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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Ⅱ 부:마가복음 9:14-29(믿음의 능력)

by Mark Yang   08/15/2019   Mark

Message


마가복음 Ⅱ 부 제 2 강


믿음의 능력


말씀 : 마가복음 9:14-29
요절 : 마가복음 9: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오늘 본문은 한계를 극복하는 믿음의 능력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불가능을 모르는 능력있는 인생을 살기 원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능력있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오늘 말씀을 통하여 믿음의 능력을 덧입고 한계를 뛰어넘는 능력있는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믿음이 없는 세대 (14-19)

예수님께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서 은혜로운 수양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남은 아홉 제자들은 산 아래서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14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은 큰 무리에게 둘러싸인 가운데 서기관들과 변론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안계시는 동안 자립적으로 귀신들린 아이를 고쳐 보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만 산 밑에 남겨두고 세 제자만 데리고 산 위로 올라가신 예수님께 대해 몹시 섭섭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세 제자에 대한 시기심으로 마음이 시끄러웠습니다. 이 때 마침 한 사람이 귀신들린 아이를 데리고 와서 고쳐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안 계시는 동안 뭔가 보여 주어야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그들은 과거 전도여행 때 귀신을 쫓아낸 경험이 있기 때문에 능히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때 어른 귀신도 쫓아냈는데 아이 귀신 쯤이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있게 소리질렀습니다. “귀신아, 나가라!” 그런데 귀신은 나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아이는 커다란 눈만 꿈벅 꿈벅거리고 있었습니다. 안드레, 빌립, 도마, 나다나엘이 차례로 나와서 소리쳤지만 꿈적도 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당황했습니다. 그들은 이제 합심해서 더 큰 소리로 “더러운 귀신아, 나가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귀신은 조금도 요동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다급해서 외쳤습니다. “나가라, 제발 좀 나가줘라!” 그러나 아무리 큰 소리를 질러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서기관들이 이들의 약점을 붙들고 비판하기 시작했습니다. “너희들이 무슨 권세로 귀신을 쫓아내는가? 신학교도 안 나온 무식한 너희들이 무엇을 안다고 양을 치지?” 제자들은 무리들 앞에서 광 좀 내려다가 오히려 창피만 톡톡히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당하고만 있을 수 없어서 서기관들과 함께 말다툼을 하였습니다. 제자들이 양의 문제를 해결해 주었더라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텐데 그들이 무능한데서 변론이 생겨났습니다.

바로 이 때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 오셨습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을 보자 심히 놀라며 달려와 문안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반갑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변형되었던 예수님의 얼굴에서 발하는 광채를 보고 놀랐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들과 무엇을 변론하는가 물으셨습니다. 이 때 무리 중 하나가 예수님께 나아와 문제를 고했습니다. “선생님, 벙어리 귀신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 왔나이다. 귀신이 어디서든지 저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하여 가는지라. 내가 선생의 제자들에게 내어 쫓아 달라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17-19). 아이의 아비는 딱한 사정을 고함과 동시에 제자들의 무능을 고소했습니다. 제자들이 왜 무능하게 되었을까요? 제자들은 과거 전도여행 때는 능력있게 귀신을 쫓아 내었습니다. 그들은 과거 경험을 의지하고, 이때까지 훈련받은 영적 실력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힘과 지혜로 귀신을 쫓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영적 세계를 잘 몰랐습니다. 과거 그들이 귀신을 내어 쫓을 수 있었던 것은 위로부터 영적 권세를 덧입고 두렵고 떨림으로 했기 때문입니다 (막6:7,12-14). 그러나 그들은 한 번 성공하고 나서 교만해졌습니다. 한 번 잘한 것 때문에 영적 성장이 막혀 버렸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의지하지 않았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이 때 그들은 철저히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이의 아버지로부터 제자들의 무능함에 대한 고소를 들으신 예수님은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19절을 보십시오.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예수님은 왜 ‘믿음이 없는 서기관들이여! 믿음이 없는 제자들이여!’ 라고 하지 않으시고 ‘믿음이 없는 세대여!’ 라고 했을까요? 예수님은 한 아이를 통해서 그 시대 전체를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 시대는 마치 귀신들린 아이가 거꾸러져 굴며 거품을 흘리고 이를 갈며 파리하여 가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 시대는 귀신들리고 병든 자들이 많았습니다. 한 마디로 그 시대는 귀신이 날뛰는 시대였습니다. 대개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가치관이 그 시대를 지배할 때 악령이 날뛰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의 문제를 어떻게 진단하셨습니까? 그 시대는 로마 강대국에 의해 주권이 짓밟히고 헤롯의 독재로 정치적인 자유를 박탈당한 것이 가장 큰 문제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시대가 근본적으로 믿음이 없는 것을 가장 큰 문제로 보셨습니다. 그 세대는 하나님을 떠났고,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불신은 그 시대를 좀 먹고 악령의 세력이 날뛰게 하는 주 원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세대를 슬퍼하셨습니다. 특히 영적 지도자들의 믿음 없음을 크게 슬퍼하셨습니다. 서기관들과 제자들은 그 시대를 대표하는 영적 지도자들입니다.

서기관들은 성서 학자로서 말씀을 연구하여 양들에게 말씀을 가르쳐야 했습니다. 그들은 말씀으로 백성들의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하고 희망을 불어넣어 주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문제 많은 양들에게는 무관심하고 종교 정치만 일삼았습니다. 그들은 권위를 부리며 제자들의 약점을 비판하고 변론만 일삼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을 참으실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더 참기 힘든 것은 제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장차 그 시대를 이끌고 나갈 영적 지도자들이요, 구속 역사의 주체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그 시대의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큰 희망을 두시고 3년 동안 이들과 동거동락 하시며 말씀을 가르치시고 믿음을 심으셨습니다. 그들이 양들의 선한 목자요, 그 시대를 감당할만한 능력있고 자립적인 종이 되도록 연단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오랜동안의 연단에도 불구하고 양 하나의 문제도 해결할 수 없을만큼 무능했습니다. 이들이 무능한 것은 근본적으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믿음 없는 것을 보실 때 심히 슬퍼하시며 탄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날도 믿음이 없을 때 슬퍼하시고 탄식하십니다. 오늘날도 많은 젊은이들이 교만과 정욕과 권력과 돈 등 갖가지 귀신에 사로잡혀 신음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때로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발작을 합니다. 그리고 젊은이로서의 기백과 생명력을 상실하고 파리하여져서 시름시름 죽어 갑니다. 이런 시대를 볼 때 절망적인 생각이 듭니다. 이 시대의 근본문제가 무엇입니까? 무능력한 정치 지도자들의 권력 다툼입니까? 90억$의 무역 적자입니까? 아니면 과소비의 성향, 향락문화의 보급입니까? 이 시대의 문제도 다른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우리들의 믿음 없음에 있습니다. 나의 믿음 없음에 있습니다. 나에게 믿음만 있다면 이 시대의 문제도 능히 해결할 수 있습니다.

Ⅱ.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20-29)

20절을 보십시오. 그 아버지가 아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오자 귀신은 예수님을 보고 발작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여 땅에 엎드러져 굴며 거품을 흘리게 했습니다. 귀신은 아이의 상태를 더 악화시켜 사람들의 믿음을 빼고자 하는 작전을 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아비에게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며 life history를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아이보다도 그 아버지에게 더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아버지가 아이로 인하여 얼마나 고생하였는가를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의 믿음을 돕고자 하셨습니다. 귀신들린 아이를 둔 아버지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아버지는 아들을 분신처럼 여기고 아끼고 사랑합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아들이 어릴 때부터 귀신 들려 땅에 엎드러져 굴며 거품을 흘릴 때 얼마나 절망했겠습니까? 또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뛰어들게 할 때 그 아비의 심정은 갈기 갈기 찢어져 절망의 심연으로 굴러 떨어졌을 것입니다. 귀신의 속성은 죽이고 파괴하는 것입니다. 귀신들린 사람을 보면 순간 순간 자살 감정에 사로잡혀 자살을 자주 시도합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언제 아이가 불과 물에 뛰어들어 자살할지 모르는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딱한 사정을 호소하고 도움을 구했습니다.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그는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이라는 단서를 붙였습니다. 이는 혹시 고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 고쳐주시고, 고칠 능력이 없으면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의 말 속에는 불신이 깊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그동안 아이를 고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을 것입니다. 유명하다는 의사는 다 찾아가 보고 푸닥거리도 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번번히 실패했습니다. 그러다가 절망 중에 예수님께 대한 소문을 듣고 마지막 희망을 걸고 예수님께 나아 왔습니다. 그가 처음 나왔을 때는 예수님은 능히 고치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마침 예수님은 안 계시고 인턴 훈련 받는 제자들만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부탁했으나 그들은 믿음이 없어 실패했습니다. 이로 인해 아버지의 마음 가운데 불신과 회의가 생겨났습니다. 반신반의 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실패로 인해 어두운 생각과 부정적인 생각과 해도 안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아버지의 심정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처음 목자가 되었을 때는 많은 양을 거느리는 대 목자의 비젼을 안고 출발합니다. 한 20명 쯤이야 능히 먹일 수 있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그래서 선배 목자님들이 양 한사람을 데리고 쩔쩔 매는 것을 보면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양을 쳐 보면 이런 확신이 점점 허물어져 갑니다. 열심히 피싱하고 말씀을 가르치지만 양들은 이상하게도 창세기 3강을 넘지 못하고 떠나 버립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 가는 나무 없다더라 생각하며 이제는 오기가 생깁니다. 그러나 열 번 찍어도 안 넘어 가는 것이 바로 양들입니다. 한 학기가 지나고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도 실패를 반복합니다. 이런 반복되는 실패를 하다보면 어느새 마음 가운데 해도 안된다는 이상한 믿음이 생깁니다. ‘믿음으로 안되는 것도 있다. 안되는 것은 절대로 안되는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다시 도전할 의욕조차 상실하고 맙니다. ‘피싱해서 1:1하면 또 실패할 것이 아닌가, 실패의 아픔을 맛보기 전에 아예 그만두자.’ 그리고 자신은 목자 체질이 아니라며 자학합니다. 실패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실패로 인해 우리 마음에 스며드는 불신과 회의, 부정적인 생각, 운명적인 생각이 더 문제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반신반의하는 아이의 아버지를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23절을 보십시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예수님은 그를 동정하기는 커녕 그의 불신을 사정없이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마음 속에 역사하는 불신의 세력과 싸우셨습니다. 불신은 바위 덩어리와 같아서 책망으로 깨뜨려야 합니다. 동정하게 되면 그 사람을 못쓰게 만듭니다. 예수님은 책망으로 불신을 깨뜨리고 그 마음에 불가능을 모르는 믿음을 심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불신시대를 슬퍼하시고 탄식하셨습니다. 또한 아이의 아버지의 불신섞인 말을 들었을 때 분노하시며 책망하셨습니다. 이를 볼 때 예수님께서 가장 분노하시는 것은 불신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불신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입니다. 이는 도덕적인 죄보다 더 큰 죄입니다.

민수기 13,14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이르렀을 때 12두령들이 가나인 땅을 정탐하고 정탐보고를 하였습니다. 이 때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한 10두령들은 그 땅 성읍은 견고하고 거민은 장대하여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다고 보고하였습니다. 백성들은 열 두령들의 불신에 찬 보고를 듣고 절망하여 밤새도록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불신에 분노하셨습니다. 불신은 하나님의 능력을 멸시하는 큰 죄입니다. 우리가 불신과 회의와 부정적인 생각을 가질 때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를 기뻐하시고 그 믿음을 축복하십니다.

예수님은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볼 때 믿음을 소유한 자에게는 불가능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나폴레옹은 나의 사전에는 불가능이란 단어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그에게도 불가능은 있었습니다. 그는 러시아를 정복하지 못했고, 죽음의 권세를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믿는 자는 러시아도 정복할 수 있으며 죽음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 선교사님들은 믿음으로 러시아에 나아가 무려 100명이 넘는 양들과 역사적인 제 1회 여름 수양회를 가졌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을 가진 자에게는 인간 최대의 한계인 죽음도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진 자에게는 허무나, 고독이나, 무의미나, 운명이란 단어가 없습니다. ‘안된다, 할 수 없다, 불가능하다.’ 이런 부정적인 소리를 입 밖에도 내지 않습니다. 믿음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믿는다고 하면서 한계적인 생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사람 낚는 목자 생활은 참으로 의미있고 좋은데 조금만 힘들면 목자 생활과 학과공부를 함께 할 수 없다는 한계적인 생각을 합니다. 나는 4학년이니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 직장에 다니니까 시간이 없어서, 사모님들은 아이들 때문에, 나는 육신의 질병 때문에, 나는 고등학교 밖에 안 나왔으니까, 나는 고대생이 아니니까 그럴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누구나 한계적인 요소가 있게 마련입니다. 누구나 불가능을 모르는 능력있는 인생을 살기를 원하지만 잘 되지 않는 것은 이 한계 때문입니다. 한계를 극복한다면 누구든지 능력있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칼빈은 수많은 육신의 질병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으로 육신의 연약함을 극복함으로 위대한 역사를 창조하는 능력있는 인생을 살았고 수많은 책을 저술하였습니다. 무디는 국민학교 밖에 안나왔으나 믿음으로 수많은 독서를 함으로 무식을 극복하고 위대한 말씀의 종이 되었습니다. 이 사무엘 선교사님도 믿음으로 한국인의 연약함과 운명을 극복하고 복음으로 미국 캠퍼스를 정복하고 세계를 정복하고 있습니다. 91년 8월 현재 48개국에 650명의 우리 선교사님들이 나가 계십니다. 이는 한국 선교 역사상 획기적인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분들은 모두 믿음으로 언어, 물질, 문화 등의 한계를 극복하고 이방양들을 믿어 순종시키는 역사를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실로 불가능이 없습니다.

믿음이란 참으로 큰 보화입니다. 믿음만 있으면 어디를 가도 승리의 인생, 능력있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학창 시절을 다 보내고 난 다음에 내게 남은 것이 무엇이 있는가 하여 빈손을 내밉니다. 그러나 학창시절에 믿음을 배웠다면 그 사람은 가장 성공적인 학창 시절을 보낸 것입니다. 믿음만 배우면 어디를 가든지 패배를 모르는 승리의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죄수의 몸으로 쇠고랑을 차고 로마에 갔습니다. 그에게는 감옥이라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4:13)고 외치며 간수들과 1:1을 하였습니다. 그 결과 온 로마를 복음화 시키는 기초를 놓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4:12절에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라.”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님이 하신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능력있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통해 큰 일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시키고 주님을 슬프시게 할 때가 많습니다. 이시간 주님의 책망하는 음성을 들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마음 속 깊이 자리잡고 있는 한계적인 생각을 믿음으로 극복하고 불가능을 모르는 능력있는 인생을 살아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업적이 아닙니다. 믿음입니다. 우리에게는 성공과 실패가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실패를 통해서 믿음을 배우느냐, 배우지 않으냐 하는데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반복되는 실패로 좌절하고 자학하다가 신앙생활을 포기하고 엎드러져 버립니다. 이는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이런 자는 평생 패배의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반복되는 실패를 통해서 믿음을 배우고 더 큰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합니다. 우리는 실패를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실패를 통해서 믿음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 젊은이들에게 주어진 특권은 실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실패해도 좋은 환경이 주어져 있습니다. 내가 실패해도 아무도 무어라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있게 실패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실패도 믿음으로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실패하면 믿음으로 일어서고, 또 실패하면 또 믿음으로 일어서면 됩니다. 실패하면 또 일어나 도전하고 실패하면 다시 일어나 재도전하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책망을 들은 아이의 아버지는 정신이 바짝 나서 소리질렀습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그 아버지는 문제의 원인이 현실의 어려움이나 예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불신에 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문제의 원인을 환경 조건이나 목자님이 안 도와 주어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불신에 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될 때 문제가 해결됩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큰 소리로 “내가 믿나이다”하며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살펴보니 여전히 그 마음에는 불신과 회의의 부정적인 생각이 강하게 역사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불신과 회의를 극복할 수 없었습니다. 이 때 그는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나의 믿음 없는 것까지 도와 달라고 외쳤습니다. NIV 성경에 보면 ‘help me overcome my unbelief!’, 즉 나의 불신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연약함과 불신과 회의와 부정적인 생각까지 다 진실되게 주님께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믿음을 갖게 해 달라고 울부짖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요, 영적 투쟁입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진실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아이를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더러운 귀신을 꾸짖었습니다.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는 들어가지 말라.” 그러자 귀신이 소리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갔습니다. 아이는 죽은 것 같이 되었으나 예수님이 손을 잡아 일으키자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사단의 세력을 멸할 수 있는 영적 권세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를 다스리시는 만왕의 왕이 되십니다.

예수님께서 집에 들어가시자 제자들이 종용히 물었습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단번에 귀신을 쫓아내신 능력의 비결이 무엇인가 알고 싶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믿음의 능력을 말씀하신 후 기도에 대해 말씀하신 것은 기도는 믿음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노라며 기도하지 않는 자는 실상 믿음이 없는 자입니다.

예수님은 기도만이 악령을 제어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제자들이 자립적이고 능력있는 종이 되는 비결은 바로 기도를 배우는 것입니다. 기도는 자신의 무력함을 깨닫고 겸손하게 주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영적으로 무능한 이유는 육신의 힘이 없거나 인간적인 지혜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영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영력은 기도를 통해서만이 덧입을 수 있습니다. 기도할 때만이 마음 속에 끊임없이 파고드는 불신과 죄의 세력을 이길 수 있습니다. 기도할 때 위로부터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고 자립적이고 능력있는 종이 될 수 있습니다. 믿음의 능력은 바로 기도의 능력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시대의 문제는 귀신들린 아이와 같이 거꾸러져 굴며 파리해져 가는 자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에게 이들을 구원할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내일이면 가을 학기가 시작됩니다. 우리는 좋은 영적 분위기 가운데서 여름 방학을 보내고 이제 불신이 가득한 캠퍼스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이번 가을 학기에 믿음과 기도로 불신적인 캠퍼스 분위기를 극복하고 승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