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Study View


마가복음 Ⅱ 부:마가복음 10:1-31(영생을 얻는 길)

by Mark Yang   08/15/2019   Mark

Message


마가복음 Ⅱ 부 제 4 강


영생을 얻는 길


말씀 : 마가복음 10:1-31
요절 : 마가복음 10: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오늘 말씀은 영생에 관한 말씀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영생을 갈구합니다. 영생이란 단순히 시간적으로 오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참으로 의미있고 가치있고 행복한 삶을 영원히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영생을 간절히 원하는 한 청년에게 그 비결을 가르쳐 주십니다.

Ⅰ.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16)

첫째, 결혼의 진리를 가르치신 예수님 (1-12)

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가버나움을 떠나 유대 지경과 요단강 건너편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점점 십자가를 지시고자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 가십니다. 이 때 큰 무리가 예수님께 모여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어떻게 맞이 하셨습니까? “예수께서 다시 전례대로 가르치시더니” 이는 평소 하던 습관대로 말씀을 가르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현재 온 인류의 죄짐을 대신 지셔야 하는 무거운 심적 부담감과 함께 제자들의 문제로 인하여 양들에게 말씀을 가르칠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문제가 있든 없든 항상 양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우리는 틈만 있으면 전례대로 쉬고자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틈만 있으면 말씀을 가르치시기에 힘쓰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만이 인생의 근본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열심히 말씀을 가르치시고 계실 때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질문하였습니다. “사람이 아내를 내어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이들은 틈만 있으면 예수님을 올가미로 잡고자 했습니다. 이들이 이혼 문제로 예수님을 시험코자 한 것을 보면 이들의 평소 관심이 무엇인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양무리들의 목자로서 하나님의 말씀 연구에는 관심이 없고 이혼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겉으로는 경건한 체하고 영적인 체하였으나 실상은 육신적이고 세속적인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모세가 어떻게 명했는가 되물으셨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왜 이혼 증서를 써주어 아내 버리기를 허락했는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모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노예 백성의 근성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이들은 육신적이고 감정적이었습니다. 특히 여자들을 종처럼 대하며 정욕의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형제들은 결혼을 하였다가도 마음에 맞지 않으면 함부로 이혼을 하였습니다. 한 번 버림 받은 여인은 인생을 완전히 망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세는 여인의 권리를 보호하고 이혼을 방지하기 위해 수치스런 일을 발견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주어 내어 보내도록 이혼법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감에 따라 사람들은 이 법을 이용하여 합법적으로 이혼 하였습니다. 예수님 당시는 종교 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 중에도 이혼을 함부로 하는 자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6-8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이들에게 이혼이 합법적인가 아니면 불법인가 말씀하시지 않고 창세기 말씀으로 결혼진리에 대해 가르쳐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함부로 이혼하는 것은 진리에 기초한 결혼을 하지 않고 자기들이 원하는대로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태초에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이를 다스릴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인간을 만드시되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한 몸이 되도록 짝지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결혼은 하나님이 창설하신 것으로서 거룩하고 신성하고 절대적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분명한 뜻과 목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결혼만큼은 내 뜻대로 내가 원하는 사람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결과 이혼도 자기 원하는대로 하게 됩니다. 그러나 실상 결혼만큼은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 뜻대로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 몸이 될찌니라.”고 말씀하시므로 부부의 관계가 어떠한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남녀가 일단 결혼하면 육신적으로나 영적으로 이제는 둘이 아니라 한 몸이 됩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절대적인 것처럼, 부부의 관계는 더욱 가깝고 절대적입니다. 그래서 부부는 촌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 이혼은 몸을 나누는 것이요 더 나아가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는 무서운 죄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자들은 이혼을 꿈에도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이혼으로 인해 자녀들이 얼마나 심한 고통을 겪는지 모릅니다. 이혼은 법이나 관습으로 결코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창세기 2장이 가르치는 결혼의 진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10-12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혼은 근본적으로 간음을 행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이혼의 동기가 정욕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혼하는 이유를 상대방의 성격 탓, 건강 탓, 고부 간의 갈등 등 여러 가지를 말하지만 좀 더 깊이 파고 들어가 보면 정욕에 있습니다.

둘째, 어린아이들을 영접하신 예수님 (13-16)

13절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예수님의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꾸짖었습니다. 지금 이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꼬마들이 들으면 안된다고 꾸짖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제자들이 어린 아이들을 무시하는 마음 때문에 함부로 대했음에 틀림없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는 엄격한 가부장적 제도하에 여인들과 어린아이들은 숫자에 치지 않을 정도로 무시했습니다.
이를 보신 예수님은 분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약한 여인이라고 해서 함부로 이혼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바리새인들로 인해 몹시 마음이 상하시고 분노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마음 가운데도 이런 바리새인적인 요소가 있는 것을 보시고 분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권위주의를 책망하셨습니다. “어린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그리고 계속해서 어떤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할 수 있는가를 말씀하셨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든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께서 보실 때 어린아이들은 어떤 점에서 귀합니까? 첫째로, 어린아이들은 순수하고 진실됩니다. 이들은 겉과 속이 같습니다. 이들은 자신을 감추거나 꾸미지 않습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옵니다. 둘째는, 신뢰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아이는 부모를 전적으로 신뢰합니다. 자기들에게 필요한 것을 다 공급해 줄 것을 믿고 조금도 염려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부모의 말씀을 100% 믿고 받아 들입니다. 셋째는, 겸손하게 배우는 마음이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자신의 부족한 것을 알기 때문에 자의식이 전혀 없이 배웁니다. 배우는 것을 조금도 부끄러워 하지 않습니다. 무엇이든지 묻고 배웁니다. 이 때문에 계속해서 성장합니다. 이렇게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하고 진실되며 신뢰하고 겸손한 자만이 하나님 나라를 소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같이 이중적이고 교만하고 따지고 비판하기를 잘하는 자는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험한 세상에 살면서 어른스러워지기 쉽습니다. 어른스러워 진다는 것은 세상 물이 들어가고 점점 타락해 간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권모술수도 쓰고, 몰라도 아는 체 해야 하고 서로 믿을 수 없습니다. 이런 세상의 악영향을 받아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어른스러워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성장한다는 것은 어른스러움을 벗고 어린 아이와 같이 된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자들을 보면 그 내면은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을 품에 안으시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와 같은 내면을 가진 자를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바로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품게 될 때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하고 진실되고 겸손하게 됩니다. 이 때 우리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됩니다.

Ⅱ.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17-31)

1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길에 나가실 때 한 청년이 예수님께 달려와 길바닥에 꿇어 앉아 물었습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는 영생이라는 절실한 인생 문제를 안고 예수님께 나아 왔습니다. 그는 어떤 사람입니까? 22절을 볼 때 부자였습니다. 누가복음 18장을 보면 관원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최연소자로 고시에 합격하여 권세와 명예를 얻었습니다. 또한 성실하게 일을 하여 부자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젊은 시절에 범하기 쉬운 경거망동과 교만과 청년의 정욕을 극복하고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성공한 뒤 이에 만족하지 않고 영생에 깊은 관심을 가질 만큼 인생을 진지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인정 받는 모범 청년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청년들은 그를 선망으로 눈으로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딸을 가진 부모들은 가장 훌륭한 사위감으로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그가 예수님께 나아와 영생에 대한 심각한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이를 볼 때 그는 세상 모든 것을 다 얻었지만 영생을 얻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그의 영혼은 참 만족이 없었고 마음에 참 평화와 안식이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그는 구원의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는 열심히 투쟁하여 세상 것을 다 얻었지만 영생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그 영혼은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체면 불구하고 예수님께 달려와 길바닥에 무릎을 꿇고 간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영혼의 절규를 들으시고 영생을 얻는 길에 대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영생의 길이 무엇입니까?

첫째, 죄인으로서 자아 발견해야 합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영생과 선에 대한 그의 잘못된 개념을 바로 잡아 주고자 하심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른 것이나,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 물은 것을 볼 때 도덕적인 차원을 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사람이 행위로 선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선의 개념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하시므로 절대 선이신 하나님 외에는 그를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이 다 죄인임을 선포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약간 착하게 살았으면 선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절대 선이신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모습으로 서게 될 때 죄인이 아닌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선포합니다 (롬3:10).

예수님은 이 사람도 예외없이 죄인임을 깨닫게 하시고자 십계명 중 인간 상호 간에 관계되는 계명을 인용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그러자 이 청년은 놀랍게도 자신있게 대답했습니다.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어릴 때부터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말은 결코 과장된 것이나 거짓이 아닙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자녀들을 잘 키우기 위하여 여섯 살이 되면 율법을 암송하도록 하고 계명을 지키게 했습니다. 이 사람도 이들 중 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는 6세 때부터 자기 부인을 배우며 말씀을 암송하고 지키는 생활을 해 왔습니다. 그는 사춘기의 반항심도 극복하고 젊은 날의 정욕문제도 극복했습니다. 그는 거짓말 한 번 하지 않고 정직하게 살아왔습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기 위해 여자들을 돌같이 여기고 쳐다 보지도 않았습니다. 지나가는 여자들을 안보기 위해 눈을 감고 가다가 전봇대에 수없이 부딪혀 이마에는 영광스러운 흔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남에게 폐끼치지 않고 성실하게 살아왔습니다. 그는 자기를 극복할 줄 아는 인간 기초가 잘된 아주 훌륭한 자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를 보시고 사랑하셨습니다. 그에게서 큰 가능성을 발견하셨습니다. 그래서 그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지적해 주시며 영생을 얻는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21a절을 보십시오.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이 말씀에서 부자 청년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계명의 마디 마디는 잘 지켰지만 그 근본정신은 실천하지 못했습니다. 그 근본정신은 처음의 네 계명은 우리의 몸과 마음과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나머지 여섯 계명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막12:30,31). 그런데 이 부자 청년은 그 근본정신은 알지 못하고 소극적으로 순종했습니다. 그는 신앙생활이란 남에게 폐 안끼치고 착실하게 살아가는 도덕생활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이란 소극적으로 나쁜 짓 안하고 주일날 교회에 착실히 다니면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이란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섬기고 봉사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하고 헌신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실 때 이 사람은 율법 정신에 순종하지 않은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면 죄인으로서 자아발견 하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상대적인 선을 기초로 나는 의인임을 주장할 때 결코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인간은 아담의 불순종 후 행위로 구원을 얻는데 실패했습니다. 영생은 인간이 선을 행함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은 하나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은혜로 주시는 온전한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있는 한 가지 부족함을 발견하고 겸손히 죄인임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생을 선물로 얻어야 합니다.

둘째, 영생에 최고의 가치를 두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예수님은 그에게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네게 하늘의 보화가 있으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이 말씀을 피상적으로 들으면 하늘의 보화 곧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다 팔아 알거지가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청년에게 가르쳐 주고자 하신 것은 영생은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귀하다는 가치관을 심고자 함이었습니다.
보화는 가장 가치있고 귀한 것입니다. 또 영원불변한 것입니다. 그러나 땅에 속한 보화는 이런 것이 없습니다. 의대생들에게는 세상 명예와 물질이 보화처럼 여겨집니다. 그래서 젊은 날 눈에 안약을 넣어가며 공부하여 전문의가 되고 박사학위를 받고 돈을 법니다. 그러나 죽을 때는 돈 한 푼도 가져가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 권세와 영광을 보화로 삼고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도서관에 앉아 고시 공부를 합니다. 그러나 세상권세와 영광은 풀의 꽃과 같아서 얼마 못가 시들어 버리고 맙니다. 땅의 보화는 영원하지 못합니다. 땅의 보화는 얻는 순간 우리를 실망시킵니다. 이런 것에 최고의 가치를 둘 수 없습니다. 부자 청년은 보화를 다 얻고 난 후 절망하여 예수님께 나아와 울부짖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러나 하늘 보화는 영원하고 결코 없어지지 않습니다. 하늘 보화는 우리에게 참 생명과 평안을 줍니다. 참된 보화는 나의 시간과 물질과 젊음과 정열을 다 바쳐도 아깝지 않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런 보화를 찾는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만일 인생을 다 산 후에 막트윈이나 체홉과 같이 “만일 내가 다시 인생을 산다면”이라는 말로 인생을 후회한다면 얼마나 비참한 일입니까? 인생은 시행착오를 해서는 안됩니다. 여기에는 재시험이 없습니다. 인생은 단 한 번 밖에 없습니다. 젊음은 다시 오지 않기 때문에 인생에 있어서 가장 소중합니다. 이 젊음을 참된 보화가 아닌 것에 써 버린다면 얼마나 후회스럽겠습니까? 참 보화를 찾고 이를 위해 전 인생을 드린다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도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이 하늘 보화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킵니까? 예수님은 부자 청년에게 하늘 보화를 약속하신 후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 자신이 바로 하늘 보화임을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은 참 보화가 되십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그 안에 참 자유가 있습니다. 그 안에 죄 사함이 있고 은혜가 있습니다. 그 안에 죽음의 권세도 이길 수 있는 부활이 있습니다. 그 안에 산 소망이 있습니다. 그 안에 모든 것이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더라도 이 예수님을 얻은 사람은 모든 것을 얻은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얻는다 할지라도 예수님을 잃어 버린다면 모든 것을 다 잃은 것입니다.
어떤 자가 예수님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에게 최고 가치를 두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가 얻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후 그의 가치관은 완전히 변화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여 과거 세상에서 보화로 여기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그는 보화되신 예수님을 얻고자 전 인생을 아낌없이 투자했습니다.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서 엄청난 세상 보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늘 보화를 발견했기 때문에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서의 모든 특권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자신의 전 생애를 드렸습니다. 이때 그는 구속역사에 영원히 남는 하늘 보화를 얻었습니다. 배사라 선교사님은 미국 미시시피의 공주로서 누구보다도 호화롭고 멋진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얻고자 이 모든 것을 기꺼이 팔고 1956년 25세의 꽃다운 나이에 한국에 오셔서 약 20여년 동안 결혼도 포기한 채, 가난과 운명에 울고 있는 한국 지성인들의 고난에 동참하셨습니다. 이로써 수많은 영적 자녀를 탄생시키셨습니다.

마태복음 13:44절을 보면 천국의 보화 비유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밭을 갈다가 보물 상자를 발견했습니다. 이 사람은 이것을 얼른 흙으로 덮어두고 덩실덩실 춤을 추며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소유를 팔아 그 밭을 샀습니다. 그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밭에 감추인 보화가 얼마나 값진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참 보화되신 예수님을 발견한 사람은 세상 보화를 파는 것을 조금도 아까워 하지 않습니다. 영생은 하늘로부터 오는 선물이지만, 이를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팔 수 있는 자에게 주어 집니다.

예수님은 부자 청년을 사랑하사 영생을 얻는 길을 분명하게 제시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22절을 보십시오. 그는 재물이 많은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물러갔습니다. 그의 문제는 영생도 얻고 싶고 땅의 보화도 소유하고 싶은 욕심이었습니다. 땅의 보화에 대한 미련은 그의 영적 눈을 멀게 하였습니다. 슬픈 기색을 하며 근심하며 가는 그의 얼굴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가는 그의 길의 종착지는 어디일까요? 결국 그는 영생을 팔아서 세상 재물을 사는 어리석은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99%는 다 잘했지만 결국 한 가지 부족한 것 때문에 그렇게 갈구하던 참 보화를 눈 앞에 두고도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지혜로운 것 같으나 원숭이와 같이 참으로 미련한 자입니다. 원숭이는 한 번 붙잡은 것은 절대로 놓지 않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를 이용하여 원숭이를 잡습니다. 상자에다 바나나와 같은 원숭이가 좋아하는 음식을 넣어 두고 손이 겨우 들어갈만한 구멍을 만듭니다. 원숭이는 이게 웬 바나나냐 하며 손을 넣어 잡습니다. 일단 움켜 쥔 다음은 손이 상자에서 빠지지 않습니다. 바나나만 놓으면 되는데 욕심 때문에 놓지 않고 꽥꽥 소리 지르다가 붙잡히고 맙니다. 우리는 원숭이와 같이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언젠가는 반드시 모든 것을 놓고 가야 합니다. 인생은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갑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부자 청년이 슬픈 기색을 하고 떠나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 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이 말씀은 한 마디로 부자가 구원 받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부자들의 문제는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소망을 두고 그 부로 선한 일을 행하고 주와 복음을 위하여 사용한다면 얼마나 귀한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부자들이 그렇게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믿음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분명한 영적 가치관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캠퍼스 시절 동안 분명한 영적 가치관을 쌓기에 힘써야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심히 놀라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실망에 찬 소리를 하였습니다. 그들이 그동안 주님을 좇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고 기쁨으로 인턴 훈련을 받은 이유는 장차 부와 권세를 소유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부자가 구원을 받을 수 없다면 언제까지나 가난하게 살아야 되지 않는가 하는 운명적인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가르쳐 주십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할 수 있느니라.” 구원은 인간의 선행이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있던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그에게는 우리가 주님을 위해 희생했으니 보상해 달라는 보상심리가 숨어 있습니다. 또 우리는 부자 청년과 같지 않다는 자기 의가 숨어 있습니다. 어쨌든 베드로와 제자들은 세상의 모든 보화를 버리고 예수님을 좇을 만큼 용기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에게 귀한 약속의 말씀을 주십니다. 29,30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우리가 주와 복음을 위하여 버리는 것은 손해 보는 것이 아니라, 백배나 축복을 받기 위한 투자에 해당됨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이 말씀은 사람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하는 인생목적을 가르쳐 줍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축복과 함께 핍박도 받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핍박만 없으면 좋겠는데 반드시 핍박이 있습니다. 그러나 핍박은 우리의 믿음을 순수케 하고 땅에 붙은 소망을 떨어버리고 참된 소망을 갖게 합니다. 핍박은 안일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도록 자극제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은 현세의 축복 뿐만 아니라 내세의 영생도 약속하십니다.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때 잃는 것 같지만 실상 모든 것을 얻게 됩니다. 31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이는 베드로에게 경고하신 말씀으로 자기 의만 내세우고 투쟁하지 않으면 나중 된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참 보화가 되십니다. 이 예수님을 얻기 위해 시간과 물질과 젊음 등 자기 소유를 파는 것이 바로 영생을 얻는 길입니다. 세상에 좋아 보이는 것이 많은 이 시대에 세상 보화에 미혹되지 않고 참 보화되신 예수님을 얻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