리킵니다. 세례 요한은 엘리야의 심정과 능력으로 회개의 메시지를 전파함으로 메시야의 길을 예비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세례 요한을 알아보지 못하고 함부로 대하고 목베어 죽였습니다. 이와 같이 메시야가 이 땅에 오셨지만 사람들은 함부로 대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들의 영적 무지와 교만과 시기심과 불순종의 죄 때문에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런 고난을 통해 인류 구속역사를 완성하시고 후에는 부활의 주, 승리의 주, 영광의 주가 되셨습니다.

우리 다같이 변화산상으로 올라가 흰 옷 입으신 영광스러운 예수님을 만납시다. 그리고 이 예수님을 마음에 새기고 기쁨으로 사명의 십자가를 감당합시다. 안일은 우리를 패망으로 인도하지만 십자가는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합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대한 분명한 철학과 소신을 가지고 주님 가신 길을 한 걸음 한 걸음씩 따라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