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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엣 것을 찾으라

by Mark Yang   06/26/2022   Colossians 3:1~17

Message


골로새서 제 5강

위엣 것을 찾으라

말씀/ 골로새서 3:1-17

요절/ 골로새서 3: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골로새서 1-2장은 교리편이고, 3-4장은 실천편입니다. 사도 바울의 서신은 언제나 교리편과 실천편으로 나누어집니다. 집의 건축에 비유한다면 교리는 집을 세우는 뼈대와 같고, 실천은 뼈대를 기초로 방이나 부엌이나 화장실과 같이 구체적으로 채워지는 내용물과 같습니다. 뼈대가 없이 내용물을 채울 수 없는 것과 같이, 교리가 없이는 실천이 있을 수 없습니다. 또한 반대로 실천이 없이는 교리는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버립니다. 우리는 바른 신앙을 기초로 바른 행위가 따라 오도록 힘써야 합니다.

3-4장의 실천편의 주제는 ‘새 사람, 새 생활’입니다. 우리는 과거 아무리 선한 일을 많이 하고 착하게 살고자 노력해도 아담 안에서의 옛 사람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노예로 태어난 사람이 노예의 신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것과 같이, 아담 안에서의 옛 사람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값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값비싼 대가를 치루시고 우리를 죄와 사단의 권세로부터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아담 안에서의 옛 사람에서 벗어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새 사람이 되었으면 새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에 바울은 새 사람이 감당해야 새 생활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I. 위엣 것을 찾으라 (1-4)

1-4절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활을 해야 할 이유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라는 말씀은 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조건절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함께’라는 단어입니다. 1-4절에는 ‘함께’라는 단어가 3번 나오는데 실상은 4번 나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1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이 전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2:12절에서도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세례는 연합의 의미가 있는데 이는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때 나도 함께 죽었고,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실 때 나도 부활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의 십자가가 되고 예수님의 부활이 나의 부활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은 과거 2천년 전에 있었던 사건이 아니라 영원히 현재적인 사건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새 사람이 될 것이 아니라 이미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땅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늘에 속한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행함으로 새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새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새 사람으로 합당한 생활을 해야 됩니다. 우리는 새 사람이 되었으므로 땅에 것을 찾아서는 안 되고 위엣 것을 찾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하심으로 죽음을 정복하신 승리자가 되십니다. 그리스도는 부활하신 후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사 온 세상을 그 뜻대로 다스리고 계시는 세상의 통치자가 되십니다. 그리스도가 계시는 곳에는 참 생명이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이곳은 그리스도께서 사랑과 평화, 은혜와 진리로 다스리시기 때문에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는 완전한 낙원입니다(사 11:9, 계 21:4).

“위엣 것을 찾으라”는 말씀은 위엣 것을 추구하라는 말씀입니다. ‘찾다’는 말은 헬라어로 ‘제테오’(ζητέω)인데 이는 영어로 ‘seek'로서 추구한다는 뜻입니다. 찾는다는 것은 단지 마음으로 소원하는 것도 아니고 말로 구하는 것도 아니라 온몸으로 행동으로 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찾을 때 생각만 하지 않고 온통 뒤지면서 찾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생의 목적을 위에 계신 그리스도께 두고 이 분을 얻기 위해 힘쓰라는 것입니다. 세상과 그리스도 사이를 왔다 갔다 하지 말고 그리스도께 모든 것을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과거 우리는 땅의 것을 추구하며 살았습니다. 땅에 속한 물질, 권세, 명예, 사랑이 전부인 줄 알고 이런 것들에 목을 매고 살았습니다. 이런 것들이 없으면 죽는 줄 알고 이런 것들을 얻기 위해 우리의 모든 것을 투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 새 사람이 된 후로는 이런 것들은 우리가 진정 추구해야 할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진정 추구해야 할 것은 우리의 구주요 왕이신 그리스도요, 그분이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만이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대상임을 깨닫고 자기에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그리스도 한 분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을 투자했습니다(빌 3:8-10).

“위엣 것을 찾으라”는 말씀은 이 세상의 일은 무관심하고 영적인 일만 하라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이는 세상일에 얽매이지 말고 모든 것을 영원이라는 빛에 비추어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에 이 세상의 일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지 아니하고 영적인 것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속적인 세상에 살지만 신령한 것을 바라보고, 땅에 살지만 위엣 것을 바라보고, 현재에 살지만 영원한 미래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자입니다. 인간은 짐승과 달리 위를 바라보고 살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현실이 힘들다고 해서 먹고 사는 문제에 얽매여 땅의 것을 바라보고 살 때 우리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잃어버리고 사정없이 짐승과 같이 전락하고 말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실이 아무리 힘들어도 위를 바라보고 위엣 것을 찾기에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위엣 것을 찾기에 힘쓰면 인간답게 살게 되고 땅의 것도 자연히 얻게 됩니다. 20세기의 위대한 기독교 변증가이자 작가인 C. S. 루이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천국을 지향하면 세상을 덤으로 얻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지향하면 둘 다 잃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6:33). 미련한 자들은 둘 다 얻으려고 두 주인을 섬깁니다. 그러나 두 주인을 섬기면 두 주인에게서 배반을 당하게 됩니다.

2절은 우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위엣 것을 찾을 수 있는가를 말해 줍니다.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찾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생각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함부로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생각했는가에 따라서 반드시 결과가 나타나게 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생각을 조심하라. 그것은 말이 되기 때문이다. 말을 조심하라. 그것은 행동이 되기 때문이다. 행동을 조심하라. 그것은 습관이 되기 때문이다. 습관을 조심하라. 그것은 인격이 되기 때문이다. 인격을 조심하라. 그것은 인생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어떤 생각을 하는가에 따라서 그 인생이 좌지우지 된다는 것입니다. 생각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성경은 생각의 중요성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 8:6) 우리는 땅의 것을 생각해서는 안 되고 위엣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인간적인 생각, 육신적인 생각을 해서는 안 되고, 영적인 생각, 하나님 중심적인 생각을 해야 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부인하고 그리스도 중심의 생각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공적인 신앙생활을 하려면 무엇보다 영적으로 생각하는 법을 배우고 영적인 생각을 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그런데 영적인 생각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부정적인 생각에 익숙한 사람은 무슨 일이든 부정적으로만 생각하고 쉽게 포기해 버립니다. 고 정주영 회장은 새로운 사업을 하고자 하면 주위 사람들이 부정적으로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면 “해 봤어!” 하며 부정적인 생각을 물리치고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생각으로 불가능에 도전하여 새 역사를 창조했습니다. 운명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모든 사건을 운명적으로 생각하고 “아이구 내 팔자야” 하며 신세한탄만 합니다. 음란한 생각에 젖어있는 사람은 하루 종일 음란한 생각만 하다가 귀중한 세월을 허비하는 중풍병자가 되어버립니다. 부정적이고 운명적인 생각에 익숙해 있던 사람이 하루 아침에 영적인 생각을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피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인간적인 생각이 들 때마다 얼른 영적인 생각으로 방향전환을 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영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도록 기도와 성경 읽기와 신앙서적 읽기에 힘쓰며, 세상적인 친구는 피하고 영적인 대화를 할 수 있는 좋은 친구와 교제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이렇게 의도적으로 훈련해야 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처음에는 다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어색하고 실수를 많이 합니다. 운전도 처음에는 나와 차가 따로 놀아 실수를 많이 하지만 오랫동안 운전을 하다 보면 익숙해져서 차가 내 몸에 착 달라붙어 자연스럽게 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인간적인 생각에 익숙한 사람이 영적인 생각을 하고자 하게 되면 처음에는 어색하고 이상하게 느껴지고 실수를 많이 하게 되지만 훈련을 하게 되면 나중에는 자연스럽게 영적인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영적인 생각을 함으로써 누리게 되는 축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큽니다.

3,4절은 우리가 위엣 것을 찾고 위엣 것을 생각해야 할 이유에 대해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우리가 위엣 것만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지 말아야 할 이유는 첫째로, 우리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때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세상에서 불이익을 당할 때 억울하고 분한 마음이 들고 손해의식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이 성자에게 가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성자는 공동묘지를 가리키며 그곳에 가서 마음에 있는 대로 실컷 울분을 토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공동묘지에 가서 “이 나쁜 놈아, 죽일 놈아 … ”하면서 실컷 욕을 퍼붓고 돌아왔습니다. 이때 성자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가서 욕을 하니까 무엇이라고 대꾸합디까?” “아무 말도 없던데요.” “그것이 바로 예수 믿는다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습니다. 우리 옛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습니다. 내 육과 정과 욕심, 못된 성질 등 내 모든 것이 다 죽었습니다. 그런데 과거의 못된 성실이 살아나 하나님을 슬프시게 할 때가 있습니다. 이는 온전히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옛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으므로 다른 사람에 대해서 죽은 자로 나타나야 합니다. 한국 초대 교회에 유명한 김익두 목사님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고 회개한 후 맨 먼저 사람들에게 “김익두는 죽었다”는 자신의 부고장을 돌렸습니다. 사람들은 깡패 김익두가 죽었다는 부고장을 받고는 모두들 기뻐했습니다. 평소에 그가 얼마나 잔인하고 못된 일을 많이 저질렀기에 사람들이 그렇게 좋아했겠습니까? 그런데 어느 날 시장 한복판에 그 죽었다던 김익두가 나타났습니다. 그의 손에는 성경책 하나가 들려 있었습니다. 그의 등장에 사람들은 놀라기도 했지만 어떤 사람은 변화된 그를 시험해 보려고 그에게 물 한 통을 뒤집어 씌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물을 툭툭 털고는 물 끼 얻은 사람을 쳐다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옛날 김익두가 죽었다는 그 사실을 기뻐해라. 살았다면 너는 요절이 났을 것이다.”

우리가 위엣 것만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지 말아야 할 둘째 이유는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면 영원한 파멸에서 벗어나 영생을 얻게 됩니다(요 3:16). 그런데 이 영원한 생명이 당장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게 됩니다. 말하자면 우리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됩니다. 이것은 마치 기차나 비행기표를 사서 자리를 예약하는 것과 같습니다. 표를 사 놓으면 내 자리가 예약되어 있기 때문에 못 탈까봐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사는 표를 사 놓아도 사고가 생겨 못 탈수도 있지만, 인생의 모든 생사화복을 주관하시고 세상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는 조금의 실수도 없기 때문에 전혀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 안에서 미래가 가장 확실히 보장되어 있기 때문에 주와 복음을 위해서 자신 있게 기쁨으로 희생할 수 있고 순교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영광 중에 나타나게 됩니다. 그때 우리의 몸은 욕되고 약하고 천한 몸에서 영광스럽고 강하고 신령한 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신비스럽고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땅엣 것을 추구하고 땅엣 것을 생각하지 말고, 위엣 것을 찾고 위엣 것을 생각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II. 땅의 지체를 죽이라 (5-11)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었지만 과거 옛 사람의 죄악된 본성이 남아 있어 우리를 괴롭힐 때가 종종 있습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나 그 내면에는 애굽에서 노예로 살던 노예근성이 남아 있어서 훈련이 필요했던 것과 같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죄악된 본성과 적극적으로 싸워야 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5a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바울은 땅에 있는 지체를 ‘잊어버려라’, ‘피해라’, ‘적당히 도닥거려라’고 하지 않고 ‘죽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죄악된 본성이 다시는 들썩이지 못하도록 극단적으로 처단하라는 것입니다. 과거의 죄악된 습관을 끊어버리기란 쉽지 않습니다. 술과 담배에 인이 박힌 사람이 이를 끊기 위해서는 순교적인 투쟁이 필요합니다. 이를 끊지 못해 남몰래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괴로워합니다. 또 포로노와 게임에 중독된 사람은 그 습관을 쉽게 끊어버리지 못하고 시시때때로 자신을 더럽히며 죄의식에 시달립니다. 또 화가 나면 물건을 집어던지는 사람은 그 습관을 쉽게 끊지 못하고 손찌검을 하다가 큰 화를 당하기도 합니다. 이런 좋지 못한 습관을 끊어버리기 위해서는 적당히 해서는 절대로 끊을 수 없습니다. 다시는 이런 것들이 살아나지 못하도록 죽여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철저하게 십자가에 못박아야 합니다(갈 5:24).

땅에 있는 지체는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입니다. 음란은 불법적인 성적인 관계를 말하고, 부정은 음란을 포함한 더러운 행위들을 뜻합니다. 사욕은 음란 외에 분노와 질투 같은 욕망을 의미하고, 악한 정욕은 성욕과 물욕과 권세욕과 같이 나를 노예화하는 끝없는 욕망을 말합니다.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말한 의미가 무엇일까요? 탐심은 헬라어로 ‘플레오넥시아’(πλεονξία)인데 이는 ‘더욱 많이’를 뜻하는 ‘플레오’와 ‘가진다’를 뜻하는 ‘에케인’의 합성어로서 “더욱 많이 가지고 싶은 소원”을 말합니다. 이것은 만족할 줄 모르는 탐욕입니다. 돈만 하더라도 필요 이상으로 더 많이 가지고자 할 때 돈에 대한 탐심이 생겨 우상숭배가 됩니다. 우상 숭배의 본질은 많이 가지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탐심이 생기면 눈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아니합니다. 돈에 대한 탐심이 생기면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혈안이 되어 돈을 벌고자 합니다. 정욕에 대한 탐심이 생기면 앞뒤를 가리지 않고 죄를 짓게 됩니다.

우리가 땅에 있는 지체들을 죽여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6절을 보십시오.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the wrath of God is coming.)는 것은 현재 진행형으로서 하나님의 진노가 현재도 계속해서 임하고 있음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무섭습니다. 우리는 지진이나 허리캐인이나 태풍을 만날 때 순식간에 모든 것이 초토화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신명기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께서 복을 주심으로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게 된다고 하였습니다(신 28:1-14). 반면에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저주가 임하게 되어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염병과 학질과 주림과 목마름과 헐벗음과 같은 각종 재앙들이 따라 다니며 진멸케 한다고 하였습니다(신 28:15-68). 하나님의 진노는 피할 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과 같은 땅의 지체를 죽이기에 힘써야 합니다.

7-9절은 적극적으로 벗어버려야 할 것들이 무엇인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벗어버린다’는 것은 ‘의복을 벗는다’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을 때 낡은 옷을 벗고 물에 들어갔다가 물에서 나온 후에는 새로운 청결한 흰옷을 입었습니다. 이것은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 사람과 새로운 행위를 입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벗어버려야 할 것들은 인간관계 속에서 생기는 것들로서 곧 노와 분과 악의와 훼방과 부끄러운 말과 거짓말입니다(8). (개역성경에는 ‘노’(anger)가 없으나 원어에 보면 있음) 우리도 전에는 육을 좇아 행하며 그 가운데서 살았으나 이제는 새 사람이 되었으니 이 모든 것을 벗어버려야 합니다(7). 노는 ‘오르게’(ὀργή)로서 오랜 시간을 두고 천천히 타오르는 만성적인 분을 말하고, 분은 ‘두모스’(θυμός)로서 갑작스럽게 끓어올라 폭발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노를 한번 품으면 한달이고 두달이고 1년이고 2년이고 노를 품고 복수의 칼을 갈며 살아갑니다. 이런 자들은 지옥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벌컥 화를 낸 다음에 뒤 끝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본인은 쉽게 잊어버릴지 모르지만 그 화로 인해 상대방은 이미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아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노를 오래 지속하는 것이나 순간적으로 폭발하는 것은 다 벗어버려야 할 것들입니다. 악의는 사람을 해치려는 욕망을 말하고, 훼방은 하나님께 향할 때는 참람으로서 신성모독이 되고, 이웃을 향할 때는 모욕을 주고 이간시키는 중상모략이 됩니다. 부끄러운 말은 추잡하고 음탕한 말을 뜻합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특히 거짓을 벗어버려야 합니다(9). 거짓말은 불신사회의 보편적인 악덕입니다. 거짓은 거짓의 아비인 사단에게서 나오는 것으로서 모든 악의 근원이 됩니다. 요한 계시록 21:8절에서는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거짓의 반대는 진실입니다. 믿는 자의 특징은 진실입니다. 우리 모임의 특징도 진실입니다. 만일 우리 모임이 진실하지 못하고 거짓 된다면 사단이 역사하는 모임이 되고 말 것입니다. 때로 우리 가운데는 목자를 교모하게 속이고 뒤에서 거짓되게 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철저하게 자신을 위장하고 사람들의 눈을 속입니다. 그리고 순진한 목자들을 어리석다고 생각하고 마음대로 이용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거짓되게 행하는 자가 어리석은 것입니다. 이런 자는 자신이 사단의 똘마니 노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이런 자는 자신의 거짓말이 얼마나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고 그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지 못합니다. 또한 사람은 속일 수 있으나 하나님은 결코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결국 거짓은 다 드러나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중생활을 벗어버리고 부족할지라도 진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진실하십니다. 우리는 거짓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덧입어야 합니다.

10절은 새 사람이 추구해야 할 목표가 무엇인가를 말해 줍니다.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새 사람을 입었다는 것은 부분적인 변화가 아니라 존재가 완전히 바꾸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새사람의 성결의 목표는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새롭게 하심을 받는다’는 것은 현재분사로서 계속적인 갱신 상태를 말합니다. 창조는 한번으로 영원히 하신 것이지만 재 창조는 계속적으로 진행됩니다. 11절은 새 사람의 세계에는 아무 차별이 없음을 말해 줍니다. 거기에는 인종적(헬라인과 유대인), 종교적(할례당과 무할례당), 교양적(야인이나 스구디아인-미개인), 사회적(종이나 자유인)인 차별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출생과 국적, 문명과 비문명인, 계급간의 장벽 등 모든 장벽을 타파하시고 그 안에서 만유를 통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것을 초월하여 한 형제요 자매입니다.

III. 새 사람이 입어야 할 덕목들 (12-17)

5-11절에서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라는 소극적인 교훈을 주었으나, 12-17절에서는 새 사람이 입어야 할 덕목에 대해서 적극적인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12-14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이 말씀은 새 사람의 신분이 어떠한가를 말해 줍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보통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선민이요,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거룩한 백성이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민답게, 거룩한 백성답게,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답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어야 합니다. 긍휼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저는 인간 사이에 생기는 문제는 옳고 그름을 따져서는 절대로 해결될 수 없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을 때만이 해결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겸손은 기독교 윤리 중에서 가장 중요한 미덕입니다. 어거스틴은 그리스도인이 갖추어야 할 덕은 첫째도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이라고 하였습니다. 겸손은 겸손이라는 이름만으로 겸손해질 수 없습니다.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닌 자라는 자아 인식에서 출발합니다. 온유는 부드러운 태도로서 회개와 겸손에서 옵니다. 오래 참음은 남의 무례나 모욕이나 박해에 대해 화내지 않고 조용하게 오래 기다리는 태도를 말합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로 옷입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주께서 나를 아무 값없이 용서하신 것과 같이 서로 용서 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1만 달란트 빚을 탕감 받은 자로서 형제의 허물과 실수를 마땅히 용서해야 합니다. 형제의 허물과 실수를 용서하는 것은 내 힘과 의지로 안 됩니다. 용서할 수 있는 내적인 힘이 있어야 하는데 이는 위로부터 용서의 사랑을 덧입어야 가능합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이 극동에 가서 3년 동안 일하고 돌아오니 아내는 자기 친구와 바람이 나서 도망가고 두 아이도 없어졌습니다. 그는 두 사람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주기도문을 외울 때마다 용서해야 함을 알면서도 도저히 용서할 마음이 안 생기고 증오심만 불타올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목사님에게 찾아가 아무리 결심해도 안 되니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물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당신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당신에게 악을 행한 사람을 용서해 줄도 없습니다. 당신이 하나님께 간구하는 일 외에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말을 듣고 그는 주님 앞에 나아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여, 저의 힘으로 용서할 수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더 이상 용서해 주려고 노력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제 마음 속에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을 충만히 덧입혀 주시옵소서.“ 그리고 죄인을 용서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자 십자가의 용서의 사랑이 그의 심령에 물밀듯이 역사하여 두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힘을 덧입게 되었습니다.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심령이 막혀서 기도가 나오지 않습니다. 정신 건강에도 좋지 않을 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건강도 좋지 않습니다. 그러나 형제를 용서하게 되면 내 마음에 행복이 깃들게 되고 병도 낫게 됩니다. 스위스 심리학자요 정신과의사인 ‘폴 투르니에’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가 쓴 ‘의사의 임상기록’이란 책에 보면 악성 빈혈증이 있는 분이 무려 6개월 동안 병원을 다니면서 치료를 하였으나 낫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입원을 시켜 집중적으로 치료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위급한 환자가 약속한 날짜에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죽었구나 생각했는데 일주일만에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얼굴이 해 같이 빛나는 것이었습니다. 검사를 해 보니 빈혈이 깨끗이 나았습니다. 그 이유는 오랫 동안 미워하던 사람을 며칠 전에 찾아가서 용서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형제를 미워하게 되면 일도 잘 안 되지만, 형제를 용서하게 되면 생활에 활력이 생겨서 하는 일도 잘 되게 됩니다. 레오나르드 다빈치에게 지독히도 미워하는 원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 원수의 얼굴을 “최후의 만찬”에서 배신자 가룟 유다의 모습으로 그려 넣었습니다. 그 후 그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리려고 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아무리 애를 써도 도저히 그릴 수가 없었습니다. 얼마 후 그는 그의 영혼 속에 담긴 증오심이 그의 예술을 불구로 만들었음을 깨닫고 원수를 찾아가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 후 그는 비로소 예수님의 모습을 그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사랑은 아가페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윤리는 결국 ‘사랑’이라는 한마디로 표현됩니다. 사랑 없이는 모든 덕목들이 불완전하고 지속될 수 없으며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모든 덕목들을 하나 되게 합니다. 이제까지의 덕은 하나 하나의 옷을 입는 것이라면 사랑은 모든 의복을 하나로 통일하고 활동을 가능케 하도록 띠 띠우는 것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우리는 악한 감정들이 우리 마음을 통치하도록 허락해서는 안 되고,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 마음을 통치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란 그리스도가 주시는 평강으로서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릅니다(요 14:27).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을 주장하게 하려면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풍부하게 거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여러 가지 세상 일로 말미암아 평강을 잃고 힘들 때 말씀 공부를 하게 되면 신기하게도 모든 불안과 염려와 두려움과 공포가 물러가고 마음에 평강이 깃들게 됩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매사에 불평하는 자가 아니라 감사하는 자입니다. 감사는 새 사람의 생활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감사는 선택사항이 아닌 필수사항입니다. 성경은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였습니다(살전 5:18).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마음에 풍성히 거하게 되면 마음에 감사가 생기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마음에 풍성히 거하게 되면 지혜가 생겨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게 됩니다. 그리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16).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해야 합니다(17). 유명한 작곡가 바하는 작곡을 할 때마다 악보 끝에 자기 이름을 쓴 일이 없고 “INDNJC"라고 썼습니다. 이것은 라틴어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의 첫글자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가져야 할 마음 자세입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을 입은 자의 생활이 어떠해야 함을 배웠습니다. 새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위엣 것을 찾고 위엣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생각을 하기에 힘쓸 때 좋은 습관이 형성되고 그리스도의 형상이 조각된 인격이 형성되고, 더 나아가 우리의 인생이 아름답고 복된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 위엣 것을 찾고 위엣 것을 생각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으로 성장해 나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